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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58화 (58/184)

58화

미하일이 깨끗한 물로 샤워를 마치고 욕실을 나와 탁, 하고 문을 닫았다. 왕자는 아카데미 욕실에 비치된 값비싼 샴푸 향기를 흘리며 젖은 머리칼을 털었다. 윽, 그러다가 타월에 쓸린 손바닥이 따가워 이따금씩 인상을 썼다.

간만에 따뜻한 물로 샤워할 수 있는 기회였다.

“여기로 와 봐.”

아드리안은 미하일이 욕실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테이블을 탁탁 두드렸다. 미하일은 우선은 건방진 언사에 미쳤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아드리안이 손가락으로 두드린 곳을 확인했다. 그곳에는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왕자가 산산조각 내놓은 화분 하나가 위풍당당하게 놓여 있었다.

“화분 이야기는 끝난 걸로 아는데?”

미하일은 입꼬리를 삐죽 들어 올렸다. 아드리안의 손가락 끝에 있는 깨졌던 부분을 아교로 접착시켜 놓은 화분은 왕자의 양심을 자극했다.

“뭐?”

아드리안은 미하일이 퉁명스럽게 뱉은 말에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곧이어 푸핫- 하고 가볍게 웃음을 뱉었다.

“이건 화분을 물어내라는 뜻이 아니야.”

그럴 거라면 예전에 보여 줬겠지- 아드리안은 가볍게 웃으며 책상 옆에 서 있는 왕자를 향해 손바닥을 흔들었다.

“손.”

아드리안이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한 자신의 흰 손바닥을 바로 앞에 서 있는 미하일의 상체에 불쑥 내밀었다. 미하일은 눈썹을 들어 올린 채 그 손바닥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손 줘 봐. 고쳐 주려는 거야. 갑자기 생긴 마나흔을 아카데미 치료실에 가서 어떻게 설명하게?”

의심을 지우지 않고 여전히 손을 건네주지 않는 왕자를 향해 아드리안이 다시 한번 말했다. 왕자는 그제야 주춤거리며 엉망이 된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러나 여전히 의심 가득한 표정이긴 했다.

아드리안은 군데군데에 상처가 벌어져 붉은 피를 흘리고 있는 미하일의 손바닥을 잠시간 내려다보더니, 그것의 손등을 받쳐 들고 얼굴에 가까이 가져갔다. 그러고는 후우- 하고 상처에 대고 바람을 불었다.

그 바람에 손바닥의 상처가 휘이익-하고 바람에 쓸려가듯이 밀려났다가, 언제 밀려났냐는 듯이 다시 손바닥의 중앙에 자리 잡아 왔다.

“마나흔이 확실하군.”

아드리안이 그 비상식적인 상처의 움직임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자신의 책상의 빈 곳을 향해 턱짓했다.

“잠시만 저기에 앉아.”

“…….”

미하일은 상처에 대해 뭔가 많이 알고 있어 보이는 아드리안의 말을 따를지 말지를 아주 잠깐동안 고민했다.

왕자는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가 끼이익- 하고 의자를 한 손으로 질질 끌고 걸어왔다. 그러고는 털썩- 하고 뚱한 표정으로 아드리안의 바로 옆에 앉았다.

“앉았어.”

“그래, 잘했다.”

아드리안은 엉망이 된 화분에 피어나 있는 이파리 몇 개를 손가락으로 끊어 냈다.

“네가 창문으로 던졌던 이 화분에 심어 놓은 건 ‘디에나’라고 해. 마나흔은 일반적인 약품으로는 치료할 수 없어. 상처에 들러붙은 마나를 다른 매개로 빨아들여야 하지.”

골드 드래곤은 의심 많은 왕자를 위해 대충 설명을 해 주면서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푸릇한 이파리 몇 개를 움푹한 볼에 던져 넣었다. 스윽- 기숙사에 챙겨 온 짐에서 필요한 몇 가지 기구들을 책상에 올려 두자 기숙사의 책상 위는 마치 연금술사의 간이 실험실처럼 변신했다.

“…….”

미하일은 그 광경을 옆에서 바라보며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었다. 드륵드륵 아드리안이 유리로 만들어진 막대기로 이파리를 짓이겼다. 그는 그 즙을 어떤 유리컵에 담고, 거기에 미리 따라 둔 깨끗한 물을 주르륵 부었다. 묘한 색의 초록빛 물에 이상한 이파리 덩어리들이 둥둥 떠다니는 모양새였다.

“……저걸 마셔야 하는 건 아니겠지?”

왕자의 중얼거림에 아드리안의 눈동자가 힐끔 움직였다.

치익- 성냥 하나를 그어 램프에 불을 붙였다. 그는 램프 위의 간이 걸이에 투명한 컵을 툭 올려놓았다.

“마시라고 하고 싶은데, 아쉽게도 아니야.”

유리컵 안의 물이 끓으며 초록 이파리들이 액체 안을 휘저으며 꿈틀거렸다. 그것들은 물이 끓는 움직임을 따라 힘없이 움직여 대다가 마치 물에 녹아내리는 가루처럼 점차 형태를 잃어 갔다.

초록빛을 띤 액체는 언제 색이 있었냐는 듯이 투명한 물로 변했다. 일렁거리며 움직이던 이파리 덩어리들은 형체조차 남지 않은 채였다.

그것이 기대한 반응인 듯 아드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책상 옆의 서랍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수많은 서랍들 중 무언가를 놔뒀던 칸을 찾는 움직임이었다. 아드리안의 손가락은 다섯 번째 칸에서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자신 있게 멈춰서 드륵- 서랍 칸을 열었다. 그가 그 칸에서 꺼낸 것은 둘둘 말린 천이었다.

골드 드래곤은 천을 조금 풀어 은빛 쇠 가위로 왕자의 손바닥 크기만큼 잘라 냈다. 인간의 손바닥은 두 개였으므로 천도 두 조각이었다. 시원하게 뻗은 손가락이 책상 서랍에서 핀셋 하나를 꺼냈다. 방금 잘라 낸 천 두 조각을 끓고 있는 투명한 디에나 원액에 푹 담그기 위해서였다.

투명한 액체였으므로 아드리안이 푹 젖은 천을 핀셋을 이용해 꺼내도 천은 여전히 흰색이었다. 저걸 상처 위에 올린다는 건가? 잠자코 아드리안이 하는 일을 바라보고 있던 왕자가 눈치 있게 손등을 책상에 대고 내밀었다. 아드리안은 그에 잘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뜨거울 때 올려야 해. 조금 아플 거야.”

“뭐, 그 정도-”

왕자가 허세를 부리다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윽, 고작 뜨거운 천을 손바닥에 대고 있는 고통이 아니었다. 방금 아드리안이 바람을 불어 상처를 움직였던 것처럼 손바닥을 가득 채운 화상을 누군가 쇠막대로 다시 지져 가며 상처를 벌리는 것 같았다.

젠장, ‘조금’? 이게 조금 아픈 거라고? 왕자는 눈앞의 룸메이트를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을 느꼈다. 왕자는 신음 소리를 내지 않고 그것을 목울대로 삼켜 냈다. 소름 끼치는 소리가 고개를 숙인 왕자의 입안에서 울려 퍼졌다.

아드리안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핀셋으로 천을 들어 올려 상처의 경과를 확인한 뒤 다시 상처를 덮었다.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마나흔이 치료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왕자는 여전히 상체를 숙인 채 손등을 책상에 올린 자세 그대로였다. 그의 손바닥 위의 흰 천이 천천히 아래쪽부터 위쪽으로 붉은빛으로 변해 갔다. 손바닥의 상처와 똑같은 모양이었다.

아드리안은 그것을 확인한 후 씨익- 크게 미소를 지었다.

“봐, 이제 사라졌지?”

아드리안이 붉게 변한 천을 핀셋으로 휙 걷어 내자, 왕자의 흰 손바닥이 훤히 드러났다. 그의 손바닥에 상처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를 정도였다.

미하일은 질끈 감았던 눈을 떠서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화상이라도 입은 듯 온통 붉게 피를 흘리던 손바닥이었다. 미하일은 한동안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내려보다 입술을 삐죽 움직였다.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마는 기색이었다.

아드리안은 그런 왕자를 내버려 둔 채 어느새 본격적인 공방 작업실처럼 어지러워진 책상을 정리했다. 깨끗한 천을 몇 번 접어 다시 서랍에 밀어 넣고, 유리컵 안에 담긴 액체는 다른 병에 옮겨 담아 꾸욱 코르크로 밀봉했다. 보관해 두면 아카데미를 다니는 동안 언제 또 유용하게 쓰일지도 몰랐다.

이파리 몇 장이 사라진 화분을 손에 집어 들고 유리창으로 걸어가던 참이었다.

……큼. 하고 왕자가 목을 가다듬는 소리를 냈다. 아드리안이 고개를 휙, 뒤로 돌리자 왕자는 여전히 자신의 손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왜? 뭐 어디 더 불편해?”

아드리안은 고개를 기울이며 왕자에게 물었다. 왕자는 눈가를 살짝 찌푸리며 목 뒤를 손바닥으로 거칠게 쓸었다. 그러다 겨우 입 밖으로 꺼낼 결심을 했던지 고개를 번뜩 들어 올렸다. 창가에 서서 왕자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아드리안의 눈동자와 왕자의 붉은 눈동자가 정면으로 마주했다.

왕자의 새초롬한 입술이 아주 작게 열렸다.

“……고맙다고.”

응? 아드리안은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멈칫 몸을 굳혔다가 입술을 비죽 올렸다.

“그래.”

골드 드래곤은 화분을 다시 창가에 내려 두었다. 방을 절반으로 나눴을 때, 아드리안의 영역에 해당되는 창가였다. 비록 커튼에 걸려 햇빛의 반 정도만 화분에 닿았지만, 이 정도면 괜찮았다.

“그리고 그쪽은 네놈 편한 대로 써.”

왕자는 훽, 고개를 돌리며 자신의 의자에서 일어났다. 끼이이익- 그러고는 의자를 원래의 위치에 끌어갔다.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아드리안은 충분히 알아들었음에도 실실 웃으며 못 알아들은 척 왕자에게 다시 물었다.

“……못 알아먹었으면 됐고.”

미하일의 밝은 은발이 짜증스레 흔들렸다. 아드리안은 왕자의 짜증에도 여유롭게 디에나 화분은 조금 옆으로 끌었다. 이제 따뜻한 햇빛을 받게 창문의 중간에 놔둘 수 있었다.

“무르기 없기다? 창가에 화분을 놔둬도 밀어서 떨어트리지 않겠다는 그 말.”

아드리안이 웃으며 창문을 바라보았다. 화분 열 개는 족히 놓을 수 있을 만한 길이었다.

“화분만.”

왕자는 의미심장하게 창가를 살피고 있는 아드리안을 향해 다시 한번 말했다. 아드리안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온실에 있는 약초 화분의 숫자를 마음속으로 세어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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