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아드리안은 정령학 수업이 끝난 강의실 책상에 앉아 기지개를 켰다. 미하일도 상태는 비슷했다. 열심히 교내 신문을 읽은 탓이었다. 다른 학생들은 지난 주말의 외출이 즐거웠던지 반질반질한 얼굴로 밝게 웃으며 먼저 강의실을 나섰다.
터벅터벅 아드리안과 미하일이 마지막으로 강의실을 나가는 참이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둘의 발목을 잡았다.
“이런, 아드리안. 잠깐만 이리 와 보세요.”
연금술 수업의 교수 에드윈 놀런이었다. 이전에 오르디나스에 들어갔다고 칭찬을 들은 이후로, 연금학 교수를 피해 다니고 있던 아드리안은 그의 목소리에 순간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예?”
주위를 둘러보아도 교수가 부를 만한 사람은 아드리안과 미하일밖에 없었다.
에드윈의 주름진 눈가가 살풋 접혔다. 교수는 좁게 눈을 뜨고는 앞에 멈춰 서 있는 학생들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쭈욱 훑으며 턱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최근에…… 아주 특별한 공간에 다녀왔군요.”
“……예?”
“아주 미량이지만 고대의 마나가 느껴져요. 아아- 이런 표본을 보다니! 오늘은 운이 아주 좋네요.”
“……고대의 마나?”
킁킁, 아드리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팔목을 코에 가져다 대었다. 마나에 예민한 종족만이 느낄 수 있는 정도로 아주 옅은 샐러맨더의 마나였다. 대단한데? 골드 드래곤이 다른 쪽 팔을 코에 대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교수의 손이 아드리안의 팔목을 잡아챘다.
골드 드래곤은 당연히 그 움직임을 눈치채고 있었으나, 그 손길을 갑자기 피할 수는 없어 순순히 잡혀 주는 참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눈빛이 이쪽에 닿아 왔다. 아드리안의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가 힐끔 그 시선을 쫓았다. 그 시선은 미하일의 붉은 눈동자였다. 미하일의 눈빛은 교수가 아드리안의 교복에 관심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사라졌다.
에드윈은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하나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하려고 했던 행동을 계속 이어 했다. 그는 아드리안의 팔목을 잡고 있는 손의 반대편 손을 마저 들어 올렸다. 그의 손안에는 커다란 금속 가위가 들려 있었다.
“……교수님.”
주머니에 왜 저런 커다란 가위를 가지고 다녀.
아드리안이 힘 있는 목소리로 지금 이 상황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교수의 대답보다 그의 손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저…… 교수님?”
에드윈은 이미 아드리안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교복 안에 받쳐 입었던 옷의 단추가 교수가 손가락을 움직이자 툭, 떨어졌다. 그러고 보니 샐러맨더를 들어 올려 안았던 옷이었다. 아주 미량이었지만 그 때문에 샐러맨더의 마나가 소매 단추에 묻었을 것이었다.
마나의 흔적은 겨우 세탁에 씻겨 내려가는 얼룩 같은 것이 아니었다.
“도대체…… 어디를 다녀온 거죠?”
교수의 집요한 눈빛이 아드리안의 소매 단추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는 무척이나 세심하게 최소한의 가위질로 잘라 낸 것을 검지와 엄지로 집어 들었다.
아드리안과 미하일은 잠시간 서로의 눈빛을 확인하고는 교수의 질문에도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에드윈은 침묵하는 두 학생을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둘이 도통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자, 다시 단추에 집중했다.
“이건…… 최소 20틸론의 가치가 있겠네요.”
20틸론?
교내 신문을 두 달이나 읽어 볼 수 있는 금액이었다.
아드리안은 교수의 말에 번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빠르게 다른 쪽 소매를 내밀었다. 드래곤은 금전적 상황 판단이 아주 빨랐다.
“교수님, 여기서도 느껴지지 않나요?”
골드 드래곤의 눈이 아주 초롱초롱하게 반짝였다. 그리고는 옆에서 교수가 단추를 잘라 내는 꼴을 함께 보고 있었던 왕자에게 휙,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미하일의 교복에서도 고대의 마나가 느껴질 것이었다.
“……난 됐어.”
왕자는 그 눈빛을 알아채곤 틸론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차갑게 거절했다. 돈을 벌겠다고 입고 있는 옷을 가위로 자르다니 왕족이 하기에는 모양 빠지는 일이었다.
“미하일…… 알았어. 너 펠렌 디프스의 검이 필요 없구나?”
“…….”
왕자는 입을 꾹 다물었다. 에드윈은 두 학생을 휙휙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이걸 이번 주 안에 바사미엘 잡화점에 등록해 주세요.”
“아, 잡화점에요?”
“학생과 교수 간의 일반 거래는 금지되어 있으니 경매로 부칠 수밖에 없으니까요.”
아하, 골드 드래곤은 체계적인 아카데미 시스템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편하군요. 어차피 교수님만 이 단추가 필요하실 테니…….”
“무슨 소리.”
에드윈은 분통하다는 듯이 일갈하며 단추를 다시 아드리안에게 돌려주었다.
“이런 물건은 교수라면 한눈에 알아볼 만한 최상품이란 말입니다. 정령학이랑 마법학 실험실은 욕심만 많아서들, 아무리 봐도 연금술 실험에 딱인데…….”
드래곤 입장에선 높은 값을 쳐줄수록 좋은 일이었으므로 속으로 함박웃음을 지었다. 경매로 올리는 것이 수지에 맞았다.
아드리안은 교수가 잘라 낸 단추를 주머니에 챙겨 넣고 다시 교복 상의를 위에 걸쳤다. 그러자 가위로 단추를 잘라 내어 벌어졌던 소매가 가려졌다.
“교수님 그런데 바사미엘 잡화점에 등록은 어떻게 하나요?”
“응?”
에드윈은 아직도 그걸 모르냐는 표정을 짓고는 학생들의 넥타이를 확인했다. 아카데미에 오래 근무해 연도와 학생들의 학년에 둔한 것이 틀림없었다. 아드리안과 미하일의 넥타이는 아직 노란색으로 갓 입학한 일 학년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었다.
“……교내 신문은 신청했나요? 아니…… 아직 한 달도 안 되었으니, 어떻게 신청하는지도 모르겠군.”
에드윈은 관심 없는 주제인지 대충 뒷머리를 헝클어 댔다. 처음부터 설명하기에는 귀찮을 것 같기는 했다. 아드리안은 교수의 고민을 바로 해결해 주었다.
“아, 신문은 어제 막 신청했습니다.”
“오오! 그런가? 이야-”
요즘 애들은 역시 빠르구만! 에드윈은 호쾌하게 웃으며 아드리안의 등을 퍽퍽 두드렸다. 요즘 애들은 무슨- 윽, 아드리안은 교수가 등을 쳐 댈 때마다 눈가를 찌푸리며 짜증을 참아 냈다.
“교내 신문의 제일 마지막 페이지에 바사미엘 잡화점을 운영하는 클럽의 주소가 나와 있어요. 거기로 편지를 보내면 된답니다.”
에드윈은 물건을 경매에 올리는 방법을 설명해 주다가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이 아드리안 바로 옆에 서 있는 미하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은발에 붉은 눈동자, 왕가의 핏줄답게 아름다운 외모.
그는 그제서야 학생 둘 중 한 명이 그 ‘미하일 루스 이네하트’임을 알아챈 것이었다.
“그리고 왕자님, 아카데미에 계시는 동안에는 외출을 가급적 삼가는 걸 추천드립니다.”
뭐? 미하일은 갑작스런 연금술 교수의 걱정에 고개를 기울였다. 사교에 능한 교수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그런 그가 왕족을 걱정해 주는 저런 아부성 발언을 한다는 것이 이상했다.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그래서 왕자는 퉁명스레 입을 열었다. 물론 주말마다 훈련을 하느라 바쁘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처럼 외출을 자주 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굳이 하지 말라니까 반발심이 드는 것이었다.
“외출에 물론 아카데미 쪽에서도 보안을 각별히 신경 쓰긴 하지만…… 미하일 님의 피에는 특별한 것이 섞여 있지 않습니까.”
예민한 주제에 왕자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 눈빛에도 에드윈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천천히 왕자에게 조언을 이어 나갔다.
“비밀스레 열리는 암흑 시장에서는 왕족의 피를 최고의 상품으로 친다고 합니다.”
에드윈은 일반적인 교수라면 절대 왕족 앞에서 이야기하지 않을 주제를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꺼냈다. 당연하게도 미하일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그걸 사서 뭘 한다는 거지?”
“왕족의 피에 조금이라도 섞인 드래곤의 피를 추출해 보려는 실험들이 성행하고 있으니까요.”
“……그런 불법 실험은 왕국에서 엄격히 금지하고 있는 걸로 아는데.”
미하일의 붉은 눈동자가 여전히 침착한 에드윈의 얼굴을 훑었다.
“불법이긴 하지만…… 본래 모든 새로운 지식은 기존의 제약을 벗어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습니까. 아무튼 외출은 조심해서 나가야 합니다. 이미 아카데미를 졸업하신 알릭스 전하께서는 제 조언을 무시하시고 매주 주말마다 외출을 하셨지만 말입니다.“
미하일은 매우 불쾌한 얼굴을 한 채, 눈가를 찌푸렸다. 그놈에게도 조언을 하다니, 간도 크군.
아드리안은 옆에서 선 채, 미하일과 드래곤의 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교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진심으로 어린 왕족을 걱정하고 있었다. 미하일도 그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아드리안은 아무 말 없이 미하일의 반응을 살폈다.
“……학생의 주말 외출까지 걱정해 주다니. 바사미엘은 무척 섬세하시군요.”
귀족들의 화법으로는 ‘할 일 없냐? 말 다했지?’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왕자는 “그럼.”이라고 대화를 끊어 버리고 자리를 떴다.
멍청한 놈들. 여기 순도 백 퍼센트 드래곤의 피가 있는데. 이건 틸론으로 치면 얼마일까? 아드리안은 속으로 입맛을 다시며 왕자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