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그러면 우리가 그때 갔던 용암 호수가…….”
미하일은 터벅터벅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가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도헤니어 화산의 중심부였다고?”
그렇다니까. 아드리안은 이제 정신 차리라는 듯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새끼 샐러맨더는 아드리안의 품에 안겨 더 빨리 가고 싶은지 발버둥을 쳐 댔다.
“씁, 그러다 떨어져.”
아드리안은 샐러맨더의 몸통을 대강 쓰다듬으면서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러나 샐러맨더는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는지 뒷발을 자꾸 움직여 댔다. 아드리안은 잠시 동안 그 발길질을 참아 주다가, 혀를 차면서 이내 샐러맨더를 계단에 내려놓았다. 귀찮으니 그냥 알아서 내려가라는 뜻이었다.
새끼 샐러맨더에게는 조금 높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으나, 드래곤이 너무 어린 취급을 해 준 모양이었다. 샐러맨더는 아드리안이 자신을 계단에 내려놓자마자 짧은 네 다리로 빠르게 계단 아래로 뛰어갔다. 무척 익숙해 보이는 뜀박질이었다.
취익! 불을 작게 뿜으며 샐러맨더가 계단의 밑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 샐러맨더가 소리를 내자, 무언가가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다. 저벅저벅 작은 발바닥이 땅에 닿는 소리를 들어 보니 꽤 많은 개체 수였다.
“오.”
아드리안이 감탄사를 뱉었다.
“샐러맨더를 무리로 보는 건 진짜 오랜만인데.”
바사미엘 아카데미에서 본 샐러맨더 한 마리가 전부였던 미하일이 고개를 휙 돌려 아드리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드리안의 말은 가끔 어딘가 모르게 묘한 생각을 불러왔다. 방금 저 문장에서의 ‘오랜만’이라는 단어가 특히 그랬다. 정령학 수업에서 들었던 것처럼 정령의 존재는 이전에는 흔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 귀한 샐러맨더를 무리로 볼 수 있는 경험은 더욱 그랬다. 옆에서 빤히 바라보는 미하일의 시선을 느끼고는 아드리안이 슬쩍 웃으며 말했다.
“왜?”
“……아니, 표정이 이상해서.”
왕자는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중얼거리면서 홱 몸통을 돌렸다. 그는 그대로 아드리안보다 더 먼저 계단 아래로 걸어갔다.
표정이? 아드리안은 그대로 계단에 멈춰 서서 자신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방금 내가 무슨 표정을 지었더라? 골드 드래곤은 고개를 기울여 고민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평상시의 웃는 얼굴이었다.
골드 드래곤은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곤 천천히 왕자에게 걸어 내려갔다.
“와 저거-!”
미하일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 느릿느릿했던 발걸음이 갑자기 빨라졌다. 왕자가 저렇게 급박하게 부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드리안은 동굴 같은 지하에서 빠르게 다른 곳으로 뛰어가는 왕자를 따라잡아 물었다.
“무슨 일이야?”
“저것 봐!”
왕자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샐러맨더 한 마리가 평화롭게 자신의 비늘을 정리하고 있었다.
저게 뭐? 갑자기 왜 저래.
아드리안은 왕자가 가리키는 방향을 확인하고는 빠르게 걸어가던 발걸음을 곧바로 늦췄다. 눈치 빠른 미하일은 아드리안의 느려진 발을 확인하고는 짜증스레 대답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다 보였다.
“그때 그놈이잖아!”
아드리안은 미간을 긁적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왕자는 생각보다 기억력이 좋은 것 같았다. 아드리안은 바닥에서 따뜻한 용암 호수의 뜨끈함을 즐기며 태연하게 뒹굴고 있는 여러 마리의 샐러맨더를 뚱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확실해?”
다 비슷하게 생겼는데. 아드리안은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울컥 묘하게 억울한 마음이 솟구친 미하일이 하!-라고 짧게 한숨을 뱉었다.
저 자식이 내 눈을 안 믿어? 그는 빠르게 샐러맨더들을 헤치고 걸어가 놈을 잡으려 했다. 저벅저벅, 왕자의 발걸음 소리에 평화롭게 비늘을 정리하던 샐러맨더가 번뜩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자 샐러맨더의 까만 눈동자와 왕자의 붉은 눈동자가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 대치 상태를 유지한 채, 왕자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자아, 착하지…….”
그러고는 안심하라는 듯이 두 손을 들어 샐러맨더에게 손바닥을 보여 주고 있었다. 둘의 묘한 대치에 주위에서 뒹굴고 있던 다른 샐러맨더들도 그쪽을 빤히 응시했다. 순간 이 공간에 수많은 생명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적이 맴돌았다.
그때였다.
“푸흡, 그게 통할까?”
미안하지만 드래곤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동안 저놈과 지내면서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던 말투와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아드리안은 살짝 멀리 떨어진 채로 여전히 서로 바라보고 있는 샐러맨더와 왕자를 바라보았다.
“안 도와줄 거면…… 입 좀…… 다물어.”
미하일은 마치 복화술을 하듯이 최대한 입술을 크게 움직이지 않으면서 뒤에 서 있는 아드리안을 향해 힐끔 시선을 아주 잠깐 돌렸을 때였다.
스윽- 왕자가 지목한 샐러맨더가 몸통을 조용히 일으키더니 짧은 네 다리를 이용해 지면을 박찼다. 왕자의 집중력이 흐트러진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재빠르게 움직인 것이다.
“어, 도망간다.”
아드리안은 아주 친절하게 왕자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 말에 미하일은 빠르게 고개를 돌렸으나 이미 샐러맨더는 움직이고 있는 중이었다.
“야, 이-”
고급스러운 왕자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오려는 순간이었다. 미하일은 인상을 팍 쓰면서 그놈을 따라 뛰어갔다. 아드리안은 그들의 뒤에서 대충 뛰었다.
숲에서 느꼈던 것보다 더 순도 높은 마나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아니 이제는 지금 이 추격으로 그 진한 마나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아마 며칠 더 여기서 지낸다면 익숙해질 것이었다. 물론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갔을 때가 문제이긴 했으나, 그건 이후에 미루기로 결정했다.
도헤니어산의 지하 용암 호수는 거의 지상의 숲만큼 광활했다. 다리는 짧은 주제에 아주 빠르게 달려가는 샐러맨더에 왕자가 욕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 갓 태어난 새끼 샐러맨더의 느릿한 발걸음과는 차원이 달랐다.
헉, 허억.
얼결에 뜨거운 용암 호수 근처에서 원 없이 뜀박질을 하게 된 미하일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샐러맨더가 넓은 용암 호수를 향해 직진으로 도망쳤기 때문이다.
앞서 달려가고 있는 샐러맨더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인지 샐러맨더의 발이 점점 느려졌다. 덕분에 미하일이 샐러맨더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미하일이 가까스로 뻗은 커다란 손아귀에 파충류 특유의 서늘한 비늘이 닿았다.
“……잡았다!”
미하일이 크게 소리쳤다. 왕자가 커다란 샐러맨더의 꼬리를 붙잡자, 드디어 이 길었던 추격전을 끝났다. 아드리안이 왕자와 샐러맨더가 있는 곳으로 도착할 때였다. 왕자는 샐러맨더를 두 손으로 붙잡은 채, 어딘가를 응시하며 우뚝 서 있었다.
“왜?”
설렁설렁 걸어온 아드리안이 멈춰 있는 미하일에게 질문했다.
“저기…… 이상한 게.”
미하일의 손에 잡혀 있는 샐러맨더가 대답하듯이 취이익- 하고 작은 불꽃을 내뿜었다.
그곳에는.
억겁의 시간을 살아온 골드 드래곤조차도 처음 보는 것이 있었다. 용암 호수의 가장자리에는 낮은 언덕이 있었다. 겨우 그 정도라면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뭐야, 이건.”
검은색의 진한 마나였다.
언덕의 갈라진 틈에서 진하고 검은 액체가 불규칙적으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용암 호수의 가장자리에는 땅이 융기되어 마치 언덕처럼 솟아 있었다. 그 언덕의 꼭대기에서부터 시작된 것처럼 보이는 검은 마나는 바닥으로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냥 검은색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금껏 봐 온 것 중에서 가장 어두운 색이었다. 그 어둠 안에는 다양한 색으로 빛나는 마나 알갱이들이 불규칙적인 움직임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만지지 마.”
골드 드래곤은 이 마나들을 느끼지도 못하면서 옆에서 말리는 인간의 말을 무시했다. 드래곤은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그것에 손을 천천히 가져다 대었다.
윽, 드래곤은 순간 손가락 끝에 느껴지는 고통에 빠르게 손을 뒤로 잡아 빼냈다. 그러고는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샐러맨더를 확인했다.
그는 웬만한 마나에는 면역이 있었다. 그러나 저 검은 것은 그 허용 범위를 벗어났다. 아드리안은 아직까지 저릿한 고통이 느껴지는 손가락을 다른 손으로 스윽 감쌌다. 그 움직임을 옆의 샐러맨더가 여전히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샐러맨더도 드래곤 못지않게 맑은 존재였다. 이 도헤니어산 아래의 용암 호수는 샐러맨더 무리의 안락한 보금자리였다. 여기에 살고 있는 그들이 이 이상한 액체를 그동안 몰랐을 리가 없었다.
골드 드래곤은 그 생각이 들자마자 고개를 휙, 들어서 그들이 달려온 길을 확인했다. 그러고 나서야 이상한 점을 알아챘다.
샐러맨더 무리들이 뒹굴고 있는 곳은 이곳과 떨어진 계단과 가까운 공간이었다. 불을 이불 삼아 살고, 철을 주식으로 삼는 샐러맨더들이 뜨거운 용암 호수를 피해 있을 이유가 없었다. 정령들조차 감당할 수 없는 더 깊은 어둠이 용암 호수 근처에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로 안내한 거지? 너희들이.
이 정체 모를 검은 마나를 없애 달라고?
아드리안의 갈색 눈동자에 샐러맨더의 까만 눈망울이 비춰졌다. 끔뻑, 커다란 샐러맨더의 눈꺼풀이 한번 닫혔다가 이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