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지금껏 본 검은색들보다 더 진한 어둠 속에서 다양한 색으로 빛나고 있는 마나 덩어리는 무언가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한동안 그 마나 덩어리를 바라보던 미하일의 입술이 무의식적으로 열렸다.
“……아름다워.”
골드 드래곤은 문득 옆에 있는 미하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왕자는 이 저릿한 마나의 근원에 서 있으면서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인간의 몸은 너무 둔하고 약해서 가끔 안쓰러워질 때도 있었으나, 이런 상황에서는 무척 편리해 보였다.
검은 마나에 정신 팔려 있는 미하일의 다리를 조금 전 추격전의 주인공이 매끄러운 꼬리로 툭, 밀쳤다.
“응?”
미하일은 그제야 왜 자신이 여기까지 뛰어왔는지 떠올렸다. 그는 자신이 붙들고 있는 샐러맨더를 잠시간 바라보았다. 맞아, 이놈이 내 검을 삼켰었잖아- 왕자는 생각했다.
“……이제 검은 어떻게 꺼내지?”
왕자는 커다란 샐러맨더의 몸통을 주욱 훑었다. 거의 악어만 한 크기의 파충류였고, 아직 저 배에 그 검이 있을 것이었다. 커다란 샐러맨더는 왕자의 불순한 눈빛을 알아차린 듯 허튼 생각하지 말라는 뜻으로 작게 불꽃을 뿜었다. 그러고는 주둥이를 크게 벌렸다.
케엑- 켁, 헥!
샐러맨더는 주둥이를 벌리고 무언가를 억지로 토하려는 듯이 목울대를 움직였다. 그렇게 샐러맨더의 커다란 입이 몇 번을 열렸다가 닫혔다.
미하일은 그 행동을 한눈에 알아차렸다. 왕자는 고통스러워하며 주둥이를 닫고 있는 샐러맨더의 몸통을 어색하게 두드려 주었다. 샐러맨더는 그 작은 응원에 용기를 냈는지 왕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샐러맨더는 새액- 새액 모자란 숨을 쉬다가 다시 한번 고개를 천장으로 쳐들어 주둥이를 벌렸다. 그러자 그 사이에서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검의 손잡이였다. 샐러맨더의 까만 눈동자가 왕자를 바라보았다. 애타는 눈빛이었다.
“좀 도와줘야겠는데?”
그 까만 눈동자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를 알아차린 골드 드래곤이 왕자에게 넌지시 말했다.
“내가? 이렇게……?”
그에 미하일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하며 천천히 손을 샐러맨더의 주둥이로 가져갔다. 아드리안은 그게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불의 정령은 저 정도로 쉽게 죽을 존재가 아니었다.
왕자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삐죽 튀어나온 검의 손잡이를 살짝 잡았다. 그러고는 약한 힘으로 잡아당기자, 검이 천천히 입 밖으로 빠져나왔다. 샐러맨더는 고개를 위로 쳐들어 미하일이 검을 잘 뽑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끄윽, 컥, 퉤!
샐러맨더는 걸리적거리는 것이 드디어 없어졌다는 듯이 고개를 양옆으로 뒤틀었다. 미하일은 결국 자신의 손으로 돌아온 이 검을 감동적인 표정으로 쓰다듬었다. 그동안 상한 곳이 없는지 손바닥으로 쓸어 확인하기도 했다.
그때였다.
왕자의 검을 뱉어 낸 샐러맨더가 두 사람을 바라보며 앞발을 크게 굴렀다. 쾅쾅- 지면을 두드리는 소리가 지하 동굴을 울렸다. 그 움직임에 지하 동굴 안에서 엎드리고 있었던 샐러맨더 무리가 고개를 스윽- 들어 이곳을 바라보았다.
아드리안은 그것을 바라보며 여전히 자신의 검을 확인하고 있는 왕자를 팔꿈치로 툭 쳤다.
퓌이익!
두 소년 바로 앞에 있는 커다란 샐러맨더가 마치 휘파람처럼 높은 소리를 냈다.
휘이익—!
그에 샐러맨더 한 마리가 마치 대답하듯이 고개를 쳐들고 높은 음역대의 소리를 냈다. 쿠구궁- 아드리안은 발밑에서 잘게 떨리는 지면을 느끼고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전까지는 드래곤이라도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아드리안과 미하일은 우선 눈썹을 찡그리며 양쪽 귀를 틀어막았다. 지하의 커다란 공간이 샐러맨더 무리의 높은 소리가 더 울려 커다란 굉음을 만들어 냈다.
지진 때문인지 지하 동굴의 언덕에서 울컥, 검은 마나가 뿜어져 내려왔다. 그것은 언덕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아드리안과 미하일의 발까지 미끄러져 흘러왔다.
쿠구구궁-!
윽, 좌우로 크게 몸이 흔들렸다. 아드리안은 지반이 흔들려 비틀거리자 오른쪽 발을 콱, 지면에 디뎌서 몸을 가까스로 지탱했다.
“여기 있다가는 위험하겠는데?”
아드리안이 왕자에게 말하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왕자의 대답이 없었다. 드래곤의 시선이 왕자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미하일의 표정이 이상했다.
“……응?”
붉은 왕자의 눈동자가 환하게 빛났다. 미하일은 드래곤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서 갑자기 발을 움직였다. 그가 향하는 곳은 검은 마나가 흘러 내려오고 있는 언덕이었다. 아드리안은 그의 목적지를 알아차리고는 왕자의 팔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미하일은 아드리안의 손을 가볍게 뿌리치고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어디 가게?”
아드리안은 점점 더 독해지는 마나에 눈을 찌푸리며 미하일을 말렸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언덕을 올라갔다. 마치 무엇인가가 왕자의 신체를 빼앗은 것처럼 표정에서 영혼을 찾을 수 없었다.
“거기는 위험해!”
아드리안이 미하일에게 소리쳤다. 젠장, 그새 귀가 멀었나.
“미하일! 내려오라니까!”
미하일은 뒤의 외침이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터벅터벅 어두운 마나가 흘러내리는 언덕을 걸어 올라갔다. 이렇게 땅이 흔들리고 있는데도 그의 발걸음에는 흔들림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이러다 진짜 죽겠는데? 아드리안은 주위의 샐러맨더들을 쭈욱- 돌아보았다. 지금 당장 폭발을 한다 해도 이놈들이야 괜찮을 것이다. 커다란 지진에 언덕 바로 옆에 있던 용암 호수도 그 자리에서 요동쳤다. 호수는 부글부글거리며 붉은 용암들이 이리저리 부딪히고, 크고 작은 불꽃이 일어났다.
윽-!
커다란 바람이 불었다. 아드리안이 있는 곳이 지하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런 바람이 부는 건 절대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 바람은 점점 더 거세졌다. 아드리안은 팔로 눈을 가리고는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는 미하일을 눈을 가늘게 좁혀 확인했다.
대량의 마나가 움직이면서 만들어진 바람이었다.
그를 중심으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마나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왕자의 밝은 은발이 그 휘몰아치는 바람에 요동쳤다. 미하일은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있었다.
“미하일 루스 이네하트!”
아드리안이 이를 악물고 그의 이름을 외쳤다. 왕자의 붉은 눈동자가 불타오르듯이 빛났다. 그가 검을 들고 있는 팔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윽, 아드리안이 몸 안에서 빠져나가려고 하는 마나를 가까스로 붙잡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젠장,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아드리안이 이를 악물고 더는 마나를 뺏기지 않으려 그 자리에 서서 버텼다. 왕자의 손바닥을 중심으로 엄청난 마나가 모여들었다.
쿠구궁-!
지진이 커다란 굉음을 내며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이 대지가 요동쳤다. 마치 금방이라도 도헤니어 화산이 폭발할 것 같았다.
폭발? 아드리안은 순간 멈칫 몸을 굳혔다.
도헤니어 화산 폭발의 원인은 지금껏 아무도 밝혀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지금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있었다.
이번 유희는 이렇게 여기서 끝나는 건가? 아드리안은 생각했다. 바사미엘 아카데미에서 한 학기도 보내지 못하고 끝나다니, 아쉬운걸.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해서 그 복잡한 서류와 신원 확인 절차를 통과하려고 힘들었었는데…… 그 모든 노력이…….
순간 왕자가 오른쪽 팔을 크게 들어 올렸다.
왕자가 들어 올린 검을 마나가 감싼 것이 이곳에서도 보였다. 검을 마나로 감싸는 것은 소드 마스터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미하일은 소드 마스터가 아닌데- 골드 드래곤은 그 자리에 서서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다.
취이익-!
아드리안의 옆에 있던 샐러맨더가 소리를 냈다. 안심하라고? 아드리안은 눈을 가늘게 좁혀 지하 동굴의 언덕 위에 올라간 미하일을 바라보았다. 샐러맨더는 절대 악의를 가지거나 생명을 해치려는 정령이 아니었다.
“그러면…….”
미하일의 손에 들린 검이 검기로 둘러싸여 어두운 동굴에서 밝게 빛나고 있었다. 골드 드래곤이 무언가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아- 하고 감탄사를 터뜨렸다. 지하 동굴의 모든 샐러맨더들이 언덕 위로 올라간 미하일을 경배하듯이 고개를 천천히 늘어뜨렸다. 골드 드래곤 또한 언덕 위의 인간에 시선을 사로잡혔다. 그의 주위로 환하게 빛나는 마나와 바람이 마치 무언가 위대한 존재를 세계가 보여 주고 있는 것 같았다.
드래곤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애초에 너희가 안내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미하일이었구나?”
드래곤이 아니라, 고작 인간이 필요한 일이었다고? 그러나 그 질문에 대답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왕자의 검이 밝게 빛나며 번개같이 움직였다.
미하일이 맑은 검기로 감싼 날카로운 검을 언덕 꼭대기에 찔러 넣은 것이었다. 언덕은 마치 푸딩처럼 단번에 커다란 틈을 내며 갈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