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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80화 (80/184)

80화

봉투 안에는 편지지 두 장이 정갈하게 담겨 있었다. 아드리안은 그중 열자마자 보이는 앞장을 꺼내 들었다. 꺼내고 보니 뒤에 있는 편지지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빈 종이었다.

그가 꺼낸 두껍고 광택이 도는 편지지에는 휘갈겨 쓴 필체로 간결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방학 동안 왕성에 머무는 것을 허락한다.’

그 뒤에는 루스타바란 왕가의 문양이 찍혀 있었다. 이게 무슨 말이지? 초대장치고는 미묘하게 고압적인 명령 같은 문구였다. 아드리안은 손안의 고급스러운 편지를 잠시간 바라보며 혹시 다른 의도가 있는 건지 고민했으나, 정말로 왕성에 초대한다는 것이 전부인 것 같았다.

아드리안이 아무 말없이 그 편지를 내려다보고 있자, 이상함을 느낀 왕자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뭔데?”

미하일은 전령을 바라보며 눈짓했으나, 발신자의 비밀을 지킬 의무가 있는 전령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래? 그럼 내가 알아서 확인하지. 왕자는 입가를 끌어 올려 피식, 웃고는 성킁성큼 걸어가 아드리안의 손에서 편지를 낚아채어 갔다.

이와 동시에 전령이 왕가의 편지를 존중하지 않는 미하일의 행동을 조심스레 지적했다.

“저하, 다른 사람의 편지를 마음대로 그렇게 보시면…….”

“알아.”

이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궁중 예법이었다.

미하일은 감히 누구에게 예법을 가르치냐는 듯이 비웃으며 당당하게 아드리안에게 온 편지를 읽었다. 아드리안은 순순히 왕자에게 편지를 넘겨주고는 그의 표정을 살폈다. 미하일은 짧은 편지를 빠르게 훑고는 전령을 향해 고개를 들어 질문했다.

“누가 보낸 거지?”

전령은 잠깐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르민 왕후님의 편지입니다.”

어머니가? 여전히 막무가내로 간섭하시는군.

미하일은 머리칼을 손바닥으로 대강 쓸어 넘겼다. 전령은 그런 왕자의 바로 옆에서 아무 생각 없이 서 있는 평민을 바라보았다. 편지를 읽었다면 그에 대한 답장을 받아 가야 하는 것이 전령의 임무였는데, 아무래도 왕가의 초대를 받은 것이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 틀림없었다.

“편지를 다 읽으셨다면, 답장을 봉투에 동봉된 빈 종이에 작성해 주시면 됩니다. 제가 왕후님께 바로 전달드리겠습니다.”

전령은 정중한 자세로 아드리안에게 답장을 재촉했다.

어쩌란 거지. 아드리안은 전령을 말을 듣자마자 미하일을 힐끔 바라보았다. 왕자는 도움을 청하는 듯한 아드리안의 눈빛에 입을 열었다.

“첫 주에 출발하겠다고 써.”

“……난 방학 동안 아카데미를 나갈 생각이 없는데?”

“그러면 그렇게 쓰든가.”

왕자는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어차피 지금 네가 답장으로 왕성에 갈 생각 없다는 헛소리를 적어 보내면 같은 편지를 또 다시 가져올 거다. 가겠다는 답장이 돌아올 때까지.”

왕가의 화법이란 그런 거거든.

미하일은 퉁명스런 말투로 대답했다. 다른 이들이라면 가문의 경사라며 방학 내내 머물겠다고 즉시 답장을 보낼 것이었으나, 저 룸메이트는 평민이라 상황 판단이 안 되는 듯했다. 내키지 않는다는 저 표정이 왠지 모르게 기분 나빴다.

“이쪽도 방학 내내 왕성에 머물 건 아니야. 잠깐 얼굴만 비치고 다시 바사미엘로 돌아올 거니까.”

“난…….”

“아드리안.”

계속해서 거절하려고 변명거리를 찾으려는 아드리안의 말을 미하일이 단번에 끊었다. 고민하는 것 자체가 무척 답답하다는 표정이었다.

“왜 그렇게 요령 없고 계산도 느려. 헤데라 상단의 이름이 울겠군.”

“내가……?”

아드리안은 처음 들어보는 평가에 어이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왕자는 당당한 자세로 말을 이어 갔다. 루스타바란의 호화스러운 손님 대접은 대륙 내에서 최고로 유명했다. 왕자의 룸메이트인 아드리안 정도라면 그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어차피 식물 돌보는 것 외에는 방학 동안 할 일도 없잖아. 왕성에서 편하게 쉰다고 생각해.”

“…….”

아드리안의 따뜻했던 밀빛 눈동자가 대번에 차갑게 식었다. 말하는 꼬라지 하고는. 동시에 미하일 또한 방금 저 자신이 한 말을 곱씹어 보았던지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을 때였다. 왕성에서 편하게 쉬라는 마지막 말이 그의 본심이었으나 어쨌든 못할 말은 아니었다.

“저…… 결정하셨다면, 답장을 적어 주시면 됩니다.”

한 학기를 지낸 룸메이트치고는 사이가 별로시군요. 전령은 노련하게 웃으며 청년들 사이에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려 애썼다. 아드리안은 골치 아프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왕후님께서는…… 왜 이런 초대를 하시는 겁니까?”

“죄송합니다만, 그분의 생각을 제가 넘겨짚어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이 곧 그분의 의지이니 답장을 해 주시지요.”

파티에 동행했다는 소식을 들었나 보군. 미하일은 벽에 기댄 채 편지를 내려다보며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아드리안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초대는 감사하지만 못 갈 것 같다고 쓸 겁니다.”

아드리안은 손안의 편지지를 내려다보며 미하일이 아닌 전령에게 말했다. 바로 옆의 왕자더러 들으라는 듯이 또렷한 목소리였다. 희고 단단한 손가락이 편지 봉투 안에 남아 있는 빈 편지지 한 장을 꺼내 들었다.

미하일은 작게 혀를 차며 “그래, 한번 네 마음대로 해 봐.”라고 말하며 팔짱을 꼈다. 전령은 아드리안이 깃펜을 빠르게 움직여 쓴 편지를 다시 정성스레 챙겨 품 안에 넣었다.

“그럼.”

전령이 두 사람의 기숙사 방문을 닫았다. 미하일과 아드리안은 동시에 서로를 비웃으며 반대편으로 등을 돌렸다. 그러나 며칠 뒤, 아쉽게도 미하일의 말이 맞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방학을 맞은 바사미엘의 기숙사는 한껏 분주하고 소란스런 상태였다. 누군가 본관 앞의 마차에 올라타며 뒤에 서 있는 다른 학생을 향해 외쳤다.

“약속대로 방학 중에 혹시 캘리나령에 들리면 우리 저택으로 오는 거다?”

“당연하지. 그 근방으로 매년 여름휴가를 가니 들를 수 있을 것 같아.”

“진짜 오면 좋겠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손님방 준비해 둘게.”

“……못 갈 수도 있어. 알지?”

“알지!”

마차에 털썩 앉은 그는 창밖으로 팔을 내밀어 크게 흔들었다. 본관 앞에 서 있던 여학생은 “꼭 와야 해. 꼭!”라고 말하는 남자 친구를 향해 “응! 당연하지.” 하고 대답해 주었다. 무척 풋풋한 분위기였다.

신입생 커플의 애절한 작별인사를 얼결에 보게 된 아드리안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관의 온실에 심은 케비쉬 묘목을 살펴보고 오는 길이었다. 새로운 토양에 잘 적응한 건지 더 푸릇해진 이파리에 아드리안의 마음도 푸근해진 참이었다. 그러나 아드리안의 좋은 기분은 기숙사 방 앞에 도착하자마자 순식간에 땅으로 처박혔다.

“안녕하세요. 오늘 날씨가 참 좋군요.”

지난번 편지를 가져왔던 남자였다. 전령은 루스타바란 왕국의 제복을 입은 채 아드리안을 향해 싱긋 웃었다.

“……네.”

아드리안은 마지못해 대답하며 기숙사 방문을 열려다가 행동을 멈췄다.

“혹시 제게 볼일이 있으신 겁니까?”

“아, 먼저 알아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루스타바란 왕가에서 온 편지입니다.”

그는 그리고는 품 안에서 편지 하나를 꺼내 아드리안의 앞에 내밀었다. 그때 봤던 것과 똑같은 편지였는데, 그 안의 종이까지 완벽히 같았다.

“…….”

미하일의 말이 맞았다. 아드리안은 눈을 살짝 감으며 한숨을 뱉었다. 어쩔 수 없군.

“잠깐 들어오시지요.”

아드리안은 터벅터벅 방 안으로 걸어가 빈 편지지 위에 ‘방학 첫 주에 뵙겠습니다.’라고 휘갈겨 썼다. 미하일의 말대로 빨리 보고 치우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편지를 봉투에 다시 정리해 넣고는 뒤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 전령에게 내밀었다. 그는 웃으며 “제가 잘 전달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며 그것을 다시 품 안에 소중히 집어넣을 때였다.

벌컥, 기숙사 방문이 열리고 미하일이 들어왔다.

그는 순간 느껴지는 아드리안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인기척에 날카롭게 눈을 치켜떴으나, 이내 전령임을 알아채곤 평상시의 눈빛으로 갈무리했다. 그러고는 그의 품 안에 들어가는 왕가의 편지를 확인했다.

“안녕하십니까. 왕자 저하. 좋은 점심입니다.”

전령은 처음 아드리안을 마주쳤을 때처럼 싱긋 웃으며 미하일에게 고개를 숙였다. 미하일은 가볍게 전령의 인사를 받고는 교복의 넥타이를 풀며 등 뒤의 아드리안에게 입을 열었다.

“난 내일 출발할 건데. 이동 인원을 두 명으로 다시 요청 넣을까?”

“…….”

아드리안은 심통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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