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뭐, 괜찮군. 물론 상등품은 아니지만 말이야.”
왕자는 붉은 눈동자를 가늘게 좁혀 입술을 삐죽거렸다. 임시방편으로 당장은 이거라도 별수 없었다.
도헤니어의 용암에 녹았을 검을 다시 찾을 수 없으니 왕자는 어쩔 수 없이 검을 사야 했다. 훈련장의 목검을 사용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미하일은 휙, 휙 손잡이가 편안한지 확인하려 검을 몇 번 가볍게 공중에 휘둘렀다. 예리한 검날이 바람을 가르며 날카로운 소리를 만들어 냈다.
돈깨나 있어 보이는 차림에 수행인이 있는 손님은 드물었던지라, 커다란 손을 겹쳐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대장장이가 그런 왕자를 힐끔 눈으로 확인했다.
“저…….”
자세를 봐서는 그저 장난삼아 검을 휘두르는 허세꾼은 아니었다. 대장장이는 비록 본인이 검사는 아닐지라도 뛰어난 검사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은 가지고 있었다.
“그, 가격만 괜찮으시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검이 하나 있습니다.”
“뭐? 이쪽이 검 한 자루 지불할 능력이 없어 보이나?”
미하일은 자존심 상했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귀족의 화법에 익숙하지 않은 대장장이가 당황한 듯이 식은땀을 흘렸다.
“당장 가져오지 않고 뭐 해?”
“네, 네. 잠깐만 기다려 주십쇼.”
대장장이는 왕자의 표정에 쏜살같이 대장간 뒤쪽으로 달려갔다. 미하일은 방금까지 휘둘렀던 검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아드리안은 뒤쪽에 서서 대장간의 기둥에 기대 그런 꼴을 보고 있어야 했다.
“뭘 그렇게 까탈스레 굴어. 좋은 기사는 검 탓을 하지 않는 법이라잖아.”
건방진 말투에 왕자의 뒤에 서 있던 마부의 날카로운 눈빛이 아드리안을 쏘아붙이듯이 찔러 왔다. 하암- 골드 드래곤은 그런 눈빛에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가볍게 하품을 했다. 뭐, 어쩌라고. 아드리안은 오히려 더 건방진 눈빛을 마부에게 보냈다. 어차피 저쪽도 정체를 숨기고 있으니 거리낄 것이 없었다.
왕자는 옷을 맞춘 후, 마차를 타고 돌아가던 중 돌연 벽을 두드려 마차를 길가에 세웠다. 그러고는 갑자기 마차 문을 열고는 이 대장간으로 아드리안과 마부를 끌고 도착한 것이었다.
대장장이는 그가 말했던 검을 낚아채어 헐레벌떡 다시 왕자가 기다리고 있는 테이블로 가져왔다. 그러고는 둘둘 말려 있는 푸른 천을 풀어내며 주절거렸다.
“여기 있습니다. 이게 저희 아버지께서 만드셨던-”
“흠, 잠깐 살펴봐도?”
남자는 눈앞의 귀족 소년의 의문형으로 끝나는 명령에 “예.”라고 대답하며 검집 채로 검을 건넸다.
오오, 미하일은 이 작은 도시에서 괜찮은 검을 구했다는 기쁨에 눈을 크게 뜨고는 검집을 스윽- 손바닥으로 쓸었다. 스릉- 검집 안에서 검을 꺼내자, 오래된 검임에도 불구하고 자주 손질을 했던지 보관 상태가 아주 좋은 검날이 보였다.
“좋아. 이걸로 한다.”
왕자는 마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마부는 고개를 숙이며 가지고 있던 지갑을 꺼내 미하일 바로 옆에 섰다. 그러고는 대장장이에게 검의 가격을 물었다. 대장장이는 무척 합리적인 가격을 제시했는데, 왕자는 옆에서 그 가격을 듣고는 검집을 허리에 차며 “저것의 두 배를 줘.”라고 말했다.
아드리안은 그런 왕자의 파격적인 경제관념에 피식, 웃었다. 저런 생활을 하다 바사미엘에서 틸론이 없어 허덕여야 하다니. 루스타바란 왕가는 자식에게 경제관념 하나는 참 잘 가르치는 듯했다.
“이제서야 그 일등 상품은 못 탈 거란 현실을 자각했나 보지?”
펠렌 디프스의 검 이야기였다.
미하일은 아드리안의 말에 휘두르던 검을 스릉, 하고 검집에 집어넣었다.
“…….”
미하일은 못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홱 돌렸다.
왕자의 성격상 저 무시의 뜻은 펠렌 디프스의 검은 거의 포기했다는 뜻이었다.
그래, 지금 손에 겨우 20틸론밖에 없는 주제에 1만 틸론짜리 상품을 자신 있게 살 거라고 말하긴 힘들지. 드래곤은 지금이라도 포기하길 잘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하일은 생각보다 좋은 검을 찾았다며 대장장이에게 일반적인 가격보다 훨씬 더 많은 골드를 건넸다. 왕자는 받을 수 없다며 한사코 사절하는 대장장이를 무시하고는 “가자.”라고 말하고 휙, 몸을 돌려 마차로 먼저 향했다. 테이블 앞에 서 있던 마부는 정중히 골드 주머니를 탁, 하고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뒤를 따랐다.
아드리안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러고 보니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이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분명히 그 꿈에서 본 미하일은 저것과 다른 검을 들고 있었다.
손잡이에 날렵한 날개 문양이 새겨진 장검. 지금 아카데미의 신장에서 훌쩍 큰 기사가 들기에도 커다란 검이었다. 그리고 그 검은 지금 바사미엘 본관의 상품 전시장 가장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말이다.
그러나 아드리안이 생각하기에 왕자가 1만 틸론을 벌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장식장을 깨서 훔친다면 몰라도, 왕자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펠렌 디프스의 검을 갖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예지몽이라 생각했는데…… 그냥 꿈이었던 건가. 아드리안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학생들로 아카데미 본관과 정원이 복작거렸다. 학생들은 저마다 웃으며 밖의 도시에서 사 온 물건을 자랑하거나 선물했다. 어둑한 저녁의 정원을 가로등이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학생들의 손에 들린 것은 하나같이 평민들은 쉽게 볼 수도 없는 고가의 물건들이었는데, 워낙 있는 집안의 자제들이라 그런지 선물을 받아도 가격을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웃으며 감사 인사를 건네는 정도였다.
요즘 학생들 사이에서는 카메론 해리스가 여는 파티 이야기가 가장 인기 있었다. 그 파티에 어떤 옷을 입고 갈지, 누구와 동행할지와 같은 가십거리가 넘쳐 나는 시기였다.
- 그런데…… 그게 진짜래?
물론 시험 기간 전이라 더 반응이 뜨거운 감이 있었으나, 가장 놀라운 소식은 그 ‘미하일 루스 이네하트’ 왕자가 그의 룸메이트와 파티에 동행하겠다고 초대장에 답했다는 것이었다. 카메론 해리스조차 놀라워할 소식이었다.
- 두 사람이 오늘은 같이 외출도 나가던데. 내가 봤어.
- 뭐? 왜 나갔대?
- 그건 나도 모르지. 그런데…… 왕가에서 보낸 마차를 같이 타고 나가더라고.
아드리안은 어쩔 수 없이 들리는 아이들의 귓속말을 들으며 무표정하게 교정을 걸었다.
“…….”
뭐가 그렇게 궁금할까. 그냥 옷 사러 나간 건데.
청력이 지나치게 좋아도 문제였다. 아드리안은 간지러운 귀를 손가락으로 대충 긁었다. 그러면서 옆에서 묵묵히 걷고 있는 미하일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는 허리에 찬 검집에 손을 올린 채 기분 좋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검을 보자 아드리안은 장식장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펠렌 디프스의 검이 떠올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
그게 그냥 꿈이 아니란 것을 깨달은 것은 미하일이 자는 틈을 타 침대 밑의 돌멩이를 꺼내려 할 때였다.
뭐야, 이상한데?
윽, 아드리안은 표정을 찡그리며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꿰뚫어 보는 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꺼내려고 힘줘서 들어 올리던 돌 하나를 포기한 후, 다른 하나를 꺼내려고 팔을 뻗었다.
내 것뿐만 아니라, 가벼웠던 미하일의 것까지 이렇게?
돌멩이 두 개 다 들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져 있었다. 사실 무거워졌다기보다는 바닥에 들러붙었다는 말이 더 나을 정도였다.
“와…… 진짜…… 뭐야!”
에이씨- 아드리안은 자신의 침대 밑에 자리 잡고 있는 꿰뚫어 보는 눈을 바라보면서 쾅! 하고 침대를 내리쳤다.
드래곤은 순간 놀라 미하일이 자고 있는 침대를 바라보았다. 그 전에 침묵 마법을 걸어 둔 것을 깜빡한 탓이었다. 왕자는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들어 있었다. 감겨 있는 미하일의 은색 속눈썹과 흰 이마가 여기까지 보였다.
“그래, 고맙게도 누군가가 힌트를 준 거였군.”
드래곤은 꿈속에서 만났던 기사 미하일을 떠올렸다.
미하일은 인간들로 이뤄진 군대를 이끌고 있었다. 최전선에 서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마물들과 싸웠겠지. 그것이 미하일의 미래가 되어야 했다. 그러려면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어도 펠렌 디프스의 검이 필요했다.
“알겠지? 미하일…… 넌 언젠가 전쟁에 나가야 해. 그것도 저 펠렌 디프스의 검을 가지고. 올해 안에 그 검을 손에 넣지 못하면 둘 다 퇴학이라니. 최악인데.”
아드리안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침대에 몸을 힘없이 늘어트렸다. 저 사업 수완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왕자에게 1만 틸론을 어떻게 벌게 해 줘야 할지 앞길이 막막했다.
그런데 하필 왜 내 돌까지 영향을 받는 거지? 룸메이트라서?
골드 드래곤은 다시 한번 꿰뚫어 보는 눈 두 개를 들어 보려 힘썼으나, 인간의 신체로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스윽, 아드리안은 따뜻한 갈색빛의 눈동자를 들어 여전히 천사 같은 얼굴로 잠들어 있는 미하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왕자 놈이 부러웠다. 오늘따라 더 간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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