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다시 새벽이었다.
그러나 이제 미하일과 아드리안은 알고 있었다. 기숙사의 학생들 중 누군가는 깨어 있을 거라는 것을 말이다.
똑똑똑,
노크 소리가 잠들어 적막에 잠긴 방 안을 깨우고는 스윽, 하는 소리가 잇달아 들렸다. 정확히 여섯 시였다. 아드리안과 미하일은 이미 침대에 앉은 채로 신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침대에서 그 소리를 듣자마자 몸을 벌떡 일으켜 방문으로 걸어갔다.
드래곤은 방문 틈에 꽂혀 있는 신문을 집어 들어 협탁으로 걸어왔다. 미하일은 신문을 빨리 펼치라는 듯이 이미 그 협탁 옆에 서 있었다.
그들은 제법 진지한 눈으로 커다란 바사미엘 교내 신문을 한 장씩 넘겼다.
<오늘의 날씨> -필요 없고,
<이달의 바사미엘> -당연히 필요 없고,
<바사미엘 잡화점> -지금은 관심 없지.
아드리안은 종이를 빠르게 뒤집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 있는 궁금했던 <오늘의 의뢰>였다.
“오오.”
그들의 생각이 맞았다. 어제 확인했을 때는 모두 검은색으로 덧칠되어 있었는데 오늘은 읽을 수 있었다.
━━━━⊱ 오늘의 의뢰 ⊰━━━━
의뢰 A : 카메론 해리스의 파티에 동행할 사람을 구합니다. [10틸론]
의뢰 B : 미프스리 털을 깎아 줄 사람을 구합니다. [3틸론]
의뢰 C : 바사미엘 여름 음악회(사 일간) 운영 어시스트를 구합니다. [50틸론]
의뢰 D : 이트막 보관 마법 시전자를 구합니다. [10틸론]
의뢰 E : 타드폴리(다섯 마리 정도)를 구합니다. [마리당 10틸론]
의뢰 F : 고대 문자 해독 연구회에서 시 해석 자문을 구합니다. [10틸론]
━━━━⊱⋆⊰━━━━
미하일과 아드리안은 잠시간 아무 말도 없이 그 페이지에 가지런히 나열되어 있는 의뢰 목록들을 눈으로 읽었다. 내용으로 봤을 때, 아카데미 학생들이 직접 게재하고 의뢰를 받아 가는 형식인 것 같았다.
“해 볼 만한데? 한번 신청해 볼까?”
생각보다 소소한 의뢰들에 자신감이 생긴 아드리안이 눈동자를 빛냈다. 미하일도 그렇게 생각했던지 고개를 끄덕이며 신문을 보고 있을 때였다.
신문 위에 쓰여진 글자 하나가 살짝 일렁거렸다.
아드리안은 신문을 들고 있는 손가락 끝에서 미약하게 마나의 움직임을 느꼈다. 그 마나에 반응하듯이 신문의 <오늘의 의뢰> 페이지의 어떤 부분이 일렁거렸다. 골드 드래곤은 고개를 기울이며 일렁이는 글자 부분을 검지로 살짝 쓰다듬었다. 마나가 손가락 끝을 간질이며 글자 모양을 흐트러트리고 있었다. 철자가 찍힌 글자들이 번지면서 검은 사각형으로 변해 갔다.
“이런…… 방금 하나가 마감되었군.”
골드 드래곤이 중얼거렸다.
━━━━⊱ 오늘의 의뢰 ⊰━━━━
의뢰 A : 카메론 해리스의 파티에 동행할 사람을 구합니다. [10틸론]
의뢰 B : ■■■■ ■■ ■■ ■ ■■■ ■■■■
└ 이미 마감된 의뢰입니다.
의뢰 C : 바사미엘 여름 음악회(사 일간) 운영 어시스트를 구합니다. [50틸론]
의뢰 D : 이트막 보관 마법 시전자를 구합니다. [10틸론]
의뢰 E : 타드폴리(다섯 마리 정도)를 구합니다. [마리당 10틸론]
의뢰 F : 고대 문자 해독 연구회에서 시 해석 자문을 구합니다. [10틸론]
━━━━⊱⋆⊰━━━━
새벽 여섯 시 인력 시장이 매우 활발한 듯했다. 곧바로 의뢰 D도 마감되었다. 다행히 아드리안과 미하일은 맡을 수 없었던 고급 마법의 시전자를 구하는 의뢰였다. 생각보다 빨리 마감되는 의뢰들에 아드리안은 마음이 급해졌다.
“잠깐, 잠깐 의뢰를 어떻게 신청하지?”
다급해진 아드리안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의뢰 하나의 글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윽, 이것도 벌써 마감이군. 그나마 편해 보이는 고대 문자 해독 연구회의 의뢰였다.
━━━━⊱ 오늘의 의뢰 ⊰━━━━
의뢰 A : 카메론 해리스의 파티에 동행할 사람을 구합니다. [10틸론]
의뢰 B : ■■■■ ■■ ■■ ■ ■■■ ■■■■
└ 이미 마감된 의뢰입니다.
의뢰 C : 바사미엘 여름 음악회(사 일간) 운영 어시스트를 구합니다. [50틸론]
의뢰 D : ■■■ ■■ ■■ ■■■■ ■■■■
└ 이미 마감된 의뢰입니다.
의뢰 E : 타드폴리(다섯 마리 정도)를 구합니다. [마리당 10틸론]
의뢰 F : ■■ ■■ ■■ ■■■■■ ■ ■■ ■■■ ■■■■
└ 이미 마감된 의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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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이러다가는 곧 다 마감되겠는데?”
“……따로 신청 방식이 있는 건가?”
아드리안과 미하일은 검지손가락으로 종이 위 남은 의뢰들을 막 두드렸다. 신청하는 방법은 몰랐으나, 어쨌든 틸론의 계약 문양이 있는 오른손으로 두드리고 있으니 의뢰를 신청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때였다.
신문 위를 헤매던 두 소년의 오른쪽 손등이 밝게 빛났다. 의뢰 신청이 된 건가?
아드리안은 곧바로 신문을 눈앞에 가져다 대어 확인했다.
━━━━⊱ 오늘의 의뢰 ⊰━━━━
의뢰 A : ■■■ ■■■■ ■■■ ■■■ ■■■ ■■■■
└ 이미 마감된 의뢰입니다.
의뢰 B : ■■■■ ■■ ■■ ■ ■■■ ■■■■
└ 이미 마감된 의뢰입니다.
의뢰 C : ■■■■ ■■ ■■■■ ■■ ■■ ■■■■ ■■■■
└ 이미 마감된 의뢰입니다.
의뢰 D : ■■■ ■■ ■■ ■■■■ ■■■■
└ 이미 마감된 의뢰입니다.
의뢰 E : 타드폴리(다섯 마리 정도)를 구합니다. [마리당 10틸론]
└ 의뢰에 선정되셨습니다.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의뢰 수락자: “아드리안 헤더” “미하일 루스 이네하트”
의뢰 F : ■■ ■■ ■■ ■■■■■ ■ ■■ ■■■ ■■■■
└ 이미 마감된 의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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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되었다는데. 그런데 우리 둘이 같이 신청된 것 같아.”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채웠다. 미하일도 그 글자를 읽었던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들의 이름이 적힌 의뢰 E의 내용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마감되는 의뢰들에 다급한 마음만 앞섰던 탓이었다.
“하필 왜 저거야? ……그리고 타드폴리가 뭐지?”
“미하일, 꼬박꼬박 출석만 한다고 좋은 학생은 아니야. 수업을 들어야지.”
“또 무슨 약초의 이름이야?”
“아쉽게도 틀렸어. 바로 옆에 다섯 마리라고 되어 있잖아. 주로 호수에 서식하는 정령이라고.”
“……취소할 수는 없나?”
미하일은 신문 위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덮어 지워 보려 했으나, 마법의 힘으로 새겨진 그의 이름은 지워질 기미가 없었다.
“그래도 저 중에서 타드폴리 구하기 정도면 괜찮은 의뢰인 것 같은데.”
“난 마음에 안 들어. 의뢰자와 연락이 닿으면 바로 취소할래.”
“그러든지.”
아드리안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신문을 접어 협탁 위에 두었다. 드래곤으로서는 왕자가 없는 것이 훨씬 편했다. 바사미엘의 호수에 가서 드래곤의 이름으로 가볍게 요청한다면 타드폴리 다섯 마리 정도는 제 발로 찾아올 것이었다.
***
점심을 먹고 기숙사 방으로 돌아온 그들의 방문 틈에, 메모 하나가 꽂혀 있었다. 새벽 신문 배달과 같은 방식인 듯 보였다. 메모를 작성한 것은 ‘곧, 연락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던 의뢰자였다. 그 종이에는 적당한 시간과 장소가 적혀 있었다.
원래 이런 일에는 적어도 직접 만나서 취소 의사를 밝혀야 한다는 아드리안의 강한 주장에 미하일도 함께 중앙 정원으로 향했다. 미하일은 같이 갈 생각은 전혀 없었으나 아드리안이 왕족의 의무와 도리를 들먹이자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메모에는 바사미엘 본관 앞의 분수대가 적혀 있었다.
아드리안과 미하일은 먼저 그곳에 도착해 편하게 몸을 기대어 의뢰자를 기다렸다.
“안녕- 안녕하세요……?”
가볍게 중앙 정원으로 걸어 나왔던 아카데미 학생 한 명은 그를 기다리고 있는 왕자와 아드리안을 확인하고는 흠칫 몸을 굳혔다. 신문에 올린 사소한 의뢰를 왕족이 신청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만나기로 한 분이신 거죠…….”
“걱정 마. 난 취소할 거니까.”
새파랗게 질린 학생의 얼굴을 힐끔 바라본 후, 미하일은 먼저 선수를 쳤다.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 양쪽에게 나았다.
넥타이 색으로 보아 그들의 선배였는데, 그는 대놓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왕자에게 말했다.
“네, 의뢰 금액의 절반을 제게 보내시면 바로 취소됩니다.”
미하일이 심드렁하게 분수대에 기대 있는 채로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러니까…… 취소비가 있다는 말이군.”
수중에 틸론 한 푼 없는 왕자가 중얼거렸다.
“그게, 신문에 의뢰를 게재하는 비용 때문에 이런 제도가 있죠. 25틸론입니다.”
학생은 그 중얼거림에 빠르게 대답했다. 아드리안은 옆에 선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의뢰자가 무작정 손해를 떠안지 못하도록 체계적인 의뢰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얼떨결에 왕족에게 잔심부름을 시키게 된 학생이 얼른 왕자님의 신청을 취소하려 팔을 들어 올렸다. 눈앞의 아름다운 왕족의 주머니가 현재 지금 텅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미하일은 작게 이를 갈며 눈을 한번 크게 감았다가 다시 떴다.
“……언제까지 구해 오면 되지?”
예? 의뢰자는 왕자와 취소 계약을 진행하려 손바닥을 뻗으려다 눈을 크게 떴다. 의뢰를, 의뢰를 받으시려고요? 그의 바보 같은 목소리가 정원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