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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68화 (68/184)

68화

수중에 가지고 있는 틸론이 많아 한동안은 의뢰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드리안은 오랜만에 평소 일어나는 시간에 몸을 일으켰다. 밝은 햇살이 깨끗한 창문을 통과해 기숙사 안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하암- 아드리안은 가볍게 하품을 하며 문가로 걸어갔다. 요즘에는 습관이 된 행동이었다.

역시나 오늘도 신문이 안전하게 잘 배송되어 있었다.

슥, 방문 틈에 끼인 신문을 꺼내던 아드리안의 손에 다른 것도 함께 딸려 왔다. 응? 이것도 신문인가?

말끔하게 흰 종이였다. 탁, 하고 검지에 와 닿는 면이 아주 매끄러운 것을 보니 값비싼 편지 봉투였다.

아드리안은 신문 위에 정성스럽게 포장된 편지 봉투를 앞뒤로 살폈다. 드래곤에게 편지를 보낼 지인 같은 것은 없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편지 봉투에는 고급 잉크로 휘갈겨 쓴 ‘미하일 루스 이네하트’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미하일. 여기 너한테 편지가 왔어.”

아드리안은 편지 봉투를 가볍게 미하일에게 던졌다. 침대에 걸터앉아 명상 수련을 하고 있던 미하일이 감고 있던 눈을 떠서 갑자기 날아온 종이를 턱, 하고 낚아챘다.

아무리 편지 봉투라 해도 왕족에게 물건을 이런 식으로 던지는 미친 인간을 만나 본 적 없었던 미하일이 짜증스레 외쳤다.

“……전해 줄 거면 제대로 전달해!”

“너도 내 편지를 받으면 이렇게 던져서 주면 되잖아.”

아드리안은 절대 자신에게는 오지 않을 편지를 가볍게 팔아먹었다. 요즘 들어 미하일은 왕족이라 다양한 욕을 접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 불만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고작해야 ‘야만스럽다’라든가 ‘예의 없다’ 정도가 다였다.

미하일은 잡은 편지 봉투의 겉면의 발신인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행동력 빠른 카메론 해리스. 진짜 편지를 쓰다니 간도 크지.

편지의 발신자는 그 유명한 ‘알릭스 전하’였다.

미하일은 속으로 제 형을 욕하며 편지 봉투를 열었다. 멋들어진 왁스로 봉해진 편지 봉투를 열자 커다란 왕국의 인장이 중앙에 크게 인쇄된 편지지의 장식이 보였다. 그 안에는 진주를 갈아 광택을 낸 종이 하나와 얇은 종이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더 커다란 종이 먼저 봉투에서 꺼낸 후 안의 내용을 살폈다.

일반 편지지 크기의 새하얀 종이는 대부분 휑하니 비어 있었다. 편지의 정중앙에는 짧게 휘갈겨 쓴 한 문장이 들어가 있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상 왕족의 본분을 다해라.

알릭스 놈의 말투가 편지의 글자에서도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미하일은 인상을 찌푸린 채, 나머지 종이를 집어 들었다.

편지 봉투 안에 들어 있었던 얇은 종이 하나는 당연하게도 카메론 해리스가 주최한 파티의 초대장이었다. 왕족의 본분을 다하라니, 왕족의 본분이 파티에 참가하는 것인 줄은 몰랐던 미하일이 입술을 비죽 올려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러고는 헛웃음을 지으며 편지를 침대에 세게 던졌다.

공중으로 세게 팟- 하고 날아간 종이는 비싼 편지지답게 아주 우아하게 하늘하늘 침대에 내려앉았다. 그것마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아침부터 성질부리다간 빨리 늙는다.”

아드리안은 오래 산 연륜을 통해 그런 왕자에게 조심스레 충고해 주었다. 인간들은 매우 몸이 약해 별것 아닌 스트레스에도 픽픽 쓰러지고는 했다. 아드리안의 세심한 조언에 미하일은 고마운 줄도 모르고 인상을 팍 썼다.

그러고는 아직 손에 들려 있는 얇은 초대장을 내려다보았다. 생각해 보니 미하일은 파티에 같이 갈 사람이 없었다. 알릭스는 할 일도 없는지 왕성에서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자신이 보낸 초대장에 응했는지를 확인할 놈이었다. 이런 편지를 보낼 정도로 간절히 원한다면 이 정도는 들어줄 수 있었다.

“이번 주말에 뭐 해.”

아드리안은 신문을 읽으며 창가에 화분에 물을 주는 자세 그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본 거에나 답을 해.”

“오르디나스 온실에 가 봐야 하-”

“그러니까 아무 일정도 없다는 말이군.”

이 망할 놈이 뭐라고? 아드리안은 온실에서 해야 할 일들을 떠올리려 하다가 말허리를 자르며 들어온 미하일의 단언에 눈썹을 들어 올렸다.

“바쁘다니까? 온실에 있는 약초들이 얼마나 섬세한데.”

“그거 하루 안 한다고 죽어?”

“뭐…… 그건 아니지.”

이 몸이 관리하는 약초는 절대 죽지 않는다고.

골드 드래곤은 촤아아- 하고 세심하게 물뿌리개의 각도를 조절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역시 해가 잘 드는 창가에 며칠 두었더니 이파리가 파릇파릇하니 상태가 최상이었다.

미하일은 뚱한 표정으로 초대장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니 우리가 이제 조금 많이 친해졌잖아.”

“……그래?”

억겁의 시간을 살아온 드래곤이지만 도통 인간들과의 관계는 알 수 없었다. 지금 이게 친해진 건가? 드래곤은 당황한 표정을 속으로 숨기고 대답했다.

“……우리가 그 정도로 친해졌어?”

정말로 몰라서 하는 질문이었으나, 미하일은 상대가 비꼰다고 생각했던지 눈을 새초롬하게 뜨고 아드리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럼 아니야?”

아니라고 말하기에는 애매했다. 같이 수업을 듣고, 밥을 먹고 대련을 하고 같은 방을 사용한다…… 이런 관계를 인간들은 친구라고 부르는 걸지도 몰랐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라고 하자.”

탁, 탁. 아드리안은 물뿌리개를 들어 올리며 남은 물방울을 털어 내어 오늘 아침의 할 일을 끝냈다. 그러고는 침대에 앉아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미하일을 바라봤다.

“그런데?”

“친구에게 할 부탁이 있어.”

“싫어. 그런 거라면 친구 안 할래.”

아드리안은 피식 입가에 비웃음을 띄우며 물뿌리개를 자신의 테이블 밑에 잘 정리해서 밀어 넣었다. 미하일은 침대에 팍! 주먹을 내리치며 물었다.

“일단 부탁을 들어보고 결정하지?”

“몇 틸론 줄 건데.”

“……뭐?”

드래곤은 팔짱을 낀 채로 턱, 테이블에 몸을 편하게 기댄 채 곧바로 협상에 들어갔다.

“아무리 친구라도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지. 내가 멍청이로 보여?”

“…….”

미하일은 손에 남은 20틸론을 떠올리며 주먹을 꾸욱 쥐었다. 타드폴리를 잡느라 생고생을 해서 벌었던 돈이었다. 왕자는 눈을 살짝 감았다. 파티에 동행할 다른 놈들은 없을까? 생각은 잠시 스쳐 지나갔으나, 처음 보는 사람과 파티에 가는 것만큼 어색하고 고역인 상황이 없었다.

“틸론 말고.”

왕자는 그 상태로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틸론 말고 원하는 건 없어?”

“아, 부탁의 대가는 부탁으로 받는다는 거군.”

아드리안은 좋은 거래 조건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흠, 뭔가 미하일에게 원하는 게 있었나? 그러나 머릿속에 당장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음…… 미안, 그런데 내가 너한테 원하는 게 없다.”

“잘 생각해 봐. 이래 봬도 나는 왕국의 왕족이라고.”

갈색 눈동자가 기숙사의 천장을 향해 잠시간 멈춰 있다가, 다시 뚱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힘도 약하고, 가진 재산도 더 적고…… 왕국의 왕족으로서의 미하일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별로 쓸모가 없었다.

“진짜 없어.”

미하일은 입속으로 할 수 있는 욕 몇 가지를 집어삼키며 간신히 아드리안에게 대답했다.

“……나중에라도 말하면 되잖아. 대신 카메론 해리스가 여는 주말 파티에 나랑 같이 가.”

“왜 그렇게들 그 파티에 가자는 거야.”

“알았지?”

미하일은 중얼거리며 불평하고 있는 아드리안에게 상황을 정리하며 다시 한번 물었다.

“어차피 너한테도 좋은 기회라고. 카메론이 여는 파티는 아카데미의 극히 일부만 초대받았어. 높은 가문들이랑도 친해질 수 있어.”

“그래…… 뭐……. 알았다.”

그딴 인맥들은 드래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아드리안은 언젠가 미하일에게 부탁할 수 있는 권리를 우선은 받아 두었다. 쓸 곳이 있기는 할 것이었다.

동행하겠다는 말을 들은 미하일이 초대장에 동행인의 수와 이름을 깃펜으로 적고 있을 때였다. 아! 하는 소리에 미하일이 번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드리안이 갑자기 몸을 돌려 이쪽에 외친 소리였다.

“그 파티에서는 술을 마실 수 있어?”

“……술?”

미하일은 미적지근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바사미엘 아카데미 안에서 열리는 모든 파티들에 알코올은 금지 사항이었다. 자유롭고 공부에 스트레스를 주지 않아서인지 다들 가끔 잊고는 했지만 바사미엘은 그래도 교육 기관이었다.

“당연히 안 되지.”

그래서 미하일은 확실하게 안 된다고 대답할 수 있었다.

그딴 게 무슨 파티야. 아드리안은 미하일의 대답을 듣고는 안 그래도 관심 없었던 파티에 대한 의욕이 절반으로 더 떨어졌다. 그러고는 “그래.”라고 대충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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