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그런데 명단 작성은 어디서 하는 거지?”
식사를 마친 후 테이블에서 일어서며 아드리안이 중얼거렸다. 당연하게도 미하일 역시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지금 둘은 아카데미 본관 건물을 정처 없이 떠돌고 있는 것이었다.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물어보려 했지만, 날씨 좋은 일요일 점심시간에 본관 건물을 걸어 다니고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아드리안과 미하일은 본관 일 층에 자리한 커다란 지도를 유심히 살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봐도 정직하게 <아카데미 교내 신문 안내소>라는 곳은 찾을 수 없었다.
“……주말이라 운영을 안 하는 건가.”
그럴지도 몰랐다. 이왕 마음먹은 김에 다 끝내 버리고 싶었던 아드리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주에 하지 뭐.”
어쩔 수 없지. 아드리안이 마지못해 포기하며 아카데미 본관을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두꺼운 책 몇 권을 쌓아 위태롭게 본관 건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어찌나 많은 책을 한 번에 옮기려고 하는지, 제일 위에 올라가 있는 책은 흔들거리며 아슬아슬하게 떨어지려고 했다. 그 학생이 본관에 올라오는 계단에 한 발짝 발을 올렸을 때였다.
가장 위에 놓인 책 한 권이 떨어지려는 참이었다.
“이런, 조심하세요.”
흰 손이 떨어지는 책 한 권을 빠르게 낚아챘다. <물속에서의 마나 움직임에 관련한 연구 Ⅱ> 무척이나 두꺼운 책이었다. 그것이 사라지자, 학생의 얼굴이 드러났다.
캐서린이었다.
“어, 안녕. 너희도 이렇게 좋은 날씨에 외출을 안 나갔네.”
“네, 여기요.”
아드리안은 잡아챈 책 한 권을 툭, 하고 캐서린이 들고 있는 책 더미 제일 위쪽에 올려 주었다. 뼛속까지 왕족에 기사도 정신이 새겨져 있는 미하일은 아드리안이 책을 나눠서 들어 줘야 하지 않냐고 제안하려다 귀찮아서 관두었다. 캐서린도 아드리안에게 그런 기사도 정신을 기대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고마워. 그럼 좋은 주말 보내.”
고개를 끄덕이며 캐서린이 뒤뚱거리며 스쳐 지나가는 것을 불안하게 지켜보던 아드리안이 갑자기 “아!” 하고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걸어가던 캐서린이 “응?” 하고 힘겹게 몸을 뒤로 돌렸다.
“왜? 무슨 일 있어?”
책 더미의 뒤에서 캐서린이 아드리안이 있었던 곳을 짐작해서 말을 걸었다.
“선배, 혹시 어디서 교내 신문 신청 명단을 작성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교내 신문? 아, 그건-”
그때, 아드리안의 흰 손이 캐서린의 책을 절반 덜어 들었다. 미하일의 시선이 가늘게 좁혀졌다. 편의와 이득에 따른 친절이라, 별로 좋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설명해 주시면, 제가 옮겨 드리면서 들을게요.”
캐서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드리안과 미하일에게 교내 신문을 구독하는 방법을 알려 주면서 본관 건물을 걸어갔다.
***
“여기라고?”
미하일이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하네.”
옆에 비치된 깃펜을 꺼내 들던 아드리안도 입을 열었다.
캐서린이 알려 준 곳은 아카데미 본관 건물 바로 옆에 붙은 시계탑이었다. 시계탑은 대강 십 층 높이의 탑이었는데, 그것은 마법으로 종을 쳤기 때문에 탑의 내부에는 계단이 없었다. 대리석으로 아름답게 조각된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 안에는 훤히 뚫린 채 높이 매달려 있는 커다란 종의 아랫부분이 보였다.
비어 있는 시계탑 일 층 벽에는 커다란 게시판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 바로 옆에 친절한 안내문도 있었다. 아드리안의 따뜻한 갈색 눈동자가 게시판을 쭈욱 훑었다.
“여기 이렇게 쓰여 있는 걸 보니 맞을 거야. ‘신청자의 이름을 쓸 것’, ‘반드시 틸론의 계약이 새겨진 오른쪽 손으로 작성할 것’.”
골드 드래곤은 오른손에 들고 있는 깃펜을 잉크에 적당히 담갔다.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미하일에게 오른손으로 쓰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듯이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시계탑 아래의 벽에 마련된 커다란 게시판 형태의 종이 보드에 멋들어진 필체로 이름을 써 내려갔다.
‘아드리안 헤더’
드래곤이 이름의 가장 마지막 철자를 깃펜으로 써 내려가자, 글을 쓰고 있는 손등의 틸론 문장이 금빛으로 살짝 반짝였다.
‘94틸론’
그가 가진 틸론이었다. 신문 구독 비용인 10틸론이 차감된 금액이었다.
“틸론은 가져갔어. 신청은 제대로 된 거겠지.”
아무리 봐도 고작 아카데미에서 쓰기에는 아까운 고급 마법이었다. 아드리안은 돈 많은 귀족들의 값비싼 자식 교육에 혀를 찼다.
***
모두가 잠든 새벽이었다.
똑똑똑,
노크 소리가 잠들어 적막에 잠긴 방 안을 깨우고는 스윽, 하는 소리가 잇달아 들렸다. 그에 잠귀 밝은 드래곤의 눈꺼풀이 천천히 열렸다. 아드리안은 빠르게 몸을 침대에서 일으켰다. 다행히 신문 신청은 정상적으로 된 것이었다.
골드 드래곤은 휙, 몸을 일으켜 빠르게 기숙사 방문으로 걸어갔다. 미하일은 그 움직임에 잠에서 깼는지 침대에서 잠시 눈을 떠서 확인하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신문이지?”
미하일이 몸을 뒤척이며 말했다. 아드리안은 방문 틈에 끼어 있는 종이 뭉치를 손가락으로 집어 들어 올렸다.
“응.”
마나의 흔적이 느껴졌다. 마법을 이용한 배송이었다. 방 한편에 매달려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여섯 시였다. 빠르기도 하지.
기숙사 중앙에 마련된 작은 협탁 위에 오늘의 교내 신문이 올려 두었다.
“우선 자고 일어나서 봐야겠다.”
드래곤은 새벽부터 일어나 신문을 읽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눈가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어두운 방 안을 걸어 다시 침대에 몸을 던졌다.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이 없어 조금 걱정되었으나 이제 이렇게 신문이 잘 오는 것을 확인했더니 고민거리가 사라졌다.
앞으로 몇 시간은 더 잘 수 있었다.
***
유리창을 통해서 밝은 햇빛이 아드리안의 눈을 따갑게 비췄다. 골드 드래곤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미하일은 아직 잠들어 있었다. 드래곤은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그가 새벽에 협탁에 올려 두었던 신문을 바라보았다.
과연 저 신문이 10틸론의 값을 할 것인지 확인해 볼 시간이었다.
흐음- 드래곤은 빳빳한 종이 신문을 들고 침대 가장자리에 몸을 걸터앉았다. 팔랑팔랑 신문 종이를 대강 넘기며 그 내용을 훑었다.
“오늘의 날씨 소식.”
이건 필요 없고, 아드리안이 웃으며 다음 장으로 신문을 넘겼다. 방 안의 인기척 때문인지 미하일이 눈을 떴다. 그는 건너편의 아드리안이 신문을 읽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곤 단번에 몸을 일으켰다.
“어때?”
“아직 읽어 보고 있어.”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미하일도 궁금했던지 천천히 방을 가로질러 아드리안의 침대로 걸어왔다.
“이달의 바사미엘.”
“그건 무슨 내용인데.”
“……이번 달에 있는 파티 일정이네.”
“넘겨.”
아드리안은 과감하게 종이 몇 장을 빠르게 넘겼다. 그래도 될 정도로 다양하고 자질구레한 정보들이 신문에 적혀 있었다.
팔락- 신문의 종이 세 장이 넘어갔다. 물건들의 이미지가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바사미엘 잡화점.”
“아카데미에서 구할 수 있는 물건들 목록인 것 같군.”
“틸론으로 구매할 수 있나 본데.”
나중에 필요할지도 모르지만, 지금 당장 필요한 정보는 아니었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였다. 아드리안은 신문을 덮으려다 그 페이지를 확인하고는 멈칫, 손가락을 멈추었다.
“이게 뭐지?”
아드리안이 어느 부분을 읽고 있자, 미하일의 눈동자도 그 부분으로 향했다. 왕자는 그가 읽고 있는 부분을 소리 내어 말했다.
“……오늘의 의뢰.”
신문의 그 부분은 어떤 리스트로 가득 차 있었다. 원래 텍스트가 있었던 자리에 누군가 페인트로 색칠하듯이 검은색으로 덮여 있고, 그 밑에 텍스트가 추가로 타이핑된 듯 보였다.
━━━━⊱ 오늘의 의뢰 ⊰━━━━
의뢰 A : ■■■■■■■ ■ ■■■■.
└ 이미 마감된 의뢰입니다.
의뢰 B : ■■ ■■■■■ ■■■ ■■.
└ 이미 마감된 의뢰입니다.
의뢰 C : ■ ■ ■■■ ■■ ■■■ ■■.
└ 이미 마감된 의뢰입니다.
의뢰 D : ■■■ ■■ ■■■■ ■■■■.
└ 이미 마감된 의뢰입니다.
의뢰 E : ■■■ ■■■■■ ■■■■■.
└ 이미 마감된 의뢰입니다.
의뢰 F : ■■■ ■ ■■■■ ■■ ■■■.
└ 이미 마감된 의뢰입니다.
━━━━⊱⋆⊰━━━━
“……의뢰?”
아드리안이 중얼거렸다.
‘이미 마감된 의뢰입니다.’라는 글은 뭐지? 드래곤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새벽에는 이 부분에 의뢰가 적혀 있었는데, 마감되어 검은색으로 덧칠되어진 건가? 드래곤의 검지손가락이 그 부분을 쓸어내렸다. 미약하게 마나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아드리안과 미하일은 머리를 맞대고 이 ‘의뢰’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토론했으나 수확은 없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내일은 신문을 받자마자 확인하기로 약속한 뒤 수업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의뢰라는 단어에서 무언가 쉽게 지나치기 힘든 틸론 냄새가 났다. 이 신문이 언제 배송이 되었더라? 이것으로 왜 모든 학생들이 각자 신문을 구독하는지 알게 되었다.
이 바사미엘의 교내 신문이라는 것은 받은 지 몇 시간 뒤에는 읽는 의미가 없었다.
“이제 늦잠 잘 일은 없겠네.”
골드 드래곤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내일은 새벽 여섯 시에 신문을 받자마자 펼쳐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