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아드리안 헤더의 입술 틈에서 즐거운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저벅저벅- 바사미엘의 중앙 정원 잔디를 걸어가는 발걸음 소리도 함께였다.
그의 품 안에는 무거울 정도로 다양한 크기의 화분이 한 아름 있었으나, 발걸음은 매우 가벼웠다. 카일 드바이시에게 양해를 구하고 온실에서 관리하고 있는 약초들 중 유독 예민한 것들만 골라서 가지고 오는 참이었다.
“바로 옆에 두고 관리하면 더 편하겠지.”
기숙사의 창문에 햇볕이 아주 잘 드니 온실보다는 훨씬 더 좋을 것이었다. 왕자가 어제 허락해 준 김에 그 말을 무르기 전에 빠르게 왕창 가져다 놓을 계획이었다. 달그락거리며 품 안에서 흔들리는 화분들이 뿌듯했다.
그리고 다행히 기숙사 방문을 열고 들어가도 미하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왕자는 자신의 침대에 걸터앉아 신난 듯이 콧노래를 부르며 화분을 내려놓고 있는 아드리안을 빤히 바라보는 중이었다. 분명 어제 편하게 사용하라 말하기는 했으나 창가에 잔뜩 늘어선 화분을 보니 제 말을 무르고 싶어졌다. 그러나 왕족이 되어 한번 이야기한 것을 하루 만에 손바닥 뒤집듯 엎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드리안은 마지막 화분을 조심스럽게 내려놓다가 미하일의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휙 돌렸다.
“보기 좋지?”
멋들어진 유리창 밖의 푸른 하늘에 평화롭게 늘어선 화분의 녹음이 어우러졌다. 실내에 두니 공기도 쾌적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미하일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넙죽 동의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냥 보기 좋기만 한 것들이 아니야. 제각기 다 효능이 있는 약초들이라고.”
드래곤은 아주 귀여운 것을 보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가장 마지막에 놔뒀던 식물의 잎사귀에 앉은 먼지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특히 이 약초는 잘만 키우면 며칠간 물을 마시지 않아도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열매를 맺지.”
그런 약초가 있어?
미하일은 마치 처음 들어 본다는 듯이 눈을 치켜떴다. 만약 그런 약초가 있었다면, 왕족인 미하일도 알 정도로 유명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아드리안의 손안에 있는 식물은 평범하게 생긴 잡초였다.
“거짓말.”
잎을 만지던 손가락을 부드럽게 떼어 내며 드래곤은 왕자의 붉은 눈동자를 마주 바라보았다.
“진짜야. 대신 방금 말했듯이 ‘잘’ 키워야 하지. 평범한 인간들은 거기까지 키워 낼 수 없거든.”
“평범한 인간?”
붉은 눈동자에 의문을 띄운 채 왕자가 고개를 기울였다. 또 저 이상한 말투였다.
“……넌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건가?”
미하일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알고 있는 정보 내에선 아드리안 헤더는 지나치게 훤한 낯과 오만한 자세를 제외하자면 이 바사미엘에서 가장 평범한 인간일 것이었다.
아드리안은 왕자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왕자의 붉은 눈동자가 드래곤을 꿰뚫어 볼 듯이 햇빛에 반사되었다.
댕- 댕-
아카데미 본관의 시계탑에서 때마침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아드리안은 그 종탑 소리에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미하일에게 말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 기분 좋으니 내가 살게.”
오르디나스에서 받은 틸론도 있으니 충분했다.
마침 배가 고팠던 미하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읽고 있던 검법서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
“어? 전하 아니십니까? 드디어 만나 뵙는군요.”
아카데미 식당에 들어선 아드리안과 미하일을 붙잡는 목소리가 있었다. 앞서 걸어가던 미하일이 익숙한 호칭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같은 아카데미 교복을 입은 남자였다. 붉은색의 넥타이를 보아하니 두 학년 위 선배였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을 품위 있게 뒤로 빗어 넘겨 올리브색 눈동자와 이마가 훤히 드러나 있었으며 입술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하일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곧바로 알아보았다.
카메론 해리스였다.
그들은 고등 교육을 담당하는 아카데미 입학하기 이전에 왕족과 귀족가의 자제들을 위해 왕국의 소양과 지식들을 배울 수 있는 학원에서 만났었다. 동갑이 아니라 수업을 같이 듣지는 않았지만 형님들과 함께 종종 어울리던 사이었다.
“그래. 바사미엘에서는 처음 보는군.”
미하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인사를 받았다. 그러고는 거슬렸던 부분을 지적했다.
“아카데미의 취지에 맞게, 편하게 부르는 것을 허락하지.”
“……이런 실례를. 제가 방금 전하라고 불렀군요. 혹시 그러면……?”
카메론은 미하일을 그에게 익숙한 전하가 아닌, 어떤 호칭을 선택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왕자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은발을 대강 정리하며 대답했다.
“미하일로 충분해.”
왕자는 그의 고민을 바로 해결해 주었다.
“아하, 그렇군요. 그리고-”
카메론은 미하일의 바로 옆에 멀뚱거리며 서 있는 아드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는 미하일과 엇비슷한 신장을 가진 커다란 남자였다. 얼굴값은 좀 하겠군. 비싼 향료로 관리한 것처럼 밝게 빛나고 있는 금발 머리와 날렵한 콧대, 턱선이 인상적이었다.
사교에 대한 상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귀족이나 왕족이었다면 지금쯤 자기소개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왕자의 옆에 서 있는 놈은 그럴 기색 하나 없이 대화를 듣기만 하고 있었다.
“……흠, 큼.”
카메론은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댄 채 헛기침을 작게 뱉었다. 아드리안은 그 의미를 알면서도 귀찮은 마음에 모르는 척하고 있었으나, 왕자와 카메론의 시선에는 그저 사교에 능하지 못한 한 명의 소시민처럼 보였다.
왕자의 붉은 눈동자가 흘끔 옆으로 움직였다. 돈이 많은 상단의 자제라고 하나 대대로 왕국의 주요 직책을 맡아 왔던 해리스가의 높은 기준을 평민이 맞추기 힘들 것이었다. 같은 수업을 듣던 비교적 낮은 계급의 귀족들을 차갑게 무시하며 평가해 대는 것을 즐겼던 카메론은 더욱 까다로웠다.
“먼저 들어가.”
왕자는 자신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아드리안에게 말했다.
아드리안은 곧바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아드리안은 “그럼 이만.”이라고 중얼거리며 아카데미 식당으로 먼저 걸어 들어갔다. 카메론은 당황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식당으로 먼저 걸어 들어가는 아드리안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잠시 후, 카메론이 당황한 듯이 중얼거렸다.
“……제게 소개해 주시지 않고요? 귀찮으시다면 직접 말해도 괜찮을 텐데.”
일반적으로 왕족과 귀족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기회는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을 영광이었다. 그리고 감히 귀족 앞에서 뻣뻣하게 상체를 세워 인사를 하려는 시늉도 하지 않은 남자에게 자신의 가문을 밝혀 찍어 누를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하고 말이다.
“흠, 나와 인사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나 보지?”
“아니,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카메론은 당황한 듯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마음 붙일 친구를 벌써 만나셨군요. 바사미엘의 생활은 왕성과는 많이 다르죠? 알릭스 전하께서 많이 걱정하셨는데 바로 편지를 드려야겠어요.”
그 알릭스가? 미하일은 매번 무심한 얼굴로 안부 인사나 해 오는 첫째 형님을 떠올리며 입술을 비죽 들어 올렸다. 카메론이 그 편지라는 것을 쓰기 전에 해 줘야 할 말이 있었다.
“……친구 아니야.”
“예?”
카메론이 고개를 기울였다.
“방금 저놈은 친구가 아니니 형님께 헛소리를 전하지 말라는 뜻이야.”
“……그렇습니까?”
“바사미엘에서 배정받은 룸메이트라 어울려 주고 있을 뿐이라고.”
흠, 카메론이 묘한 표정으로 손가락으로 뺨을 긁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수업도 같이 들으러 가고 사이좋게 식사를 하시러 오셨잖습니까.”
“…….”
미하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일반적으로는 그런 걸 ‘친구’라고 하는데요.”
카메론은 힐끔 아카데미 식당으로 먼저 들어간 금발 머리 남자를 확인했다.
“알릭스 전하께선 무척이나 기뻐하실 겁니다.”
흥, 그러든가 말든가. 미하일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홱 돌렸다. 오해하는 것은 자유였다.
“사실 소문이 빨라 이것저것 듣기는 했죠. 저 친구, 헤데라 상단 가문의 사람이잖아요.”
“……소문?”
“아카데미는 아주 좁고 심심한 곳이거든요.”
“갑자기 바사미엘에서 학비로 긁어 가는 골드가 매우 아까워졌어.”
카메론은 차갑게 대꾸하는 미하일을 향해 미소를 짓던 입술을 천천히 원상태로 움직였다. 미하일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것이 아니었다.
“전하, 아니 미하일.”
카메론은 답지 않게 얼굴을 잔뜩 굳히고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왕족이나 귀족은 그 핏줄과 가문의 계보가 굳건하여 신원을 의심할 필요가 없지만…… 친구를 사귀실 때에는 좀 더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겠습니다.”
귀족 특유의 오만하고 차가운 충고를 카메론이 이어 갔다.
“아무리 무역상을 운영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작위 하나 없는 평민에다 주력 가문과는 먼 친척이라니. 아무래도 졸업 후에도 유용할 친구가 좋지 않을까요? 제가 이번에 파티를-”
루스타바란 왕가의 피를 진하게 이어받은 미하일이 피처럼 붉은 눈동자를 카메론을 향해 천천히 들어 올렸다.
“다 했나?”
“예?”
멈칫, 카메론은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막내 왕자의 표정을 알아챈 후 몸을 굳혔다. 미하일은 멈춰 서 있던 발을 떼어 바로 옆에서 굳어 있는 카메론을 스쳐서 식당으로 걸어 들어갔다. 왕자는 마무리하는 인사조차 꺼내지 않았다. 카메론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먼저 자리를 뜨는 왕자에게 예의를 표했다.
무슨 말이 기분이 나쁘셨던 거지? 정작 이야기하고 싶었던 파티 초대는 말도 꺼내지 못했는데. 카메론은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왕자의 차가운 표정에 식은땀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