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같이가용-69화 (69/184)

69화

드래곤은 아주 작게 콧노래를 부르며 화분을 정리했다.

창가의 화분들은 가끔씩 내려앉은 먼지를 닦아 줘야 했다. 아드리안이 푸른 잎 하나를 세심하게 들어 올려 손수건으로 슥- 슥 닦고 있을 때였다.

“야.”

건너편 침대에 편하게 앉아 뚱한 표정으로 <세기의 영웅과 검>을 읽고 있던 미하일이 문득 그를 불렀다.

왜? 아드리안은 대답 않고 고개만 휙 돌려 왕자를 바라보았다. 싸가지 없는 부름에는 싸가지 없이 반응해 주자는 주의였다.

“……주말에 파티 가기로 한 건 안 잊었지?”

“응?”

드래곤은 이파리를 닦는 손을 멈추지 않으며 별것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같이 약속해 놓고 이쪽이 혼자 입 닦을까 봐 걱정하는 모양새라 조금 웃기기에 장난을 쳤다.

“우리가 그런 약속을 했었나?”

당연히 바락바락 화낼 줄 알았는데, 등 뒤에 앉아 있을 왕자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표정을 보니 너무 어이가 없어 잠시간 할 말이 없었던 듯했다. 천천히 미하일의 얼굴에 떠오르는 빡침에 아드리안은 웃으며 “장난이야. 장난.”이라고 말한 후, 빠르게 말을 이었다.

“걱정 마. 안 잊었으니까.”

미하일은 아드리안의 말에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떤 복장으로 갈 건지 확인해야겠어.”

“……복장?”

드래곤은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식물을 쓰다듬던 손을 내려놓고 창가에서 몸을 돌렸다.

“복장은 왜.”

“역시. 먼저 확인하길 다행이지.”

왕자는 팔짱을 가볍게 낀 채 새초롬한 얼굴로 그의 얇은 입술을 길게 늘였다. 그러고는 아드리안의 옷장 앞으로 당당히 걸어갔다.

“꺼내.”

“뭘…… 아직 안 정했는데. 아니, 그런데 교복은 안 돼? 입학식 파티에서는 모두 교복이었잖아.”

드래곤은 별생각 없이 아카데미에서 열리는 파티는 모두 교복을 입고 갈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 말에 왕자가 표정을 찌푸리며 말했다. 달칵! 미하일은 그의 것이 아닌 옷장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활짝 열었다.

“그런 아카데미 주최 파티와 주말에 열리는 파티가 같아?”

뭐가 다른가? 아드리안은 멋대로 옷장을 열어젖힌 미하일 옆에 바로 가 섰다.

그냥 파티 당일에도 여느 아침과 동일하게 아카데미 교복을 입을 예정이었던 아드리안은 유심히 옷장 안을 들여다보는 미하일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는 상아로 만들어진 옷걸이에 걸려 있는 아드리안의 옷을 보더니 눈썹을 들어 올렸다.

“……옷이 이게 다야?”

“응.”

드래곤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데미니까 당연히 교복을 입을 거고, 그래서 여분의 교복만 사 두었던 터였다.

가지고 있는 돈은 대륙에서 제일가는 주제에 동전 하나 사용하는 데에 무척 깐깐하게 구는 드래곤이었다. 드래곤은 차라리 보석을 모으면 모았지, 몇 년 뒤면 유행에 뒤처질 아까운 천 조각을 사서 모으는 취미는 없었다.

미하일은 그 대답에 썩은 얼굴로 단정하게 잘 걸려 있는 평상복들을 손가락으로 착-착 소리를 내며 옆으로 넘겨 옷장 안의 모든 옷걸이를 확인했다. 마지막 옷걸이에 걸려 있는 편한 상의를 빤히 바라보던 미하일은 한숨을 쉬며 자신의 밝은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그렇게 절망할 정도라고?”

아드리안은 왕자가 볼 가치도 없다는 듯이 넘겨 버린 옷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나름대로 고급스런 소재에 지금 유행에도 딱히 뒤처지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물론 파티에 입고 가기에는 지나치게 편해 보이긴 했지만, 아카데미 파티에 얼마나 격식을 차려야 한단 말인가.

“다행히 파티가 일요일이니 그 전날 사면 되겠어.”

“……아, 난 안 갈래. 그렇게까지 하면서 파티에 가기는 싫어.”

그렇게 되면 주말을 모두 파티에 사용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것만은 정말로 싫다는 얼굴로 휙, 아드리안이 고개를 돌릴 때였다.

“내가 살게.”

응? 골드 드래곤의 귀가 쫑긋 뒤로 섰다. 왕자가 비용을 다 댄다면 아마 그의 체면과 지위를 감안해 고급 정장을 맞출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말이 다르지. 아드리안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등 뒤에 있는 미하일은 아드리안의 웃음을 보지 못하고 다시 말했다.

“……골드는 신경 쓰지 말고 골라도 돼.”

아드리안은 속으로 함박웃음을 지으며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미하일의 표정이 보였다.

“그렇다면…… 뭐.”

미하일에게 아드리안은 마지못해 허락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평화로운 주말이었다.

골드 드래곤은 아카데미에 들어온 후 첫 외출을 위해 빠르게 준비를 마쳤다.

“갈까?”

아드리안은 아카데미용 구두가 아닌 편한 가죽 신발로 갈아 신으며 그의 룸메이트를 불렀다. 미하일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기숙사 방문을 열었다.

“그런데 외출은 어떻게 나가는데? 걸어서 가나.”

드래곤은 구두가 아닌 부드러운 신발을 신어서 그런지 바닥에 딱딱한 대리석이 닿는 묘한 느낌을 즐기며 터벅터벅 미하일을 따라갔다. 아카데미는 커다란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입학할 때 걸어왔던 드래곤은 그 길이 아주 마음에 들었었다. 가볍게 걸어가기 좋은 거리였다.

미하일은 그런 그를 한번 힐끔 보더니, 걸어가는 방향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아카데미는 외부 도시와 차단된 숲속으로 완전히 밖으로 나가려면 걸어선 하루 만에 도시를 다녀올 수 없었다.

“당연히 어제 밖으로 나가는 마차를 예약해 뒀지.”

“아, 그렇군.”

드래곤은 김이 팍 샜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미하일을 따랐다.

주말 외출을 나가려는 학생들이 예약한 마차들이 아카데미 본관에 줄지어 서 있었다. 마부들은 학생들이 건물에서 하나둘씩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마차에서 내려와 문을 열어 주었다.

그중 미하일은 가장 앞에 서 있는 마차 앞에 섰다. 그러자 그 마차 앞에 서 있던 마부가 고개를 깊이 숙이며 공손하게 손짓했다. 마부를 확인하고는 미하일의 뒤에 서 있던 아드리안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엄청난 실력자였다.

“타시지요.”

미하일은 마부가 열어 준 마차에 가볍게 올라탔다.

힐끔, 아드리안은 마차에 뒤따라 올라가며 뒤를 확인했다. 왕자가 탄 마차는 뒤에 줄지어 선 다른 마차보다 아주 약간 더 크고 유일하게 겉면이 흰색이었다. 그리고 이 마차의 마부는 특이하게도 약간이나마 마법을 사용할 줄 알았고, 장갑과 소매 사이에는 날붙이를 끼운 데다 걸음걸이가 아주 독특했다.

왕가에서 마련한 마차네.

“뭐 해. 촌스럽게 두리번거리지 말고 타.”

말을 해도 꼭…… 아드리안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마차에 올라탔다. 자줏빛 융단으로 푹신한 의자가 있었고, 귀하신 분이 가는 동안 지루하지 않게 작은 탁자에 읽을거리가 놓여 있었다. 심지어 그 탁자 옆에는 마실 것을 시원하게 보관할 수 있는 작은 프리저도 있었다.

털썩, 아드리안은 마차에 타자마자 편하게 몸을 기대어 창문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마법의 흔적이 있었다. 지나칠 정도로 과보호란 말이지. 드래곤은 입맛을 다시며 미하일을 바라보았다. 그럴듯한 검만 들고 있다면 제 몸 하나 지킬 정도의 실력이 있다지만 왕가는 막내 왕자가 여간 걱정이 되는 듯했다.

미하일은 아드리안이 자리를 잡자, 팔을 들어 등 뒤의 마차 벽을 똑똑하고 두 번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자,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마부가 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발굽 소리가 거슬렸다가 점차 익숙해졌다.

“원하는 양식이 있어?”

미하일은 탁자에 놓인 책을 읽으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아드리안에게 질문했다. 아드리안은 그 질문에 시선을 밖에 고정한 채, 대강 대답했다.

“없어.”

“그러면 내가 편한 대로 골라서 데려갈 테니 넌 얌전히 치수나 대.”

왕자는 오히려 잘되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달려 있는 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마부석과 마차 간의 벽에 미끄러지듯이 작은 문 하나가 열렸다. 거의 머리 높이에 뚫린 네모난 문이었다. 미하일은 그 문에 대고 테일러 샵의 이름인 듯한 것을 몇 가지 말했다. 마부는 왕자의 목적지를 꼬박꼬박 다시 한번 말하며 숙지하는 듯했다.

스윽- 목적지를 말한 후 미하일이 고리를 놓자 동시에 작은 문이 다시 닫혔다. 문이 열린 자리에 얇은 틈만 보이는 걸 보아하니 아주 정교하게 나무판을 대고 짠 장인의 솜씨가 느껴졌다.

“하루 만에 맞춤옷을 사려면 예산이 꽤 나가겠는데?”

아드리안은 그제야 미하일의 주머니 사정을 걱정해 주었다. 미하일은 픽- 하고 웃으며 아무 말 없이 들고 있는 책을 다시 읽었다. 왕족의 주머니 사정을 걱정해 주는 평민만큼 부질없는 것이 없었다.

조용한 마차 안에서 팔락- 책장 넘어가는 소리와 리듬감 있게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 가끔씩 불어오는 청량한 숲의 바람이 아드리안의 금발 머리칼을 간질였다. 아드리안은 지금 이 분위기가 매우 마음에 들어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룸메이트의 금발에 햇살이 잘게 부딪혀 눈부실 정도로 반짝거릴 때면, 아주 가끔 미하일은 책에서 눈을 떼고 그 반짝임을 힐끗 보다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리곤 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