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잠에 들려 한 지 몇 시간째였다.
드래곤은 오랜만에 그가 침대 밑에 밀어 넣어 둔 고민거리를 떠올렸다. 그러자 잠이 오질 않아 한숨을 쉬며 뒤척였다. 의뢰를 수행하고 온실을 관리하는 것은 재미있었으나 이렇게 하다간 2학년으로 진급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뒤척인 탓에 벽을 등지게 된 아드리안의 눈동자에 미하일의 침대가 들어왔다. 왕자는 마치 죽은 듯이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지금이었다.
아드리안은 눈을 가볍게 감아 본체에서 마나를 조금 끌어왔다. 번뜩- 잠시 후 열린 아드리안의 눈꺼풀 아래로 어두운 방 안을 비추는 금빛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드래곤은 침대에 누운 채 시전어를 조용히 읊었다.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그의 몸 전체를 금빛 마나 알갱이가 조금씩 일렁이며 감싸 안았다.
침묵 마법이었다.
스윽- 아드리안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다음, 고급 이불을 들춰 침대 아래 공간을 확인했다. 소름 끼치는 덩어리 두 개가 얌전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팔을 뻗어 그 두 개를 침대 프레임 밖으로 꺼냈다.
그러고는 한 손에 하나씩 쥐고 몸을 일으켰다. 썩을…… 볼품없는 한쪽 손바닥 위의 돌 하나가 터무니없을 정도로 무거웠다. 안 봐도 당연히 내 거겠지. 드래곤은 지나치게 가벼운 미하일의 돌멩이를 바라보곤 혀를 차며 두 개 다 제자리로 밀어 넣었다.
손바닥을 휘익- 하고 휘둘러 방 안에 활성화된 침묵 마법을 풀었다.
그때였다.
똑똑똑,
작은 노크 소리가 적막에 잠긴 방 안을 깨우고는 잇달아 스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벌써 여섯 시라고? 밤을 다 새웠네. 뭐, 어차피 드래곤은 며칠간 잠들지 않아도 끄떡없는 신체를 가지고 있으니 상관은 없지만.
아드리안은 방문 틈에 끼인 신문을 집어 들고는 협탁으로 조용히 걸어갔다. 그러고는 성냥으로 협탁 위의 조그만 램프를 밝혔다.
미하일의 침대 쪽에서 천이 스치는 소리가 들리다가,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에 아드리안이 고개를 들어 올리자, 침대에 누운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룸메이트와 눈이 마주쳤다.
“나 때문에 깬 건 아니지?”
“……깼다면 어쩔 건데.”
미하일이 잔뜩 잠긴 목소리로 대꾸했다.
“만약에 그러면 미안하다고 말해 주려고.”
아드리안은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신문을 계속 읽었다. 팔락- 종이 넘기는 소리가 방을 채웠다. 신문을 마지막까지 넘겨 연금술 교수가 알려 주었던 ‘바사미엘 잡화점’ 페이지를 읽었다.
단추를 경매에 올릴 생각이었다. 그 페이지에는 경매를 올리는 방법에 대해 짧은 설명이 있었다.
그가 테이블에 올려 둔 깃펜을 집어 들고 잉크병을 돌려 열었다. 깃펜을 적당히 잉크에 담근 후 테이블 위를 굴러다니는 종이를 찾는 순간이었다.
테이블 한편에 잊고 있던 쿠키 한 봉지가 놓여 있었다. 준다길래 예의상 받았으나 드래곤은 단것을 찾아 먹는 취미는 없었다. 드래곤은 쓸모없는 먼지를 털듯이 툭- 쿠키 봉지를 밀어 테이블 옆의 휴지통 안으로 떨어트렸다.
선물을 저렇게 버린다고?
잠이 덜 깬 채 아드리안 방향을 보고 있던 미하일이 그 소리에 슬쩍 눈을 떠서는 아드리안이 방금 저지른 무례한 짓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아드리안은 별것도 아니라는 듯이 원래 목적이었던 종이를 찾아들고는 다시 협탁으로 돌아왔다. 사각사각 고급 깃펜이 유려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편지를 모두 적은 아드리안은 그 종이를 집어 들고, 신문에 안내된 대로 정확히 두 번 접어 단추를 그 틈에 떨어트린 후 방문 틈에 끼워 넣었다.
그러자 슥- 하고 편지가 곧바로 방문 밖으로 미끄러져 빠져나갔다.
마치 누군가 방문 밖에서 잡아당긴 것처럼 움직였다. 아드리안은 신기한 광경에 기숙사 방문을 살짝 열어 밖을 확인했다.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신문을 배송한 것과 같은 마법 시스템이었다.
편지가 사라진 문틈을 다시 한번 확인하던 아드리안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붉은 눈동자가 여전히 이곳을 향해 있었다.
“……읽을래?”
뭐지? 신문을 읽겠다는 건가. 아드리안은 고개를 기울이며 미하일에게 신문을 권했다. 그러자 미하일은 코웃음을 치며 “됐어.”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휙, 몸통을 돌려 벽 쪽으로 몸을 뒤척이며 이불을 머리까지 덮었다.
“램프나 꺼.”
“그래.”
후- 드래곤은 바람을 불어 순순히 협탁의 램프 불빛을 꺼 줬다.
***
어느덧 바사미엘에도 시험 기간이 다가왔다. 물론 신입생들에게 시험 기간은 아직 무거운 주제는 아니었다.
지나가던 학생 한 명이 옆의 친구와 이야기했다.
“혹시 정령학 수업 필기를 빌려줄 사람 있어?”
“어……그 수업에 필기할 게 있었나?”
필기 이야기를 들은 학생이 뺨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뭐 설명해 주신 건 많았는데, 나도 필기를 하지는 않아서 기억은 잘 안 나.”
“그런데 시험에서 낙제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자신 없는 건 아니고 갑자기 궁금해졌어.”
학생의 표정은 그런 것 치고는 무척 진지하고 심각했다.
“걱정할 것 없어. 어차피 낙제한다고 해서 2학기를 못 듣지는 않잖아.”
겨우 몇 과목 낙제한다고 아카데미가 학생을 내쫓을 필요는 없었다.
바사미엘은 성적에 유한 편이었다. 지금 이곳에서 밝게 웃으며 식사 중인 아이들은 일반 평민의 몇 년치 생활비에 육박하는 학비를 턱턱 지불하고 수업을 듣는 학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옆 테이블에서 저런 이야기를 해도 미하일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스테이크를 썰어 입가로 가져갔다.
모두가 웃으며 낙제 이야기를 농담으로 떠들어 댔다. 모두가 그랬다. 아드리안만 제외하고. 드래곤은 겉으로만 웃고 있었다. 빌어먹을. 진짜 이러다간 나만 내년에 이곳에 없겠는걸. 아드리안은 억울했다.
물론 드래곤도 가만히 앉아서 이 사태가 해결되길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었다.
꿰뚫어 보는 눈을 바꿔치는 방법
교장에게 마법을 걸어 눈속임을 하는 방법
바사미엘의 분수대를 파괴하는 방법
다양한 해결법이 아드리안의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그러나 그중 어느 것 하나도 드래곤의 마음에 쏙 드는 것이 없었다.
그때였다.
“……안녕.”
아드리안과 미하일이 식사 중인 테이블에 누군가 다가와 인사했다. 같은 강의를 들어서 익숙한 얼굴이었다.
미하일은 대강 고개를 끄덕였고, 아드리안은 접시 옆의 찻잔을 집어 들어 입가심을 한 후 불청객을 향해 씨익 웃어 주었다. 솔직히 식사 시간을 방해받는 것은 별로였으나, 아카데미 안에서 그런 것에 예민하게 굴 수는 없었다.
“좋은 아침.”
결 좋은 금발 머리칼이 쓰윽 미끄러지며 멋들어진 외모를 더욱 빛냈다. 미하일은 맞은편에서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드리안을 잠시간 바라보다 속으로만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하며 식사를 이어 갔다.
“아드리안, 혹시 내일 열리는 파티에는 누구랑 동행하나 해서 물어보러 왔어.”
“그래? 무슨 파티를 말하는 거야?”
드래곤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파티의 수만 해도 수십이었다. 이게 모두 망할 교내 신문에서 두 면이나 차지하는 <이달의 바사미엘> 때문이었다. 좋은 기억력을 쓸모없는 아카데미의 파티 일정을 외우는 데 사용하게 생겼다.
“당연히 해리스가 여는 파티지.”
……그런데?
골드 드래곤은 당황한 티를 최대한 숨기고는 얼굴에 미소를 유지했다. 파티를 같이 가자는 건가? 그런데 이놈은 남자잖아. 학생은 아드리안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얼굴을 살짝 붉히며 발등을 툭툭, 바닥에 두드리고 있었다.
먼저 말을 걸어온 인간이 도통 다시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자, 아드리안이 고개를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우선 용건을 알아내야 했다.
“……파티에 같이 가자는 거야?”
아드리안은 곁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식당에 있는 모든 인간들 중 이 상황을 이상하다고 여기는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바로 맞은편에 앉아 식사를 하던 미하일도 이 상황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쪽보다 키가 작아 품에 폭 안을 수 있을 것 같긴 하다만, 그래도 저건 인간 남자였다. 상대가 레이디였다면 드래곤은 능숙하게 파티 동행인 흉내를 내 줄 수 있었다.
“싫어?”
파티 얘기를 꺼낸 학생은 풀 죽은 표정을 지으며 아드리안의 눈치를 봐 댔다.
“아니…… 싫다는 게 아니라…….”
아드리안은 말을 질질 늘어트려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방법을 떠올렸다.
“아니야, 내가 동행인으로는 별로라는 거잖아. 괜찮아. 이런 걸로 상처받지는 않아.”
그는 상처받지 않았다는 말치고는 당황한 듯 말을 뱉어 내곤 “그럼, 나중에 강의실에서 봐.”라며 제법 빠르게 먼저 자리를 떴다. 애써 웃어 주는 눈에 눈물이 살짝 맺힌 것이 보였다.
뭐지 이 상황? 아드리안은 당황한 표정으로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왕자는 재밌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며 그런 아드리안의 표정을 확인했다.
“제법 눈이 높나 봐?”
미하일이 우아한 손놀림으로 스테이크를 썰어 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 저놈에게 쿠키를 선물했던 학생도 명망 있는 학자 가문의 손녀였다. 아카데미에 겨우 입학한 평민 주제에 파트너를 고르는 기준이 높아도 너무 높았다.
아드리안은 무척이나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뭐? 눈이 높- 아니, 아니 남자한테는 파티 동행 신청을 안 하지 않나.”
흠? 미하일의 붉은 눈동자가 아드리안의 얼굴을 관찰하듯이 살짝 움직였다.
루스타바란에서 파트너를 고르는 데에 성별을 중시하지 않은 것은 이제 너무 오래되어 그 시초가 누구인지도 기억하기 힘든 오랜 관습이었다. 게다가 왕자의 룸메이트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에는 양쪽 모두에게 인기가 많을 외모와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대륙 밖에서 오래 살다 왔나 보군.”
왕자는 입가에 찻잔을 가져다 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루스타바란 왕국이 위치한 대륙은 거의 세상의 전부라고 할 정도로 커다란 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왕국민들은 ‘대륙 밖’이라는 관용어를 자주 사용했는데, 상식 하나 없는 야만인을 돌려 말하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미하일의 태도로 봤을 때, 인간들에게 아주 일상적인 일인 듯했다.
하하, 아드리안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입가를 닦았다. 어찌 보면 지금 상황에 딱 맞는 관용어였다.
자는 동안 세상 참 많이 변했다. 진짜 많이.
골드 드래곤은 노인네 같은 생각을 하며 쓴 차를 열심히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