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마차가 숲의 입구에 나 있는 바사미엘 아카데미 교문을 통과하자, 곧바로 매끄러운 돌바닥이 나왔다. 그곳을 경계로 도시였는데, 드래곤은 인간 도시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터라 거기서부터는 창밖을 보던 자세를 정자세로 바꿨다. 그러자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미하일의 붉은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헤데라 상단 운영 지부는 수도로 알고 있는데…… 네 가족은 지금 어느 도시에서 살고 있지?”
경쾌한 말발굽 소리가 그들 사이의 적막을 메웠다. 왕자는 그 적막에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아드리안은 바사미엘에 들어오기 위해 작성했던 가족 관계표를 떠올리며 빠르게 대답해 주었다. 흠, 이런 걸 말할 때 인간들의 표정은 어땠더라?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어.”
드래곤은 자신의 관자놀이를 검지로 살짝 긁으며 작게 미소 지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미하일이 그 대답에 멈칫, 몸을 굳혔다. 아마 왕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이야기였을 것이다. 아드리안은 그런 미하일을 바라보며 그 뒤를 이어 말했다.
“친척들은 수도에 계신 게 맞는데, 나는 상단 운영은 적성이 아니라 혼자 이시스에서 살고 있지.”
드래곤이 유희에 나설 때면 항상 제일 먼저 정하는 것이 있었다.
반드시 가족이 아무도 없을 것.
그리고 인간관계는 얄팍하면 얄팍할수록 최고였다. 다른 인간들과의 연결점을 먼저 끊어 두는 편이 편하기 때문이었다.
첫 유희 때에는 이런 것을 명확히 세우고 나가지 않아서, 뭔가 하려고 하면 ‘그때 네 가족들이 여기서 산다고 했잖아.’라든가 ‘여기에 와 본 적 있다고 하지 않았어?’라는 인간들의 의심스런 눈초리를 받고는 했다.
그때의 실패가 뼈아파서인지 그 이후로는 꼭 가문에 그 누구도 남아 있지 않은 설정을 고수했으나…… 바사미엘 아카데미에 입학하려면 가문은 꼭 필요했다. 다행히 헤데라 상단의 먼 친척의 자제인데다가 고아, 그리고 타이밍 좋게 죽은 인간을 발견한 드래곤이 그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뭐?”
미하일의 붉은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하하, 아드리안이 멋쩍은 듯이 웃으며 금발 머리칼을 살짝 귀 뒤로 넘겼다.
왕성에서 귀하게 자라난 왕자는 당연히 이런 대답은 생각도 못 했겠지. 세상에는 생각보다 더 다양하고 불행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로 넘쳐 난다. 미하일은 더 배워야 했다.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해졌네.”
아드리안은 속으로는 한껏 왕자를 비웃으며, 겉으로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질문은 왜?”
“…….”
단순히 시간 때우기용으로 꺼냈던 이야깃거리에 상대방이 이런 이야기를 다짜고짜 해 올 줄 몰랐던 왕자는 당황해서 잠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드리안은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가족이 없는 것이 유희의 필수 조건인 이유는 한 번만 소개하면 다음부터는 상대방이 그 주제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서였다.
그 이후로 미하일은 무언가 고민하는 것이 있다는 듯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드리안은 그 침묵을 모른척하며 열심히 관심도 없는 도시를 구경했다.
그때였다.
마부가 짧게 호령하며 고삐를 잡아 말을 세웠다. 왕가에서 훈련을 잘 받은 말이었던지 마차는 멈추는 것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매끄럽게 어느 상점의 앞에 멈췄다.
창밖으로 테일러의 이름을 내걸어 만든 멋들어진 가게의 간판이 보였다. 제법 고급 정장을 맞추는 장인인 듯했다.
똑똑똑.
마부석에서 승객에게 도착을 알리는 신호를 보내자, 미하일은 읽던 책의 페이지 모서리를 접어 툭 하고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아드리안에게 눈짓했다. 먼저 내리라는 뜻이었다. 아드리안은 빠르게 마차에서 내려 오랜 시간 마차에 타고 있었던 찌뿌둥한 몸을 이곳저곳 돌려 풀었다.
탁, 미하일이 마차에서 내리자 마부는 문을 닫으며 왕자에게 말했다.
“동행해도 괜찮겠습니까?”
“어차피 내 허락과는 관계없잖아.”
왕자는 마차에 앉느라 살짝 구겨진 옷을 정리하며 마부에게 눈을 흘겼다. 그러나 마부는 웃는 낯을 지우지 않고선 상체를 깊이 숙이며 “설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 말씀 마십시오.”라고 말했다. 미하일은 우스운 농담을 들었다는 듯이 홱 고개를 돌려 그런 마부를 버려두고 아드리안에게 걸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좋은 날씨입니다.”
두 청년에게 세련된 정장을 입은 남자가 인사를 건넸다. 세련된 정장을 입고, 작업용 토시를 착용하고 있는 것을 보아 그가 오늘 아드리안의 옷을 만들어 줄 테일러인 듯했다.
가게의 앞에는 이미 점원 몇이 나와 공손히 두 팔을 모아 미하일과 아드리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 방금 인사를 건넸던 중년 남성에게 미하일이 말했다.
“어제 대강 요청은 넣어 뒀으니 준비는 다 되었겠지?”
“당연합니다. 편하게 앉아서 이야기하실까요?”
그는 눈가의 주름이 살짝 보이도록 웃으며 두 팔을 뻗어 가게로 안내했다. 가게의 문을 열자 맑은 도어벨 소리가 찰랑- 하고 울렸다.
건물의 전체를 사용하는 커다란 맞춤복 전문 상점이었다. 일 층은 접객용 테이블과 마네킹을 세워 다양한 스타일의 정장을 둘러볼 수 있었고, 이 층과 삼 층은 작업실로 사용하는 듯했다. 한쪽 벽에서 돌아가고 있는 전축에서 멋들어진 클래식 음악이 들려왔다.
미하일은 많이 와 본 듯 당당하게 접객실의 테이블에 걸어가 가장 상석에 턱, 하고 편하게 앉았다. 이미 그가 그곳에 앉을 것을 예상했던지 왕자의 자리에는 천 견본집 몇 권과 단추들 그리고 커프스와 같은 정장 제작에 필요한 부속품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워낙 종류가 많아 가지런하게 놓았는데도 테이블 위가 꽉 차 있었다.
아드리안이 미하일 옆에 앉자, 바로 옆에 있던 어떤 남자가 식기 부딪히는 소리 하나 없이 매끄럽게 뜨거운 차를 능숙하게 따라 두 사람의 앞에 놔두었다.
진한 차향이 올라오는 찻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는 아드리안을 향해 중후한 테일러가 멋들어진 손짓으로 견본을 몇 개 떠밀었다. 드래곤은 소파 뒤에 우뚝 서 있는 마부를 의식하고는 ‘과보호야. 과보호.’라고 생각하며 후룩- 하고 뜨거운 차를 넘겼다.
“손님과 어울릴 만한 천을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소매를 잠시 올려 주시겠습니까? 색을 올려 가며 직접 확인하시는 게 어떨지요.”
천을 시작으로 아드리안은 옷 한 벌을 맞춤으로 제작하기 위해서 골라야 하는 부자재를 모두 골랐다. 중년 남성이 꺼내 오는 재료가 워낙 훌륭하고 질이 좋아 아드리안은 편하게 소파에 앉아 이걸로, 아니 이건 나와 어울리지 않아- 와 같은 답변을 명쾌하게 주었다.
테일러는 취향이 확고한 손님이 마음에 든 모양인지 평소라면 잘 열지 않는 서랍에 있는 단추나 넥타이를 꺼내 왔다. 그러고는 몇 번씩 고개를 만족스럽게 끄덕거리며 마치 완성된 옷이 눈에 보인다는 듯이 웃었다.
몇십 년 동안 이 자리에서 테일러 샵을 운영해 왔지만 지금 이 손님들만큼 완벽한 사람은 없었다. 물론 자리에 앉아 이쪽을 바라보며 차만 마시고 있는 왕자님의 옷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지만, 테일러는 지금 저 금발 머리 청년의 옷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성취가 있을 듯했다.
그는 손님들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는 조수들에게 손짓하여 금발 머리 손님의 치수를 손톱만큼도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재도록 시켰다.
“얼마나 걸리지?”
상점에 들어와서 아드리안과 테일러가 수많은 결정을 내리는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미하일이 달칵, 찻잔을 놓으며 말했다. 조수들이 정확한 치수를 받아 적고 있는지 확인하던 테일러가 왕자의 질문에 고개를 들고 빠르게 테이블로 걸어왔다.
“치수만 재고 가시면 내일 오전까지 작업해서 바사미엘로 보낼 수 있습니다.”
그는 마치 조금이라도 더 늦어지면 왕자가 구매를 망설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능숙하게 대답했다. 미하일은 원하는 대답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더 빨리 치수나 재라는 뜻이었다. 테일러는 지금까지 쟀던 것을 하나하나 확인한 후, 한 손에 줄자를 휙휙 감으며 말했다.
“네, 왕자님 그리고 헤더 님 의상을 위한 치수를 모두 쟀습니다. 시착을 해 보시고 혹시 문제가 있으면 다시 수정 작업을 해야 하니, 내일 아침에 사람을 보내도록 하죠.”
아드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움직이느라 조금 흐트러진 머리칼을 대강 손바닥으로 정리했다. 하루 만에 옷이 완성된다니, 마법을 사용하거나 드래곤이 자는 동안 인간들의 봉제술이 엄청나게 발달했거나 둘 중 하나였다.
“넌 필요 없어?”
아드리안의 말에 미하일이 입술을 당겨 “당연하지.”라고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왕자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소파 뒤에 서 있던 마부가 척척 앞으로 걸어 나와 팔에 걸치고 있던 겉옷을 내밀었다. 미하일은 자연스럽게 그의 시중을 받아 옷을 걸쳤다. 아카데미에서는 스스로 하느라 잠시 잊고 있었던 편안함이었다.
그들이 앉았던 테이블에는 은쟁반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대부분의 고급 상점은 나갈 때 골드를 알아서 두고 나가는 방식으로 돈을 받았다. 물론 가게가 고급일수록 알려 주는 금액보다 조금 더 많이 놓고 가는 것이 미덕이었다.
미하일이 자연스럽게 마부에게 손을 뻗어 지갑을 받은 후 계산하려는 때였다. 왕자의 손이 순간 멈칫하며 굳었다.
좋은 생각이 났다. 왕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바로 옆에 서 있던 직원 하나를 불렀다.
“비용을 수도로 청구해서 받는 것도 괜찮나?”
고급 테일러 샵의 맞춤 정장은 대충 일반 평민의 다섯 달치 생활비에 맞먹었는데, 이 비싼 옷을 아주 기꺼이 사 줄 만한 인간이 수도에 살고 있었다. 옆의 직원은 “당연합니다. 손님.”이라고 정중하게 대답했다.
“좋아. 왕족의 본분을 다하는 만큼 지원은 받아야지.”
왕자는 익숙한 주소를 적어 넣으며 붉은 눈동자를 샐쭉 접어 웃었다.
뭔 말이야 저건. 아드리안은 미하일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어깨를 으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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