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골드 드래곤은 고개를 들어 언덕을 바라본 채로, 눈을 가늘게 좁혔다. 미하일을 둘러싼 커다란 마나가 내뿜는 빛 때문에 그쪽을 도저히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미하일 루스 이네하트의 붉은 눈동자가 천천히 빛을 잃기 시작하자, 모여들었던 마나가 그와 동시에 빠르게 흩어졌다. 마나의 움직임으로 휘날리던 왕자의 반짝이는 밝은 은발도 점차 가지런하게 내려앉았다.
스으으윽-
아드리안은 여전히 지하 동굴의 언덕 밑에서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뒷목이 서늘할 정도로 짙었던 순수한 마나가 순식간에 썰물처럼 왕자가 있는 언덕 중심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일반 마법사 백 명이 달려들어도 운용할 수 없는 마나의 양이 단 하나의 점을 향해 급속도로 압축된 상황이었다.
그 바람에 피부를 찌르듯이 사납게 요동치는 마나가 사라지면서 순식간에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어? 아드리안은 그것을 감지함과 동시에 지면에 못 박힌 듯 고정되어 있던 발을 떼 내었다.
“……정신 차려!”
드래곤은 이를 갈며 소리쳤다. 왕자의 눈에서 이채가 사라지면서 언덕에 꽂힌 검에서 손이 떨어졌다.
젠장. 언제까지 내 말을 무시할 건데. 아드리안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몇 걸음 만에 왕자의 곁으로 도착한 드래곤의 두 팔이 왕자의 몸을 낚아챘다. 왕자는 눈을 감은 채로 정신을 잃은 것처럼 드래곤의 팔에 몸을 추욱 늘어트렸다.
골드 드래곤은 품 안에 쓰러진 왕자의 몸통을 짜증스레 언덕 아래로 데려갔다. 비슷한 체격이라 만약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불가능했을 움직임이었으나 왕자가 기절한 상태라 드래곤은 마음 놓고 마법을 사용했다.
아드리안은 왕자의 흰 뺨을 바라보다가, 손등으로 툭툭 두드렸다.
하, 어린놈이 여태 말도 안 듣고 제멋대로 했다가, 결국 이렇게 정신도 제대로 못 차리고 있는 꼴이 제법 고소했다.
그때였다.
검은 마나가 꿀렁거리며 흘러나오던 낮은 언덕의 안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굉음이 울렸다.
쿠구구궁-
지하 동굴 내부의 용암 호수가 그 움직임에 크게 출렁거렸다. 호수의 가장자리에 있었던 아드리안이 발목까지 닿아 오려는 용암을 노려보면서 바깥쪽으로 왕자를 옮겼다. 그 바람에 몸이 흔들려 정신을 차렸는지 왕자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갔다.
“……뭐야.”
골드 드래곤은 건방진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왕자 놈을 어이없다는 듯이 내려다봤다.
“네가 갑자기 정신을 잃었었어.”
“뭐?”
미하일이 자신을 감싸 안은 아드리안의 팔을 억센 손으로 떨어트렸다. 아드리안은 왕자가 갑자기 품에서 몸을 뒤틀어 대자 가볍게 팔을 털어 품 안에 있는 인간을 털어 냈다. 그에 왕자는 제 발로 일어서면서 고개를 돌려 주위를 확인했다.
지하는 난장판이었다. 저 멀리 천천히 흐르고 있던 용암 호수는 지하 동굴을 다 잡아먹으려는 듯이 순식간에 밀려와 있었고, 샐러맨더들이 잘게 떨리는 지진을 버티며 불안해하는 소리가 동굴을 울리고 있었다.
“……뭐?”
재차 물어 오는 왕자의 목소리에 아드리안이 귀찮게 그만 물어보라는 듯이 고개를 대충 끄덕거렸다.
“네가 검을 언덕에 꽂자마자 이렇게 지진이-”
왕자는 ‘검’이라는 단어에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고개를 홱, 아래쪽으로 돌렸다. 내 검이라면 분명히…….
“샐러맨더가 검을 줬고…… 그걸 내 손으로 잡았는데…….”
미하일은 텅 비어 있는 두 손바닥을 펼치며 중얼거렸다. 윽, 그전까지는 전혀 느낌도 나지 않았으나 눈으로 확인하자마자 손바닥에서 불이 타오르는 것처럼 고통이 느껴졌다. 미하일은 화상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오른손을 몇 번 오므렸다가 폈다. 탁, 아드리안이 그 모습을 확인하고는 왕자의 팔목을 붙잡고 “그만해.”라고 말했다.
골드 드래곤은 눈을 찌푸리며 한쪽 발을 들어 올렸다. 검은 마나가 어느새 둘이 서 있는 곳까지 흘러내렸기 때문이다. 쿠구구궁- 다시 한번 지하 동굴이 좌우로 출렁거렸다.
“아, 더 바깥쪽으로 움직여야겠는데. 도대체 갑자기 왜 이랬어?”
“내가 뭘.”
“아까 말해 줬잖아. 저 언덕에-”
“……기억이 안 나. 진짜야. 내가 저기에 검을 꽂았다고? 어떻게?”
미하일이 중얼거렸다. 아직 검기 없이는 바위를 자를 수 없는 실력이었다.
“그리고 이 화상은 뭐지.”
손바닥 전체가 무언가에 덴 듯이 붉게 익어 있었다. 골드 드래곤은 그 상처를 힐끔 확인했다.
“……마나흔일 거다. 네 몸이 감당할 수 없는 마나를 만졌을 때 그런 상처가 생겨. 심한 건 아니니까 움직이지 마.”
지금은 고작 화상이 문제가 아니라고. 골드 드래곤이 어깨를 으쓱였다. 조금 전 마치 최상품의 루비가 불타오르듯이 빛나던 미하일의 두 눈동자가 드래곤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치이이익-
둘의 발밑에서 무언가 끓어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검은 마나가 언덕에서 흘러내려 와 붉은 용암과 닿은 것이었다. 짙은 어둠의 마나는 뜨거운 용암에 삼켜 들어가듯이 증기를 내뿜으며 천천히 용암 아래로 검은빛을 감췄다.
어느새 샐러맨더 몇 마리가 다가와 그 광경을 바라보며 주둥이를 열었다가 닫았다. 그리고는 앞발을 들어 올리며 꼬리를 흔들어 댔다. 마치 두 사람에게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처럼 소란을 피워 대는 것처럼 보였다.
“…….”
골드 드래곤은 잘게 떨리는 대지의 진동을 느끼며 조금 전 미하일이 검으로 내리쳤던 언덕을 응시했다.
쩌저적- 그 언덕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이 금이 하나둘씩 생기고 있었다. 그 틈에서 끈적한 검은 마나들이 줄줄 새어 나왔다.
쾅!
굉음이 울리며 금이 갈라지면서 커다란 틈이 입을 벌렸다.
다시 한번 크게 대지가 진동했다.
쿠구구궁-!
“……열어.”
골드 드래곤이 바닥의 샐러맨더를 향해 중얼거렸다. 샐러맨더 몇 마리가 난장판을 피우던 몸통을 멈추곤 까만 눈동자를 꿈뻑 깜빡였다. 이제야 알아챘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알았어, 이제 알겠다고. 골드 드래곤이 목울대를 울리며 샐러맨더들을 향해 더 단호하게 말했다.
“빨리 문 열어!”
그제야 샐러맨더들이 일제히 고개를 쳐들고 주둥이를 벌려 저마다 크고 작은 불꽃들을 뿜어냈다. 그것들은 어느 한곳으로 모여 커다란 불덩이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불덩어리 안에서 그들이 여기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생긴 철제문이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아드리안은 문손잡이를 빠르게 잡아채 문을 열어젖혔다.
그 문 너머에는 평화로운 숲속의 커다란 호수가 발아래에 펼쳐져 있었다.
“어서 돌아가자.”
아드리안이 다른 쪽에 시선을 빼앗긴 왕자를 불렀다.
“……하지만.”
미하일은 요동치고 있는 언덕 위에 있는 자신의 검을 아쉽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저걸 찾으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미하일이 문 바로 앞에서 머뭇거리자, 아드리안이 짜증스레 소리쳤다.
“지금 이 긴박한 순간에, 도헤니어산이 폭발할 시점에 저 검을 꼭 챙겨야겠어?”
그러고는 미하일의 멱살을 잡아챘다. 생각보다 억센 힘에 왕자는 어어-하면서 문 쪽으로 끌려갔다.
쾅-! 콰아아아앙-!
지하 동굴 밑을 뚫고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끼이익- 샐러맨더 몇 마리가 흥분해서 앞발을 흔들었다. 그들에게는 아마 축제일 것이었다.
쾅-!
하나둘씩 솟아난 불기둥은 어느샌가 지하 동굴 전체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투두둑- 그 바람에 커다란 돌조각과 바위가 쾅! 하고 바닥에 쉴 새 없이 떨어졌다.
도헤니어 화산 폭발이 머지않았다.
저 검은 마나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화산 폭발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금방 용암에 타 사라질 것이었다. 그리고 그걸 고작 어린 인간 한 명이 앞당겼고 말이다.
샐러맨더들은 지금으로부터 아주 미래에 태어난 미하일을 콕 집어 이곳으로 인도했다. 그리고 미하일은 드래곤도 알 수 없는 힘을 발휘하여 검을 휘둘렀다. 왕자 역시 그냥 평범한 인간은 아니겠지. 아드리안은 미하일을 문 쪽으로 한 번 더 세게 밀었다. 이 인간의 정체는 일단 이 상황을 벗어나서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문 건너편은 호수 바로 위였다. 문을 통해 돌아가려면 바로 호수에 떨어지는 것이었다.
“윽, 아니…… 잠깐만!”
“설명할 시간 같은 건 없어. 지금 당장 문 너머로 뛰어!”
“아, 밀지 마! 기다려 봐!”
“……뛰기 무서우면 내가-”
“……난, 나는 수영을 못 한다고!”
“…….”
그제야 왕자가 머뭇거렸던 이유를 알아낸 아드리안이 “내가 네놈 때문에 별짓을 다 하는 것 같아.”라고 중얼거렸다. 그는 상의에 있는 상자를 꺼내어 그 안의 염료를 왕자의 눈 밑에 슥 발라 주었다.
붉은 눈동자 아래에 대충 그린 파란 염료가 빛나자 마치 엘프족의 사냥꾼 같은 모양새였다.
“됐지?”
아드리안의 갈색빛 눈동자가 왕자의 붉은 눈동자와 완벽하게 마주했다. 저번처럼 아드리안의 눈동자 속에서 금색 마나 덩어리가 빛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드리안은 이마를 마주한 채로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손바닥으로 가볍게 왕자의 등을 문 너머로 밀었다.
으아아악!
왕자의 비명 소리가 들리다가, 풍덩! 하고 물소리가 청명하게 들렸다.
쾅! 쾅------! 촤아아아악-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도헤니어 화산이 용암을 뿜어냈다.
“그럼 안녕.”
골드 드래곤은 축제를 벌이고 있는 샐러맨더들을 향해 작별 인사를 하곤 문에 발을 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