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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63화 (63/184)

63화

“화났어?”

아드리안은 앞서 걸어가던 미하일을 빠른 걸음으로 따라잡자마자 걸음 속도를 조금 늦췄다. 조금 전 에드윈 놀런의 이야기는 왕족에게 하기에는 엄청나게 예민한 주제였다.

미하일은 굳은 얼굴로 걸어가다 그 질문을 듣곤 피식 표정을 풀었다.

“알릭스가 저런 소리를 듣고도 가만히 있었다니 놀라울 뿐이야.”

“너랑 성격이 비슷한가 봐?”

붉은 눈동자가 힐끗 아무것도 모르는 평민을 향했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알릭스와 내가……? 왕위 계승에서 먼 막내 왕자인 이쪽과는 완전히 다르지.”

솔직히 미하일정도면 그 삭막한 왕가에서 가장 융통성 있는 왕족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예법에 집착하지 않았고, 무지에서 비롯된 무례한 행동 정도는 비웃으며 넘어갈 수 있었다. 물론 왕자의 비웃음은 마음에 상처를 주었으나, 다른 왕족의 가혹한 처사보다는 백배 나았다.

미하일은 그의 큰형인 알릭스의 비정한 성격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오만한 왕가의 성격을 가장 굳건하게 지킨 황태자로, 왕성의 하인 정도는 그날의 기분에 따라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죽여 버리는 것도 예사였다. 다행히 같은 왕가의 핏줄에게는 잔인한 성정을 굳이 보이지 않았는데, 이는 굳건한 왕위 계승권 때문이었지 절대 그의 성격 덕분은 아니었다.

알릭스도 아카데미를 다닐 적에는 마음이 약했나 보지-라는 낙관적인 생각을 하다 말고 미하일은 인상을 찡그렸다.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술에 취한 상태였거나 귀가 잠시 멀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왕자는 잠시간 옆에서 뚱한 표정으로 걷고 있는 금발 소년의 룸메이트가 ‘그’ 알릭스였다면 어땠을지 상상해 보았다. 아마 아드리안은 입학 첫날 목이 잘렸을 것이다. 알릭스는 작위 하나 없는 평민의 무례를 절대 참아 주지 않았다.

“그래? 그 정도야?”

“……네가 같이 방을 나눠 쓰고 있는 왕족이 나인 것을 감사해야 할 정도로.”

그 상상을 알 길이 없는 아드리안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예. 왕자 저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라고 빈정거렸다.

알릭스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저런 태도였다. 미하일은 알릭스의 예식용 칼이 아드리안의 흰 목 위에 올라가 있는 장면을 상상하곤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알릭스는 아카데미 기숙사의 2인 1실 교칙 따위는 무시하고 혼자 방을 사용했을 테지만.

그리고 어쨌든 두 사람 사이에는 영원히 만날 일 없는 신분의 벽이 있었다.

***

평화로운 바사미엘의 일주일이 지나고 다시 돌아온 행정학 수업이었다.

지난 일주일간 처음으로 결핍을 경험한 학생들이 교수가 흘리는 자금 관리법을 들으려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여러분 일주일간 어땠나요.”

행정학 교수 벤자민 윌슨이 그 초롱초롱한 눈망울 앞에서 씨익 미소 지었다. 교수의 미소에 학생들은 저마다 힘들었던 일들을 꺼내 놓았다. 누군가는 식당 메뉴에 대한 불편함을 이야기했고, 누군가는 바사미엘 잡화점에 대한 이야기를 해 댔다.

벤자민은 어린 학생들의 이야기를 몇 가지 들어 주다가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잦아들자 교단에 서서 입을 열었다.

“지난주에 왜 첫 자본금으로 10틸론이라는 금액을 나눠 주었는지 고민해 보라고 말씀드렸죠.”

그는 교단의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수업을 시작했다.

“그것에 대해선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잘 모르겠어요.”

강의실에 앉은 누군가가 대답했다. 아카데미에서 10틸론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가장 비싼 A 코스 두 번만 먹어도 사라지는 금액이었다.

“일주일간 온몸으로 경험하셨을 테니 오늘 정답을 알려 드리지요.”

학생들은 숨죽인 채 벤자민이 답을 말하기를 기다렸다.

“그 전에.”

아- 강의실에 앉은 학생들이 교수님의 의도된 딴청에 아쉬운 소리를 냈다. 벤자민은 예상했다는 듯이 그런 학생들을 주욱 둘러보다가 품 안에 넣어 놓은 작은 메모 조각을 꺼내 들었다.

“정답을 맞힌 학생이 있는지 확인해 볼까요?”

저 메모 조각에 정답자가 있는 모양이었다. “몇 명이나 맞혔나요?” 제일 앞줄에 앉은 열정적인 학생 하나가 교수에게 물었다. 정답자가 자신이길 기대하는 말투였다.

기대하고 있는 학생들 틈에서 아드리안과 미하일은 책상에 팔을 괸 채 관심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내 이름이 저기에 적혀 있을 리가 없지. 둘 다 각자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 보통은 아무도 없는데…… 올해는 특이하게 정답자가 나왔군요.”

교수는 주머니에 꽂혀 있던 작은 안경을 꺼내 들어 눈에 가볍게 끼웠다.

“어디 보자…… 아드리안 헤더.”

그러고는 손에 들고 있는 작은 종이 조각을 들여다보면서 위에 쓰여진 이름을 소리 내어 읽었다. 그 이름에 강의실에 앉은 학생들이 고개를 뒤쪽에 앉은 아드리안을 향해 돌렸다.

그러나 간만에 나온 정답자는 그 사실도 모른 채 턱을 괴고 있었다.

“아드리안 헤더? 없나요?”

벤자민이 종이를 내려다보며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아드리안의 바로 옆자리에 앉은 학생이 검지를 내밀어 가볍게 아드리안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응?” 아드리안은 그 손짓에 고개를 돌려 학생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깨를 두드렸던 검지를 곧바로 교단을 향해 움직였다.

“아드리안, 신문을 이미 구독했군요!”

“어…… 네, 그렇습니다만.”

드래곤은 금발 머리칼을 손바닥으로 살짝 헤집으며 교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에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조금 멋쩍었기도 했다.

“바사미엘의 교내 신문에는 어떤 정보들이 있었죠?”

아드리안은 입을 열려다 반대편 벽 쪽에 앉아 있는 미하일의 얼굴을 한번 확인했다. 신문을 구독한 지는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고, 그마저도 중요한 부분은 읽어 보지도 못했었다. 그러나 강의실의 모든 학생들과 교수의 눈동자가 이쪽을 향해 있으니 아는 한에서는 말하려 했다.

“우선…… 제일 앞 장에는 날씨에 대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뭐, 다 말하라고? 아드리안은 여전히 잘 듣고 있는 교수를 확인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뒷장에는 <이달의 바사미엘>이, 그리고 그 뒷장에는 <바사미엘 잡화점> 가장 마지막 장에는 <오늘의 의뢰>가 있었습니다.”

“좋아요. 아주 열심히 읽었군요.”

벤자민이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사미엘 교내 신문을 한 달간 구독하는 데에 필요한 금액이 바로 10틸론이랍니다. 참고로, 자본금이란 자산을 불릴 수 있는 사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보유하고 있는 가용 자금입니다.”

교수는 교단에 상체를 내밀어 강의실의 학생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마주 보았다.

“여러분들은 평화로운 바사미엘의 한 주를 보내곤 갑자기 틸론의 세계에 던져졌죠. 그런 상황에서 가장 추천드리는 것은 아무리 쓸모없어 보인다 해도, 정보가 하나로 모이는 지점을 찾고 확인해 보는 일이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자본금을 모두 사용하더라도 말입니다.”

아드리안은 뺨을 긁적이며 교수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교내 신문을 구독한 학생’으로 정답자를 선정한 겁니다. 정답을 맞힌 학생에게는 상품으로 일 개월 구독권을 선물하죠.”

벤자민은 꺼내 들었던 작은 종이 조각을 살짝 흔들어 학생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고 받아 가세요.”라고 말하며 그 종이를 교단에 툭, 하고 내려놓았다.

“그렇다고 모두가 신문을 구독할 필요는 없어요. 꼭 사전에 어떤 정보가 담겨 있는지 알아보고 구입하세요. 참고로 신문사를 제가 운영하는 것은 아니니 절대 광고가 아니랍니다.”

하하하, 교수의 농담에 학생들이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 저번 주 퀴즈에 대한 정답은 이렇게 알려 주었고, 이제 진짜 수업을 시작해 볼까요?”

교수는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본격적인 수업을 시작하려 교단에 내려 둔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정말로 행정학을 가르치려는 듯해 보였다.

아드리안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레어에만 해도 이 왕국을 구입할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규모의 보물과 동전들이 엉망으로 뒤엉켜 있었다. 아드리안은 관리하는 것이라면 이골이 나 있었다.

드래곤은 태어나서부터 모든 것을 제 손아귀 아래에 두는 존재였고, 그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저 인간이 가르쳐 주는 ‘자산 관리법’에 부디 그 비법이 포함되었기를 바라며 아드리안은 행정학 수업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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