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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73화 (73/184)

73화

입학식 날에 사용되었던 연회장을 빌려서 진행되는 파티였다.

연회장 바로 앞의 본관 정원부터 마법을 이용해서 길을 내어 눈이 부셨다. 펑- 퍼엉 가끔씩 공중으로 작은 규모의 폭죽이 튀었다. 그 주위에서 한 손에 음료가 든 잔을 들고 떠들고 있던 학생들은 그때마다 하하하, 하고 웃으며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미하일의 옆에서 걸어가는 드래곤은 그런 광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제법 규모가 크네?”

외부 정원은 초대장을 받지 않은 학생들도 놀러 올 수 있는 공간이었다.

연회장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일 뿐인데도 불구하고 신경을 많이 쓴 눈치였다. 본격적으로 파티가 진행되는 연회장 내부에는 얼마나 돈을 썼을지 눈에 선했다. 드래곤은 속으로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돈 낭비야, 돈 낭비.

바사미엘 학생들의 지나치게 높은 소비 수준을 알고는 있었으나, 고작 하루 열리고 마는 파티가 이 정도로 성대할 줄은 몰랐다. 어- 마실 것들은 저기에 준비되어 있군. 드래곤이 시원한 샴페인을 상상하며 입맛을 다실 때였다.

교복이 아닌 격식 차린 정장을 입고선 지금껏 조용히 옆을 걷던 미하일의 입술이 열렸다.

“이 정도에 놀라는 수준하고는. 이런 파티는 처음이야?”

“응.”

아드리안은 왕자의 빈정거림에 단번에 대답했다. 그 대답에 미하일은 멈칫 몸을 굳히고 옆의 아드리안의 표정을 잠시간 살폈다. 그의 눈높이가 거의 비슷한 금발 머리 룸메이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입술을 열어 말을 이어 갔다.

“지금껏 가 본 곳 중에서 제일 돈이 많이 들었을 것 같은 파티인데.”

드래곤은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진짜 아드리안이 할 만한 이야기였다. 평민인 인간은 유명한 상단의 친척 가문이기는 했으나 이렇게 귀족과 왕족들이 참여하는 파티에 초대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같은 바사미엘 아카데미의 학생이어도 아드리안에게는 파티 초대장이 오지 않은 것이 그 증거였다.

일반적으로 아무리 돈이 많다 해도 작위 없는 평민이라면 왕성의 파티에 초대받는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여길 정도였다. 그렇다 보니 연회장이 아닌 정원에 있는 학생 대부분이 초대장을 받지 못한 평민이었다.

서버 하나가 천천히 정원을 가로지르고 있는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는 은색 트레이에 다양한 종류의 마실 거리를 올려놓고 “필요하십니까?”라고 정중하게 물었다.

아드리안이 그 잔들 중 제일 시원해 보이는 푸른색 음료수를 집어 드는 순간이었다.

“……이건 왕성에서 열리는 파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바로 옆에서 퉁명스러운 말이 귓가에 꽂혔다. 아드리안은 심플하지만 섬세한 장식이 돋보이는 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면서 힐끔 옆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미하일과 눈이 마주쳤다. 아드리안은 천천히 잔을 기울여 음료를 마시면서 생각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아드리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려, 미하일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들으려 했으나, 미하일의 입술은 조개처럼 꾹 닫혔다. 왕자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드래곤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곤 들고 있는 음료에 집중했다.

윽, 이게 무슨 맛이야.

푸른색이라 시원한 맛일 줄 알았던 것은 탄산수에 설탕만 한가득 부어 만든 건지 달기만 한 시럽 같은 맛이었다. 최악이었다.

아드리안은 여전히 입안에 맴도는 단맛에 충격받은 채 들고 있는 잔을 관찰했다. 이게 뭔지는 몰라도 다음부터는 절대 먹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때였다.

“오셨네요!”

파티 주최자인 카메론이 밝게 웃으며 미하일을 향해 빠르게 걸어왔다. 그는 미하일의 손에 아직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은 걸 확인하고는 손가락을 튕겨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서버 하나를 불렀다.

“오늘 차림이 아주 어울리십니다. 혹시 어디서 맞추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카메론은 번지르르한 얼굴로 살짝 웃으며 왕자에게 친한 척을 했다. 미하일은 그런 카메론이 자신을 챙기는 모습을 붉은 눈동자로 빤히 응시했다. 기분이 별로였다. 아마 눈앞의 이 건방진 귀족을 봐서 그런 것 같았다.

서버 한 명이 왕자에게 다가와 쟁반 접시를 정중히 내밀었다. 그러나 왕자는 고개를 가볍게 저어 음료를 받지 않았다.

“어차피 넌 주문을 넣지도 못해. 왕성 전속 재단사야.”

인사치레였던 질문에 왕자가 차갑게 대답했다.

“아…… 그런가요. 아쉽네요.”

왜 이러시지?

왕자의 심통 난 대답을 들은 카메론이 바로 옆에 서 있던 아드리안을 슬쩍 바라봤다. 혹시 미하일이 왜 저러는지 알고 있냐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미하일의 상태 같은 것은 아드리안도 모르는 부분이었으므로 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이럴 게 아니라, 빨리 들어가시죠. 모두들 전하가 오시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카메론은 애써 웃으며 연회장 건물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미하일의 바로 옆에 서 있는 아드리안에게는 빨리 왕자를 저기로 데리고 가라는 듯이 가볍게 고갯짓만 했다. 좀처럼 평민과 말을 섞으려 들지 않는 귀족가에서 어릴 적부터 몸에 붙은 그의 습관이었다.

드래곤은 그것을 눈치챘지만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지금은 평민 인간의 몸으로 유희를 보내고 있었고, 그래서 귀족들이 이쪽을 평민으로 대한다고 화내는 것은 이상한 짓이었다. 아드리안이 발을 옮기는 순간이었다.

“아니.”

왕자의 흰 손이 아드리안이 들고 있던 유리잔을 왕자가 휙- 가져갔다. 응? 드래곤은 잔을 뺏긴 채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하는 미하일을 빤히 바라보았다.

왕자는 샐쭉한 표정으로 아드리안이 마시던 음료를 입가에 가져다 댔다. 카메론이 권한 새 음료를 마시는 것보다 동행인이 마시고 있던 음료를 마시겠다는 거였다.

“누가 감히 나를 ‘기대하고’ 있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린 여기서 좀 더 놀다가 들어갈 거야.”

왕자의 귀족식 화법의 진심을 직역해 보자면 ‘네 파티가 진짜 진짜 진짜 재미없을 것 같으니, 차라리 평민들이랑 파티 입구에서 노는 게 더 재밌겠다.’라고 할 수 있었다. 그의 말에 담긴 모욕을 단번에 깨달은 카메론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루스타바란 건국 신화를 어릴 적부터 들어 온 왕국민들이라면 모를 수 없는 왕족의 붉은 눈동자가 일렁였다.

아드리안은 맛없는 음료를 대신 해치워 줬다는 것이 마음에 들어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저거 진짜 맛없는데. 표정 하나 안 바뀌네. 드래곤은 왕자의 무표정에 감탄했다.

그때였다.

- 다른 사람이 마시던 음료를 마시다니.

- 두 사람이 벌써 저렇게 친해졌나 보군요. 아니 저건 친해진 것을 넘어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학생들이 잔이나 부채로 입을 가린 채 저들끼리 속삭였다. 골드 드래곤은 시선을 고정한 채 그들이 떠들어 대는 이야기를 들었다.

- 신기하게도 금발 머리의 남자네요.

- 그러게요, 신기하게도…….

그들은 미하일의 바로 옆에 서 있는 아드리안이 이 모든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열심히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했다. 아카데미 정원 가운데에서 작은 연주단이 클래식 선율을 자아내고 있다는 것에 안심한 것일지도 모른다.

- 대마법사의 머리색도 저런 밝은 금발이었잖아요.

- 정말로 미하일 전하가 그분의 현신일까? 이러다 정말로 왕국에 소드 마스터가 또 나오겠군.

- 그렇게만 된다면 정말로 루스타바란 왕국이 대륙 제일이 되겠죠.

그런가?

아드리안의 입술이 날카롭게 호를 그렸다. 이번에도 겨우 그런-

카를로와 똑같이 생겨서는 이 몸을 이용하는 방식도 소름 끼치게 비슷했다. 친구라고 말하더니 왕자 또한 꿍꿍이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드리안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기울였다.

카메론은 미하일의 차가운 얼굴을 잠시간 마주하더니, 엉망이 된 표정을 갈무리한 채 “……죄송합니다.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언제든 원하실 때 들어오시죠.”라고 말하며 홱 몸을 돌렸다.

미하일은 그런 그의 등을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팍 인상을 찡그렸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유리잔을 다시 아드리안에게 턱, 하고 큰 소리가 날 정도로 다시 돌려주었다. 그러고는 재킷 주머니에 있는 손수건을 꺼내 입을 고상하게 닦아 냈다.

그래도 입안에 남아 있는 지독한 단맛에 아름다운 얼굴을 와그작 구겼다.

“……이딴 걸 마시고 있었어? 취향 한번 고약하군.”

그는 손짓으로 서버를 불러, 시원한 물 한 잔을 주문했다. 미하일은 그러고는 정원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의자에 편안하게 털썩 앉았다. 고급 정장이 구겨지는 것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행동이었다.

드래곤은 자신의 고상한 취향을 비하하는 말에 짜증을 냈다.

“나도 맛없어서 버리려고 했었던 거라고.”

“거짓말하지 마. 아끼면서 마시고 있던데 뭘.”

웩, 미하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파티에는 진짜 안 들어가?”

아드리안이 의자에 앉아 투덜거리는 왕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네가 원했던 것은 이게 아닐 텐데? 그의 따스한 갈색 눈동자가 미하일의 숨겨진 저의를 파헤치려는 듯이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그러나 미하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퉁명스레 대답하며 목을 죄는 넥타이를 주욱 잡아 뺐다.

“이렇게 되었으니 잘됐지. 어차피 처음부터 가고 싶지도 않았어.”

그는 아드리안의 말에 심드렁하게 대답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의자 앞에 선 아드리안을 힐끔 바라보았다. 평소 입지 않는 값비싼 정장을 입고 묘한 표정을 지으며 뭔가 원하는 답이 있다는 듯이 왕자의 표정을 관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 파티는 아카데미에서 자주 열린댔어.”

그러고 보니 이런 파티는 처음이라고 했던가?

“실망했어?”

“……아니. 별로.”

벌써 날이 어둑해 밝은 달과 별이 검은 하늘을 반짝이며 빛내고 있었다. 아드리안도 연회장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이렇게 조용한 정원에 앉아 있는 것이 훨씬 좋았으므로 불평 한마디 없이 왕자 옆에 앉았다.

연회장에서는 적당한 댄스곡이 아름답게 연주되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달을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넌 사교댄스에도 소질이 없겠다.”

피아노 실력을 떠올려 봤을 때, 박자가 생명인 춤까지는 왕자에게 무리였다.

미하일은 “……갑자기 무슨 말이야?”라고 불만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나 딱히 반박할 말은 없었던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자와 아드리안은 그 후 한 시간 동안 정원에 앉아 있다가 기숙사로 다시 돌아갔다. 파티에 ‘참석’했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였다.

왕성의 알릭스 데 이네하트는 후에 그 소식을 전달받고는 미하일이 그랬던 것처럼 고급 편지지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의 손에는 어떤 가게의 영수증이 들려 있었는데 참으로 수지에 안 맞는 장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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