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해 봐. 확인이라는 거.”
미하일의 퉁명스런 반응에, 벽에 기대어 있던 아드리안이 “잘 생각했어.”라고 말하며 가벼운 걸음으로 마주 섰다.
“…….”
아드리안의 따뜻한 밀빛 눈동자가 미하일의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미하일은 인상을 찡그리며 슬쩍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별것 없는 시선이었음에도 왠지 모르게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왕자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바로 다음 이어진 아드리안의 행동 때문이었다.
투둑.
아드리안의 흰 손가락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방 안에 서있는 미하일의 셔츠 가장 윗 단추를 끌러 내렸다.
탁! 매섭게 그 손등을 내치는 소리가 기숙사 방을 채웠다.
“왜?”
도와주려던 마음뿐이었던 아드리안은 갑자기 미하일에게 얻어맞고는 뭐 하는 짓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마나 컨트롤이랑 이게 무슨 상관인데?”
“일단 흐름을 직접 확인해 봐야 할 것 아니야. 아, 됐어. 케비쉬 묘목도 내가 알아서 잘 치워 볼게. 도와주려고 하는데 이런 취급까지 받으면서…….”
멍청한 게 드래곤의 조언은 천금 같은 기회인 줄도 모르고. 아드리안이 손을 털고 끝내려는 참이었다.
턱, 미하일의 굳은살 박힌 거칠한 손바닥이 아드리안의 손등에 닿았다. 몇 달이나 같은 방을 썼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서로의 맨살이 맞닿아 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힐끔, 아드리안의 눈동자가 두 사람의 손이 얽힌 곳을 향했다. 미하일의 손바닥은 인간들의 평균 체온보다 조금 높은 듯했고, 그에 비해 아드리안은 본체가 파충류라 그런지 언제나 조금 서늘한 온도를 유지했다. 둘의 온도 차가 극명했다.
윽, 뜨거워. 둘 중 먼저 손을 털어 낸 것은 아드리안이었다. 마치 더러운 것에 닿았다는 듯이 손바닥을 털어 대는 아드리안을 보면서 미하일은 인상을 팍 구겼다.
“나도 싫거든?”
“알았어. 그럼 네가 직접 벗어.”
“……뭐? 왜.”
“…….”
도와준다는데. 질문이 많다?
아드리안은 대답하기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왕자는 그 표정에 잠시간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겨우 입술을 열었다.
“……셔츠만 벗으면 되지?”
그러고는 고민했던 것과는 달리 빠르게 셔츠 단추를 위에서 부터 하나씩 풀었다. 그러고는 아드리안 쪽을 힐끔 바라보더니 상의를 완전히 벗었다. 셔츠를 대강 접어 침대에 휙, 던지고는 뭐든지 해 보라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 상태로 마나를 끌어 올려. 상상하기 힘들면 검을 쥐고 서도 돼.”
“……필요 없어.”
마나 컨트롤 수련을 지켜보겠다는 거군. 그렇다면 매일 하던 일이라 굳이 검까지 쥐고 있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미하일은 그럴듯한 주문에 두 눈을 지그시 감고는 한 번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잠시간 아무 말없이 마나를 끌어 올리는 일에 집중했다.
몇 번의 들숨과 날숨이 미하일의 몸을 스쳐 지나가며, 몸 내부에서 무언가 치솟아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이마에 닿던 머리카락이 살랑이며 조금씩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슥, 갑자기 차가운 것이 등에 닿아 미하일의 감은 눈꺼풀이 움찔 떨렸다. 아드리안의 손바닥이었다.
“……컨트롤에 집중해야지.”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드래곤은 왕자가 마나 컨트롤에 집중하는 동안 등 뒤로 걸어가 등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미하일은 등에서 느껴지는 아드리안의 옅은 숨에 흡, 하고 몸을 더 경직시켰다.
그러자 조금 끌어올려졌던 왕자의 마나가 푸스스- 하며 흩어져 버렸다.
“다시.”
아드리안은 단호한 목소리로 미하일의 마나 컨트롤 훈련 재개를 요구했다. 미하일은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눈을 감고는 자신의 호흡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팔도 뻗어 봐. 이 손가락 끝에 집중하는 거야.”
아드리안은 툭, 하고 미하일의 팔을 가볍게 쳤다. 왕자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다시 마나를 끌어 올리려 했으나 조금 전처럼의 성과는 보일 기미가 없었다.
“미하일. 집중을 해.”
“……옆에서 떠들지만 않아도 바로 된다고.”
퉁명스러운 미하일의 말투에 미하일의 등을 유심히 바라보던 아드리안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세상물정 모르는 말에는 연장자로서 충고할 의무가 있었다. 심지어 미하일은 미래에 전쟁에 참가할 예정인 인간이었다.
“전쟁에 출전해서도 그렇게 말하는 소드 마스터 봤어? 어떤 상황에서도 마나를 컨트롤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지.”
“…….”
저 말에 딱히 할 말이 없는 왕자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다시 제대로 눈을 감고 호흡을 정리했다. 미하일의 은발 머리칼이 조금씩 살랑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부웅- 조금씩 무언가가 그의 몸을 감싸듯 따뜻한 바람이 피부에 닿아왔다. 아지랑이 같은 것이 그의 몸을 감싸더니 흐르듯이 요동쳤다.
아드리안은 손가락으로 왕자의 벗은 어깨를 스윽, 그었다. 내 예상이 맞군.
마나는 심장에서 시작해 몸 전체로 퍼지는데, 미하일은 어느 부분에서 막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왕자가 아무리 집중을 해도 손끝까지 마나가 퍼지지 않는 것이었다.
“눈앞에 뭐가 보여?”
미하일은 잠시간 침묵하더니 여전히 눈을 감은 상태로 입을 열었다.
“……지금 눈 감고 있는데.”
“그 상태에서 마나를 끌어 올리면, 마나 흐름이 보일 텐데?”
“빛나는 알갱이들이 보여. 하지만 이건…….”
“그게 네 마나의 상태야. 다 섞이지 않고 따로따로 움직이고 있지?”
“그렇긴 하지만…….”
왕자는 의심스러운 표정을 짓자 아드리안이 단호하게 진단을 내렸다.
“간혹 가다 이런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있어. 본인이 컨트롤할 수 있는 마나보다 더 진한 마나를 가지고 태어나는.”
사실은 이 경우는 평범한 것과는 조금 거리가 멀었다. 루스타바란 왕가 사람들의 몸 안에는 드래곤의 마나가 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드래곤은 그런 진실을 알려 줄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미하일의 등에서 눈을 떼지 않고 설명을 이어 나갔다.
“마나를 한 번씩 흔들어 줘야 해. 그러면 가라앉았던 마나는 위로 올라오고, 위에 떠 있는 마나는 내려가면서 섞이거든.”
치익- 성냥에 불을 붙이는 소리에 미하일이 한쪽 눈을 살짝 떴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 아드리안이 이상하게 생긴 동그란 검은 물체를 들고 불을 붙이는 모습이 들어왔다.
“이게 마나를 섞어 줄 거야. 걱정 마. 몸에 나쁜 영향을 주지는 않아.”
아드리안은 어딘가에서 가져온 조그만 받침대에 검은 물체를 올려 두었다. 그것의 윗부분에는 불이 붙어 특이한 향기를 뿜고 있었다.
“……그런 말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데.”
“까다로운 궁정 마법사들 중에는 이런 신체를 가진 경우가 아마 없을 거고, 기사들은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없잖아. 네 경우를 이해할 수 없었을걸. 모두들 그냥 마나 컨트롤 수련이 부족해서라고만 이야기해 줬겠지.”
“…….”
정답이었다. 미하일은 슬쩍 눈을 떠서 아드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는 향초의 연기가 잘 번지도록 위치를 조정하고 있었다.
“그냥 켜 두면 돼?”
“응, 우선 십 분만 시도해 보고 변화가 있는지 확인해 봐야 해.”
털썩, 왕자는 아드리안의 진단에 팔짱을 낀 채 침대에 앉았다. 꼿꼿한 자세로 자리에 앉자, 그의 벗은 상체가 더 도드라져 보였다.
“그래서 그건 뭐야.”
“보통 마나를 중화하기 위해서 먹는 약인데, 네 경우에는 호흡기관으로 들이마시는 게 나을 거야. 가급적이면 약이 몸 전체에 퍼져야 하거든.”
침대에 앉은 미하일은 여전히 자신의 차도를 관찰하려는 듯 약초를 뒤적거리는 아드리안을 향해 말했다.
“이런 일에 익숙해 보이는데…… 맞아?”
“비슷한 고민을 했던 친구가 있었거든.”
친구?
왕자는 아드리안의 입에서 나온 ‘친구’라는 단어에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그러고 보니 좀처럼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아드리안의 입에서 나왔던 이름이 하나 있었다.
“그때 그 사람?”
뭐? 누구 말하는 거지. 아드리안은 미하일의 질문에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러자 미하일의 눈동자와 서로 마주 보는 상태가 되었다.
“같이 놀러 나갈 때마다 재밌었다던. 데니스 바냐.”
“뭐? 네가 어떻게 그 이름을…….”
아하, <취향과 예술> 시간에 내 입으로 이야기했었구나.
따뜻한 갈색 눈동자가 잠깐 떨리다 이내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그것은 곧바로 살풋 접히며 반달 모양새를 만들었다. 하하, 아드리안은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었다.
“아니야. 케비쉬 묘목은 기억도 못 하면서 그 이름은 기억하고 있네? 이상한 기억력이군.”
미하일은 갑자기 환하게 웃는 아드리안을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평상시에도 웃는 얼굴이기는 했지만 그건 정말 행복해서 웃는 얼굴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역시 진짜로 웃는 저 표정이 가장 잘 어울렸다.
아드리안은 자신을 향한 미하일의 눈빛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방 안의 시계를 흘끔,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미하일에게 고갯짓을 했다.
“자, 십 분 지났어. 다시 해 봐.”
“……아직 아무런 느낌이 없는데.”
미하일은 마지못해 침대에서 일어나 닫힌 방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고는 아드리안이 시키는 대로 방문에 두 손을 짚고 마나를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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