81화
아드리안은 급하게 클럽장인 카일 드바이시를 찾았다. 예상과는 다르게 카일은 그 기간 동안 대타를 해 주겠다고 흔쾌히 대답했다. 그리고 오르디나스의 온실이 워낙 자연 환경을 잘 옮겨 왔기 때문에 사람의 손길이 많이 필요하지 않는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렇게 대답하면서 카일은 어느덧 자리 잡은 케비쉬 묘목을 보고는 눈을 반짝였는데, 아무래도 아드리안이 벌어 올 오르디나스의 수입이 짭짤할 것이란 것을 예감했기 때문인 듯했다.
그래서 아드리안은 이렇게 뚱한 표정으로 왕자와 함께 이 마차에 올라탈 수 있게 되었다. 둘은 이전 주말 외출에 탔던 흰 마차를 타고 둘은 왕국의 수도로 향했다. 이번에도 그때와 같은 마부가 마차를 몰았다.
힐끔, 아드리안은 맞은편에 앉은 왕자를 확인했다. 미하일은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왕성에 가면 더 제멋대로 굴 수 있어 편하기 때문일 것이었다.
바사미엘 아카데미는 수도에서 조금 떨어진 도시였지만, 마차로 이동한다면 몇 시간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마 대부분의 학생들이 수도에 거주하기 때문일 것이다.
규칙적인 말발굽 소리와 돌바닥을 굴러가는 마차의 바퀴 소리가 들렸다. 아드리안은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왕후께서는 왜 나를 초대하셨을까?”
“걱정할 일은 없어. 지인들을 왕성에 초대하는 것을 취미로 삼을 뿐 나쁜 의도는 없을 테니.”
그래? 아드리안은 미하일의 자신 있는 대답을 들으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온실을 돌보는 일이 해결되었으니 왕성에서 편하게 지내는 것도 좋은 선택인 듯했다. 교내 식당에서 사용해야 하는 틸론 값도 굳고 말이다.
드넓은 숲을 나오자마자 마차는 곧바로 루스타바란의 수도로 향하는 매끄러운 길 위를 빠르게 달려갔다. 마차의 유리창 밖으로 활기찬 생활 소음이 들렸다.
“왕성은 언제쯤 도착해?”
분명 루스타바란의 수도는 도착한 듯싶었는데…… 다시 등장한 끝없이 이어지는 숲길에 맞은편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미하일을 향해 물었다. 응? 미하일은 그 질문에 고개를 들어 올려 창밖을 한번 확인 한 후 피식, 하고 가볍게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귀여운 질문이었다.
“이미 왕성 안이야.”
“……뭐?”
이 숲부터 왕성이라고?
아드리안은 진심이냐는 듯이 의심하는 눈빛으로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길 위로 루스타바란 국기가 새겨진 가로등이 보였다. 울창한 숲인 줄만 알았는데, 왕성의 진입로였다.
한동안 숲길을 달리던 마차는 커다란 왕성의 정문에서 미끄러지듯이 멈췄다.
덜컹, 마차를 세운 마부가 천천히 걸어와 문을 열었다. 마차에 오래 앉아 있느라 좀이 쑤셨던 아드리안이 그에 몸을 일으켜 마차를 내리려던 참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왕자님부터 내리시는 것이 법도에 맞습니다.”
바사미엘에서는 허용되었을지언정 왕성 안에서는 절대 허용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마부는 정중하게 아드리안의 어깨 위를 손바닥으로 내리눌렀다. 아드리안은 힐끔 마부를 바라보고는 뚱한 표정으로 다시 마차의 푹신한 의자에 앉았다. “왕자님. 내리시지요.” 마부는 다시 한 번 미하일에게 말했다.
미하일은 높은 마차를 단번에 휙 내렸다. 그러자 왕성의 정문에서 왕자의 방문을 환영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하인들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왕자님.”
응. 미하일은 대강 고개를 끄덕이며 아직 마차 안에 뚱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아드리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 해. 빨리 내려.”
미하일은 아드리안이 마차에 내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벼운 고갯짓으로 정문을 가리켰다.
왜 저렇게 들떠 있지? 아드리안은 뚱한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아드리안은 왕성의 고풍스러운 계단을 천천히 올라가며 복도에 징그럽게 쭈욱 걸려 있는 왕족들의 초상화들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들의 뒤에는 왕성의 고용인 몇 명이 조용한 발걸음으로 뒤따르고 있었다.
“자, 여기가 네 방이야.”
어때? 라고 말하는 듯이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부담스러웠던 아드리안은 시선을 비껴서 방 안을 확인했다. 루스타바란 왕국의 국력을 손님에게 과시하듯이 여느 왕족의 알현실보다 더 화려한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대륙 제일가는 부자인 드래곤에게 이 화려한 방이 어떠냐고 물어본다면…… 별 감흥은 없었다.
“그렇구나…….”
“내 방 바로 맞은편은 특별한 손님 외에는 개방하지 않는 곳이라고.”
“그래? 영광이네.”
대충 반응하는 아드리안의 대답에 미하일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상상한 반응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때 아카데미에서 열렸던 그 조잡한 파티에서는 처음 와 본다며 기가 죽었던 주제에 이 반응은 뭐지?
그는 마음속으로 이를 갈며 이 왕성 안에서 아드리안이 좋아할 만한 것이 무엇일지 고민했다. 상단 가문의 평민이 놀라워하는 얼굴이 꼭 보고 싶어졌다.
***
“아드리안.”
미하일의 목소리에 아드리안이 눈을 떴다. 아침인가. 그는 눈가를 찌푸리며 몸을 일으키면서 습관적으로 바로 옆의 협탁에 손을 짚으려 했으나,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응? 아드리안은 잠시간 지금 상황에 익숙해지려 멍한 잠기운을 떨쳐 냈다. 그러자 왕성의 손님방에 갖춰진 고급스런 가구가 눈에 들어왔다.
아, 여기는 기숙사가 아니라 왕성이었지.
“……미하일? 무슨 일이야.”
편하지만 무척 값비싼 재료로 만들어진 옷을 입고 있는 미하일이 눈에 들어왔다.
“일어났으면 이제 준비하고 나와.”
아드리안의 질문에 미하일은 저 할 말을 하고는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십 분이면 되지? 응접실에 차를 준비시키라 해야겠군.”
“잠깐, 잠깐만.”
아드리안은 잠결에 헝클어진 머리칼을 대강 손가락으로 정리하며 미하일의 말을 막았다. 여기는 왕성이고, 손님용 방인 것은 맞는데 미하일이 왜 내 침대 옆에 있는 거지. 저놈의 방은 맞은편일 텐데?
“……내가 노크 소리를 못 들었나? 아무 소리도 안 났는데.”
“…….”
당연히 방문을 두드린 적 없는 미하일은 거짓말은 하기 싫었던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드리안은 그런 미하일을 잠시간 바라보다 물을 한 잔 마시려 손을 뻗었다. 그를 위해 협탁에는 투명한 물 주전자 하나와, 컵 그리고 정원에서 꺾어 온 생그러운 꽃 몇 송이가 화병에 꽂혀 있었다.
부스럭, 어제 왕성의 하인들이 내어 준 고급 잠옷이 쓸리는 소리가 났다. 미하일은 문득 그 잠옷을 입은 아드리안을 내려다보았다. 부드러운 천과 슬쩍 보이는 곧은 목덜미에, 아드리안이 제 성의 손님방에 있다는 사실이 그제야 실감이 났다.
“아, 아무튼 십 분 뒤에 응접실로 나와.”
미하일은 갑자기 홱 몸을 돌려 나갔다.
무슨 볼일이길래…… 아드리안은 사치스러운 왕성의 커다란 침대에 멍하니 앉아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하일은 그 대답을 보기도 전에 몸을 돌려 손님방을 나섰다. 쉬러 온 왕성에서도 강제로 기상한 아드리안은 외출 준비를 대강 하고는 응접실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
미하일은 응접실에 아드리안이 들어오자마자 어딘가로 이끌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왕성에서 조금 떨어진 숲속이었다. 그곳에는 커다란 유리 돔이 자리하고 있었다.
“바사미엘의 온실보다 훨씬 좋지?”
미하일은 은근히 자랑스러워하는 듯이 말했다. 그는 아드리안의 감탄사를 기대하며 고개를 들었으나 아드리안은 뚱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뭐…….”
거의 커다란 저택 하나와 그 정원 하나까지 들어갈 정도의 넓은 공간이었다. 아드리안은 미하일의 재촉에 그 내부를 다시 한번 스윽 가볍게 훑어보았다.
“넓네.”
겨우 그게 다라고? 미하일은 아드리안의 간결한 대답에 팍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훨씬 다양한 종들을 가져왔군.”
“…….”
잠시간 아드리안을 노려보던 미하일은 이내 더 큰 반응에 대한 기대를 버렸다.
그때였다.
뻣뻣하게 커다란 온실에 덩그러니 서 있던 아드리안이 갑자기 온실의 한구석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것이었다. 미하일은 그의 등에 대고 “왜?”라고 말했으나 아드리안은 아무 말없이 구석의 잡초 사이를 빤히 관찰하는 데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어? 이것까지 보존했을 줄이야.”
아드리안은 흙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바닥의 풀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세심하게 툭 건드렸다. 미하일은 바로 옆에 선 채로 그런 아드리안을 내려다보았다. 뭔지는 모르겠으나 저렇게 열심히 본다는 건 마음에 든다는 거겠지?
“편하게 둘러보고 있어. 난 아침 훈련 다녀올 테니.”
미하일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여전히 잡초를 관찰하고 있는 아드리안에게 말했다.
***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나? 아드리안은 기대 없이 들어 온 왕성의 온실에서 발견한 약초들을 살펴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가 온실을 나오자 벌써 점심때가 다 된 듯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아드리안이 서둘러 숲을 나와 왕성의 정문에 들어선 순간이었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무언가 목 근처로 날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드리안은 눈가를 찌푸린 채 그것을 낚아채는 대신 멈칫 몸을 굳혔다.
등 뒤에서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건 뭐지?”
아드리안은 자신의 목에 칼을 가져다 댄 인간을 확인하려 고개를 뒤로 돌리려 했다. 그러자 그는 “흐음?”이라는 소리와 함께 검날을 목에 더 바짝 붙였다. 주륵, 아드리안은 시선만 아래로 내려 목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피를 잠시간 바라보았다. ……왕성 안에서 이렇게 멋대로 굴어도 되는 인간이라면, 그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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