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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76화 (76/184)

76화

어두운 기숙사 방 안에서 아드리안 헤더는 편한 옷차림을 한 채 푹신한 소파에 기대 앉아 있었다. 자그마한 테이블 위의 따뜻한 램프 빛이 남자의 잘생긴 얼굴을 더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팔랑, 아드리안의 손에 들린 신문이 한 장 넘어갔다. 어제 자 신문이었으나, 의뢰를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서 상관없었다. 드래곤은 빠르게 몇 장을 넘겨 <바사미엘 잡화점> 페이지를 확인했다.

“역시.”

아드리안이 중얼거리며 미소 지었다. 경매에 올라온 물품 중 ‘케비쉬’라는 글자를 스윽 검지로 긁었다. 오르디나스 클럽의 주 수입원이었지만, 워낙 예민한 놈들이라 불규칙적인 지진이 아카데미를 뒤흔들면서 키울 수 없게 된 식물이었다.

이제는 이 묘목을 다시 키울 수 있게 되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니, 알고 있는 사람이 딱 한 명 더 있긴 하지…… 아드리안은 슥, 신문에서 시선을 떼어 소파 맞은편에 놓인 미하일의 침대 쪽을 확인했다.

미하일은 침대에서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왕자의 은빛 속눈썹이 램프의 따뜻한 빛에 맞춰 적당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왕성은 아니지만 미하일은 그의 뼛속까지 새겨진 왕가의 예법을 바사미엘의 기숙사에서도 잘 지켰다.

평생 단 한 번도 방을 나눠 써 본 적 없었을 텐데도 그는 잠버릇도 하나 없이 고요하게 숨소리만 내쉬며 잠들어 있었다. 그의 침대 바로 앞 카펫에는 푹신한 실내화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침대 머리맡에는 새로 산 검이 정성스레 손질되어 있었다.

피식, 드래곤은 잠들어 있는 동안에는 천사처럼 보이는 왕자를 보다가 웃음을 흘리고는, 시선을 떼어 다시 신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 ──── ·바사미엘 잡화점· ──── ·

중앙 우체국과 연결된 우편함 대여 ✧ 회당 1틸론

· ────── ·

마나 증진 엘릭서 ✧ 개당 15틸론

· ────── ·

시그리드 교수 <심화 마나 운용법> 필기 ✧ 1일 대여에 30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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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비쉬 묘목 ✧ 그루당 10틸론

· ────── ·

캐비쉬 묘목은 잡화점의 제일 아래쪽에 위치해 있었다.

그만큼 인기가 없다는 거겠지. 저번 주에는 11틸론이었는데, 가격도 계속 내리고 있고 말이야. 아드리안은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으며 오른쪽 손등을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고는 후우- 하고 짧게 바람을 불었다.

[310.5틸론]

푸르고 흐린 빛으로 현재 아드리안이 가지고 있는 틸론의 금액이 잠시간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루당 10틸론이니 삼십 그루는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드래곤은 테이블 위의 벽에 붙어 있는 천으로 된 달력을 살폈다. 오늘이 이 달의 말일이니 곧 오르디나스의 월급인 100틸론이 입금될 것이었다.

아드리안의 고민은 무척 짧았다. 깃펜 끝을 충분히 적시고는 작은 종이 하나를 꺼내, 묘목을 구매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빠르게 써 내려갔다.

***

미하일은 언제나처럼 일찍 일어났다. 푸르스름한 새벽의 찬 공기가 기숙사 유리창 틈으로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왕자는 가볍게 새벽 동안 굳은 몸을 움직이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반대편 벽에 놓여 있는 아드리안의 침대가 시야가 자연스레 들어왔다. 흰 베게 위에 그의 금발이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고, 밤새 뒤척였던 모양인지 이불이 이리저리 뒤틀려 있었다.

놈의 유일한 장점인 잘생긴 얼굴에 어슴푸레한 빛이 점차 들어오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잠결에 그 빛이 거슬렸던지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으음, 이라는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미하일은 휙, 고개를 돌려 기숙사 창가를 바라보았다. 아침에 일어나면서 그가 걷었던 커튼 탓에 빛이 드는 것이었다.

“……”

빛 때문에 불편한 건가?

왕자는 커튼과 아드리안의 얼굴을 번갈아 관찰하다가 잠들어 있는 아드리안의 얼굴 위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거슬리는 빛이 사라진 것을 잠결에도 곧바로 느낀 건지, 남자의 찌푸려졌던 미간이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미하일은 그 작은 변화를 관찰하다가, 곧 무척 가까이에서 들리는 아드리안의 조용한 숨소리에 흠칫, 몸을 떨었다.

‘내가 왜 이런 교양 없는 놈을 신경 써 주고 있지?’

미하일은 자신의 손을 공중에서 우뚝 세우고 잠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깊어져 가는 왕자의 고민과는 별개로 아드리안은 얼굴 위에 드리워진 손바닥 그림자에 만족하는지 옅게 미소까지 지었다. 미하일은 그 웃음에 저도 모르게 입가를 주욱 늘렸다.

‘……이상한 놈.’

그때였다.

왕자의 손바닥 아래에 가려져 있던 아드리안의 눈꺼풀이 천천히 열렸다. 왕자는 그 느릿한 움직임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아드리안의 눈빛과 마주치자 소스라치듯이 놀라며 손을 거둬 갔다.

“……뭐 해?”

아드리안은 일어나자마자 발견한 룸메이트의 이상한 행동에 질문했다. 방금까지 잠들었던 것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또렷한 음성이었다.

“……”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미하일을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아드리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솔직히 미하일은 스스로도 지금 자신이 뭘 한 건지 설명할 수 없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털어 대며 입술을 열었다.

“……벌레가 있길래.”

그래서……? 아드리안은 그 대답에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마주친 것처럼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내 쪽에 벌레가 있어서 잡아 줬다는 건가? 저놈이?

“그래? ……고맙다.”

아드리안은 자는 동안 헝클어진 머리칼을 손으로 빗어 넘기며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으나 벌레 같은 것은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미하일은 아드리안의 감사 인사를 받고는 몸을 휙 돌려 터벅터벅 방문으로 걸어갔다.

평소라면 더 으스대었을 텐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해 보였다.

미하일이 기숙사 방문 손잡이를 돌려 휙, 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툭.

뒤에 뭔가 있는지, 문은 열리지 않았다.

“……왜 이래?”

가볍게 숲 한 바퀴를 돌려고 했던 미하일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그러고는 문을 다시 닫았다가, 마치 밖에 있는 것을 힘으로 치워 버리려는 듯이 세게 열어젖혔다. 아드리안은 침대에 앉아 문에 대고 성질을 내고 있는 왕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턱!

그러나 이번에도 방문은 열리지 않았다.

뭐야 진짜. 미하일은 슬쩍 이를 악물고 속 안에서 올라오는 깊은 분노를 잠깐 억눌렀다. 후우- 하고 짧게 숨을 내뱉은 왕자는 고개를 들어 올려 망할 방문을 잠시 바라보았다. 열리지 않는 방문을 열 방법이 하나 있기는 했다. 왕자의 붉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아카데미 건물 관리가 허술하군.’

미하일이 방문을 부수려 발을 들어 올리는 참이었다. 등 뒤에서 “잠깐, 잠깐-” 아드리안이 다급하게 소리치며 방문을 향해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는 방문을 걷어차려고 하는 왕자의 어깨를 턱, 하고 두 손으로 붙잡아 말렸다.

미하일은 그 손을 힐끔 바라보곤 짜증스레 붙잡아 어깨에서 떨어트리며 말했다. 우악스런 손길에 아드리안이 윽, 하고 짧게 반응했다.

“몸에 멋대로 손대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해?”

아드리안은 억지로 붙들린 자신의 손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왕자와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그의 밀빛 눈동자는 왕자의 골이 난 표정을 잠시간 살피다가 가늘게 접혔다.

“거짓말이지?”

서로의 콧날이 스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미하일은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아드리안의 시선에 비껴 서지도 못한 채 멋없이 되물었다.

“뭐?”

“벌레가 있었다는 거.”

그걸 이 몸이 모를 리가 없거든. 아드리안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미하일의 입술이 뭔가 말하려 달싹였으나, 결국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드리안의 시선을 받았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꺼냈던 거짓말을 더 이어서 말하기도 구차했다. 낚아챈 아드리안의 손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천천히 뺐다.

아드리안은 그런 미하일을 잠시간 바라보더니 스윽 손을 빼내 문 앞에 서 있는 미하일을 살짝 밀었다.

“할 말 없으면 비켜 봐. 죄 없는 방문 부수려고 하지 말고.”

“……문이 갑자기 안 열리니까 그런 거야.”

미하일은 억울하다는 듯이 중얼거리며 룸메이트가 방문을 살펴볼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 섰다.

“그런다고 문을 부숴? 어? 진짜 안 열리네. 이상하다.”

아드리안은 방문 손잡이를 잡고 몇 번을 덜컥이더니, 고개를 내렸다. 문틈으로 배달되었을 오늘 자 교내 신문이 눈에 들어왔다.

“신문은 잘 왔는데…….”

아드리안이 흠, 하고 뭔가 생각하더니 “아.”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신문 말고 이 방에 배달될 물건이 하나 더 있었다.

아니, 하나라기보다는 서른 그루가 있다는 것이 더 알맞은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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