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파티가 마치 한여름 밤의 꿈처럼 휙 바사미엘을 휩쓸고 지나가고 그 뒤에는 곧바로 시험 기간이 찾아왔다. 평상시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삽시간에 달라진 것이 느껴졌다.
“생각보다 다들 열심인데?”
아드리안은 수업 전 웬일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가넷의 아이들을 확인하고는 놀랐다. 그러자 옆에 앉았던 유시가 웃으며 이야기했다.
“다들 공부를 안 하니까 조금이라도 하면 높은 학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거지.”
“……아무리 그래도.”
강의실 전체를 둘러보니 거의 모든 학생들이 양피지 위의 깃펜을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생각으로 공부를 하고 있다고? 아이들의 얍삽한 논리가 귀여웠다. 아드리안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모두 다 공부를 하면 그 의미가 없어지잖아.”
“하하, 그러게.”
그렇게 대답하는 유시의 앞에도 글씨가 빼곡히 들어간 양피지가 놓여 있었다. 아카데미의 술수인지 어쨌든 일 학년이라 시험공부를 안 할 거라던 학생들이 모두 공부를 하게 생겼다. 물론 아드리안은 본인의 실력대로 시험을 칠 생각이었다.
그리고…… 아드리안은 벽 쪽에 앉아 있는 미하일과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쳤다.
뭐? 왜 쳐다봐.
왕자의 심드렁한 표정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저놈이 공부하는 모습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답지에 그나마 타드폴리 정도는 쓸 수 있겠군.
“이번에 성적 잘 받으면 파티용 드레스를 몇 벌 맞춰 달라고 할 거야.”
유시는 눈을 반짝이며 중얼거렸다.
“요즘은 허리 장식이 유행인데, 그런 드레스는 아카데미에 안 들고 왔거든.”
“그래. 응원할게.”
아드리안은 대강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유시의 말에 주변에서 다들 한마디씩 말을 보탰다. 고급 마차나 말 심지어는 별장까지 나오는 스케일이 과연 있는 집 자식들의 대화 같았다.
후아아암-
늦게까지 공부한 모양인지 유시가 크게 하품을 했다. 강의실 안에 앉아 있는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던지 마치 전염되듯이 크고 작은 하품 소리가 났다.
“빨리 방학이었으면 좋겠다…… 집에 가고 싶어…….”
“기숙사도 좋긴 한데, 아무래도 집이 제일 편하긴 하지.”
“나도……. 틸론이 아니라 골드를 쓸 수 있고 말이야.”
아이들답게 주제를 이리저리 바꿔 가며 잘도 이야기하는군. 아드리안은 가끔씩 고개를 끄덕여 주면서 교수가 오기를 기다렸다.
“아드리안은 방학에 수도에 있을 거야? 가족들이랑?”
“……응?”
누군가 자신을 부르자 무표정으로 책을 넘기고 있던 아드리안이 자동 반사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케이지 리타나라고 자기를 소개하며, 쿠키를 대뜸 내밀었던 아이였다.
“아, 아니.”
“그래? 그러면?”
“방학에는-”
또 개인적인 질문인가? 드래곤이 이번에도 슬픈 척 연기하려는 순간이었다. 의자에 기대 이쪽의 대화에는 전혀 끼지 않았던 미하일의 목소리가 갑자기 그 틈을 불쑥 비집고 들어왔다.
“잠깐 빌려 간다?”
그러고는 휙 팔을 뻗어 아드리안의 깃펜을 집어 가는 것이었다. 드래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미하일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면서 중얼거렸다. 깃펜이야 여러 개 가지고 다녔기 때문에 빌려주는 것은 상관없었지만.
“……너도 공부하게?”
바사미엘은 대단한 아카데미였다. 왕자까지 공부하고 싶게 만들다니.
미하일은 아드리안의 질문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 바로 앉았다. 그러고는 자리에 앉아 한 팔에 턱을 대고는 빌려 간 깃펜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 휙휙 돌렸다. 필요한 것도 아니면서 왜 가져간 건지 이해 가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놈은 이상했다.
“방학에는 뭐?”
아드리안은 잠시간 다른 생각을 하다가 케이지의 말에 번뜩 정신을 차리곤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 방학…… 오르디나스 클럽원은 방학에도 아카데미에 있어야 해. 온실을 관리할 사람이 필요해서 내가 한다고 했거든.”
그 조건이 마음에 들어서 오르디나스 사교 클럽에 들어간 것이기도 했다.
“뭐? 진짜 너무하다! 신입생이라고 억지로 시킨 거 아니야?”
“아니야.”
아드리안은 졸지에 얼굴도 모르는 신입생에게 욕을 먹고 있는 카일을 빠르게 구해 주었다. 하하- 그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밝은 웃음소리를 만들어 냈다.
“내가 좋아서 하는 거야. 온실 관리하는 일이 힘들기는 하지만 내가 길러 낸 약초들을 바라보면 뿌듯하거든.”
“그래……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면 다행이고…….”
아드리안의 대답에도 케이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냥 이렇게 착한 애를 이용해 먹는 것 같은데.’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때였다.
구둣발 소리가 들리고 드륵, 하고 교단 옆의 문이 열렸다. 마법학 수업의 교수인 시그리드 오웬이었다. 그의 손에는 두꺼운 양피지 뭉치가 들려 있었다.
“안녕하세요. 조용, 공지한 대로 시험이니 조용히 하세요.”
강의실에 앉아 있던 아이 몇 명이 ‘시험’이라는 단어에 긴장했던지 흡,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시그리드는 그런 광경이 이제는 익숙했다. 그는 슬쩍 웃고는 교단에 서서 툭툭 하고 양피지를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어차피 일 학년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없습니다.”
평소의 차가운 말투였지만, 나름의 위로처럼 들렸다. 쉬운 문제라는 뜻이었다. 물론 이 학년부터는 어림도 없는 소리였지만.
시그리드는 강의실 전체를 한번 둘러보더니 오른팔을 앞으로 뻗어 손가락 몇 개를 움직였다. 그러자 그 움직임에 맞추어 강의실 책상에 놓여 있는 아이들의 종이들과 책들이 둥실, 하고 공중에 떠올랐다.
그는 손가락을 휙 들어 올려 그 모든 것들을 단번에 완전히 날렸다. 종이와 책이 천장에 척 달라붙은 모양새가 되자, 아이들의 책상에는 필기도구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툭, 투둑툭.
책상에서 진동을 느끼고는 아드리안이 힐끔 옆을 바라보았다. 유시가 불안한 표정으로 손가락으로 책상을 반복적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새 드레스가 정말로 갖고 싶은 모양이지? 아드리안은 슬쩍 웃으며 책상에 턱을 괴고 앉았다.
시그리드의 박수 몇 번에 모두의 앞에 고급 양피지 한 장이 살랑거리며 놓였다. 그 위에는 멋들어진 서체로 몇 가지 질문이 적혀 있었고 시험은 그 바로 아래에 질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적는 방식이었다.
교수는 교단에 선 채 소매를 조금 올려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부터 한 시간 드리겠습니다.”
서걱서걱거리는 깃펜 움직이는 소리가 열정적으로 강의실을 채웠다. 아드리안은 한 손에 턱을 괸 채 받은 문제를 쭉 훑었다. ‘마나의 흐름에 대한 원리를 아는 대로 기술하시오.’라든가 ‘생활 속 마도구 중 가장 자신 있는 마도구의 작동 방식에 대해 서술하시오.’와 같은 문제들이 적혀 있었다.
드래곤이 보기에도 일 학년생들에게 내기에 적당한 문제들이었다. 아드리안은 교단에 서서 아이들이 열심히 글을 적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시그리드를 힐끔 바라봤다. 첫 수업을 듣고 당연히 시험에는 실습 과제를 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하긴, 실습이면 마나를 다룰 줄 모르는 학생들은 아예 시도조차 못 하겠군.’
아드리안은 손안의 깃펜을 휙, 하고 한 바퀴 돌렸다. 좋은 성적을 받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으나, 어쨌든 뭐라도 적기는 적어야 했다. 후아암- 아드리안은 작게 하품을 하며 잉크병을 열어 깃펜을 적셨다.
교수는 가끔씩 손목시계를 보면서 열심히 양피지에 글을 적고 있는 아이들에게 얼마나 남았는지 알려 주었다. 그는 가끔씩 인상을 쓰며 답안지 뒤쪽의 이름을 확인하며 고개를 젓고는 했다. 다른 시험 답안을 채점하는 듯했다.
한 시간이 끝나자, 교수는 “그만.”이라고 말하며 처음 강의실에 들어와 했던 것처럼 아이들의 답안지를 손짓 한 번에 모두 가져갔다. 아이들은 아쉬운 한탄을 하며 날아가는 자신의 답안지를 바라보았다.
시그리드가 강의실을 나가자, 아이들은 첫 시험이 끝난 소감을 열심히 떠들어 댔다.
“어땠어?”
“몰라, 다 적기는 적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마도구는 그냥 쉬운 전송 우편 같은 걸로 할 것 그랬어.”
“난 그걸로 적었는데! 어쨌든 하나는 끝났으니 놀자.”
유시는 무척 후련한 표정으로 기지개를 켰다. 앞으로 다섯 번의 시험만 끝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마음에 기분이 좋아진 것이었다. 끼익- 아드리안은 앉았던 의자를 제자리에 밀어 넣으며 일어났다.
그때였다.
아드리안의 손등이 밝게 빛나며 틸론의 문양을 공중에 띄웠다.
드래곤은 손등을 눈앞에 가져가 금액을 확인했다.
[310.5틸론]
“오. 드디어 <바사미엘 잡화점> 경매에 올린 단추가 팔렸네.”
뒤에 0.5라는 소수점 단위를 봐서는 치열한 경매였던 듯했다. 아드리안은 만족스러운 금액에 씨익- 크게 미소 지었다. 이걸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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