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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67화 (67/184)

67화

……뭐?

아드리안은 도서관 구석에 마련된 자줏빛 소파에 누워서 책을 읽다가, 읽은 내용에 깜짝 놀라 상체를 일으켰다. 드래곤은 손에 든 <파티 문화가 왕국에 끼친 영향>이라는 제목이 써진 두꺼운 책을 읽고 있었다.

바사미엘 아카데미는 왕국 전체에서 손꼽히는 아름다운 도서관을 가지고 있었다. 정갈한 마법으로 관리되는 서고와, 매년 이어지는 귀족들의 보여 주기식 기부로 도서관의 신간 리스트는 잉크 마를 날이 드물었다.

어제 식당에서 아무도 놀라지 않은 이유가 있었군. 진짜 파트너를 구하는 데에 남녀를 가리지 않는다고……? 그러면 번식은 어떻게 하는- 하긴 인간들은 번식을 너무 많이 하긴 해.

아드리안은 책장을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도대체 언제부터?

분명 몇백 년 전에는 동성을 파트너로 삼는 건 사회적으로 배척당하는 분위기였다. 어떤 왕의 치하에서는 처형 제도까지 만들어진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 루스타바란 왕국이 건국되면서부터인가? 그 유희 이후에는 인간계로 나온 적이 없으니 대강의 시점은 알 수 있었다.

드래곤은 학구열에 불타올라 도대체 이 문화가 언제 시작되었는지 찾아보기에 이르렀다.

그때였다.

카를로 데 이네하트. 익숙한 글자가 고급스런 종이 위에 아름다운 필체로 쓰여 있었다. 드래곤은 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살짝 쓸어 보았다. 건국 왕의 이름이라 그런지 책에 금박 재료를 아끼지 않고 사용하여 그 페이지 전체가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다.

다 돈지랄이지.

실제로 카를로가 보았다면 혀를 차며 당장 금지령을 내렸을 것이다.

드래곤은 금박을 손톱으로 살짝 긁어 보았다.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다들 부자라 이런 책을 마음 놓고 기부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드리안은 책의 중심에서 그 페이지를 펼쳐 올렸다. 아코디언처럼 몇 페이지가 접혀 있었는데 완전히 펼쳐 보니 거의 아드리안의 팔 한쪽 길이만 한 삽화였다.

카를로가 왕관을 쓰고 있는 장면이 몇 장에 걸쳐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었다.

“이건…… 대관식 날이군.”

화려한 보석으로 장식된 왕관을 쓰고 있는 남자의 가넷처럼 붉게 빛나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이미 죽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림 속 기백이 마치 살아 있는 왕의 귀한 얼굴을 올려다보는 것처럼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카를로의 옆에 그려져 있는 금발 머리의 대마법사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만져 보았다.

정말로 금과 은으로 장식한 모양이었다. 이제는 흐려진 기억들 속에서만 존재하던 카를로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볼 기회가 오자, 드래곤은 작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인간들은 짧은 수명 탓에 때때로 지나치게 기록에 집착했는데, 드래곤은 그 덕에 잊고 있던 추억을 기억할 수 있었다.

미하일을 바라보며 그저 왕가의 자손이니 닮을 수밖에 없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카를로의 초상화를 보자 드래곤은 그 두 인간이 얼마나 지나치게 닮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

즐거운 인간들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분위기가 점차 무르익어 모두가 왕국의 오랜 평화와 부강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테라스에 홀로 서 있는 남자에게 무르익어 가는 파티 분위기는 전혀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다. 유명한 하프 연주자를 데려왔다던 말은 진짜였던지 감미로운 음악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아, 그리고 이 술도. 골드 드래곤은 유려한 손가락으로 가볍게 들고 있는 포도 알갱이로 만들어진 술을 달에 대고 비춰 보았다.

그때였다.

‘……파티가 취향이 아닌가 봐.’

테라스 구석에 서서 밝은 달을 바라보며 술만 마시고 있는 골드 드래곤에게 누군가 불쑥, 다가왔다. 이미 인기척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놀란 기색도 없이 그 이야기에 대답할 수 있었다. 카를로 데 이네하트였다. 그는 이런 파티가 무척 익숙한지 드래곤이 이 테라스에 나오기 전까지 보기론 연회장에서 다른 인간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즐겁게 춤을 추고 있었다.

‘이런, 내 취향을 아직도 모르나?’

하하하- 갑자기 연회장 안에서 커다란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그 소리에 드래곤과 카를로가 고개를 테라스 안쪽으로 돌렸다. 이딴 파티 같은 건 절대 드래곤의 취향이 될 수 없었다.

흠, 드래곤이 눈가를 미세하게 찌푸렸다. 카를로는 그것을 확인하곤 테라스 밖으로 몇 걸음 더 걸어 나와 촤악, 하고 테라스의 커튼을 절도 있게 닫았다. 얇은 천이었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루스 페니건은 한쪽 입술 끝을 삐죽 들어 올려 피식하고 웃었다. 카를로는 그의 표정을 살피며 루스가 팔을 걸치고 기대 있는 테라스 난간으로 걸어왔다.

‘나가서 더 친해져야 하는 것 아니고?’

루스는 그런 카를로에게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 재미없는 파티에 나와 있는 것은 카를로의 볼일 때문이었다. 그가 동행을 요청한 것은 이쪽이 사교성이라고는 다르펑의 뿔만큼도 없다는 것을 깨닫기 전이었으니 아마 그는 동행을 제안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을 것이었다.

‘동행이 이렇게 혼자 나와 있는데…… 파티를 즐길 수는 없지.’

‘……그래?’

이제 들어가야겠군.

드래곤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마시던 술을 테라스 난간 밖으로 주르륵 부었다.

‘왜? 와인이 이상했어?’

갑자기 마시던 술을 버리는 루스를 카를로가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물었다. 루스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대답했다.

‘와인은 이제 질렸어. 더 깔끔한 것이 마시고 싶어서 들어가는 김에 새로 받으려고.’

카를로의 붉은 눈동자가 옅게 질책하듯이 루스의 얼굴을 훑었다.

‘술을 아주 좋아하는군. 아까부터 많이 마시던데 주량이 어떻게 돼.’

취한 기미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루스의 얼굴은 붉은 기 한 점 없이 아주 멀쩡하게 보였다.

‘네 파티에서 실수할 일은 안 할 정도로 마실 테니 걱정 마.’

‘……그런 걱정은 한 적 없어.’

‘앞으로 몇백 잔을 쏟아부어도 괜찮다는 뜻이야.’

뭐? 비현실적인 주량에 카를로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에 루스가 검지와 중지를 자신의 관자놀이에 가져다 대어 어떤 마법을 사용했다. 달 아래에 서 있는 카를로의 눈동자에는 루스의 금발과 마치 끓어넘치듯이 일렁거리는 금빛 눈동자만 보였다.

골드 드래곤은 마법을 사용한 탓에 주변 대기에서 반짝거리는 금빛 마나 알갱이들을 후- 하고 가볍게 불어 흩트렸다.

‘…….’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카를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앞의 지독하게 아름다운 것을 빤히 관찰했다. 루스는 그 시선을 느끼곤 눈동자를 가늘게 좁혔다.

‘알겠지?’

마법으로도 취기를 상쇄할 수 있었고, 어차피 그의 신체는 인간의 것을 능가하는 능력치를 가지고 있었다. 눈앞의 인간이 무엇을 걱정하든, 그것은 드래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한때는 그것이 무척이나 즐겁고 우쭐했으나, 이제는 그런 마음이 사라진 지 한참이었다.

‘……술을 몇백 잔이나 마시려고 마법을 쓰다니. 사치야.’

카를로는 입가를 늘려 멋들어지게 웃으며 테라스 난간에 몸을 기댔다.

‘그러면 무슨 의미가 있어. 술은 취하려고 마시는 거잖아.’

‘의미? 술을 마시는 데에도 의미가 있다는 건가?’

골드 드래곤은 이상한 이야기에 비어 있는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긴, 인간들은 온갖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걸 즐겼지.

‘취하는 게 즐거우니 마시는 거야.’

카를로는 혼자 이상한 결론을 내린 드래곤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취하는 게 즐겁다고?’

‘다음번에는 한번 취할 때까지 마셔 봐. 물론, 다음 날 지독하게 머리가 아플 거다.’

‘싫어.’

드래곤은 단칼에 거절하고는 한숨을 쉬며 테라스 난간에서 몸을 떼어 냈다. 카를로가 찾으러 이곳까지 온 정도니까 밖에 오래 나와 있긴 했다.

커튼을 걷어 연회장으로 루스와 카를로가 들어갔을 때였다. 수군거리는 인간들의 눈동자가 이쪽으로 향해 있는 것이 느껴졌다. 부채와 손바닥, 옷소매 같은 것들로 입을 가린 채 카를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청력이 지나치게 좋은 골드 드래곤은 옆의 남자를 힐끔 확인했다. 웃으며 떠들고, 춤을 췄던 것은 다 잊었는지, 몰락한 가문에서 나온 비운의 검술 천재라며 떠들어 대고 있는 것이 귀가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카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서버에게서 새로운 술을 받아 루스가 들고 있는 빈 잔과 바꿔 주었다.

‘이번엔 이걸로 마셔 봐. 왕성의 파티에서 새롭게 유행하고 있는 주종이야.’

‘그래.’

루스는 술을 넙죽 받아 바로 입가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그런데 여기에 내가 왜 꼭 와야 했지?’

아까부터 거슬렸는데, 귀찮아서 물어보지 않은 것이었다. 드래곤이 알기에도 이런 파티에는 이성과 오는 것이 인간의 문화와 관습상 맞았는데, 카를로는 굳이 이 드래곤을 여기에 데리고 왔다.

‘……왜. 누가 너에게 뭐라고 말했나?’

‘온통 네 이야기만 하고 있어.’

누구라고 특정할 수 없을 정도였다.

드래곤은 제 알 바 아니란 듯이 새로 받은 술을 꿀꺽꿀꺽 시원하게 넘겼다.

무척이나 예의 없는 짓이었다. 술의 맛과 향을 즐기지 않고 물처럼 마시다니, 평민들이 싸구려 술을 마실 때나 하는 행동이었다. 왕성에서 열린 파티에 참가한 귀족들이 눈을 새초롬하게 뜨며 그 꼴을 바라보고는 저들끼리 시선을 교환했다.

‘신경 쓰지 마. 저런 인간들이야 곧 입도 벙긋 못 할 테니.’

카를로의 붉은 눈동자가 무슨 일에선지 차갑게 빛났다.

그래? 드래곤은 어깨를 으쓱이며 비운 잔을 서버에게 돌려주고 한 잔을 더 받았다. 새로 유행하고 있다는 주종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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