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샐러맨더는 몇 시간 동안 인간들을 안내하느라 힘들었던지 바로 옆에서 꼬리를 말고 눈을 꿈뻑이고 있었다. 낮잠을 잘 모양인가 보지. 골드 드래곤은 샐러맨더를 바라보다가 어느덧 아침을 건너뛴 지는 한참이고 점심을 먹을 시간도 한참 지났다는 것을 알아챘다.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네? 배는 안 고파?”
아드리안은 한동안 강물을 바라보다가 퍼뜩 옆의 왕자에게 물었다. 그동안 바로 옆에 왕자가 있다는 것을 까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별로.”
미하일은 나뭇가지에서 흔들리고 있는 교복 두 벌을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바람도 많이 불었고, 해가 저렇게 내리쬐니 아마 이제 거의 다 말랐을 것이다.
“너는?”
왕자는 나무에 걸려 펄럭거리는 교복을 확인하던 시선을 옆의 아드리안에게로 돌렸다.
“……나?”
음…… 골드 드래곤은 고민하는 척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왕자는 가끔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했는데, 드래곤은 그것이 깨나 성가셨다. 드래곤에게 공복이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왕자의 식사 시간에 맞추려 질문한 것인데 다시 그 질문이 돌아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나도…… 별로.”
그래서 미하일과 똑같은 것으로 대답했다.
아드리안의 고개는 여전히 흘러가는 강물에 멍하니 고정된 채였다. 그는 옷이 마를 동안 따뜻한 바위에 앉아 이렇게 조용히 강물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이따금씩 얼굴을 간질이는 상쾌한 바람도 기분 좋았고 말이다.
왕자는 옆에 앉아서 슬쩍 웃고 있는 아드리안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움직이기는 해야겠어. 어제 먹은 그 맛없는 감자는 사양이니.”
“그래? 그 정도였나.”
아드리안은 왕자의 퉁명스러운 투정에 고개를 기울였으나 이내 수긍했다. 이놈도 왕족이라는 것을 그새 또 잊고 있었다.
“근처에 먹을 만한 것들이 있나 둘러보고 올게.”
“그래.”
아드리안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
“이것 봐.”
미하일이 무척 뿌듯한 얼굴로 풀숲을 헤치며 간소하게 마련된 쉴 곳에 걸어왔다. 아드리안에게 불을 피울 준비를 맡기고는 사냥을 다녀오겠다고 말한 지 몇 시간 만이었다.
아드리안이 왕자가 없는 동안 손가락을 한번 휙, 움직이는 것만으로 몇 초 만에 준비를 끝낸 후였다. 골드 드래곤이 마법을 사용하자 주변에 금빛 마나 알갱이가 아름답게 반짝였다. 샐러맨더는 옆에서 잠들어 있다가 그 금빛 알갱이에 코가 간지러웠는지 엣취- 하고 기침을 했다. 아드리안은 그것을 바라보곤 무심하게 허공에 손바닥을 휘적여 마나 알갱이들을 날려 주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던 아드리안은 왕자가 돌아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그의 품 안에는 커다란 사슴 한 마리가 마법으로 네발이 묶여 있었다. 사슴은 간간이 몸부림을 치려 애썼지만 발이 모두 묶인 터라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흐음-
드래곤은 팔짱을 낀 채 건장한 왕자의 품 안에 들린 사슴을 바라보았다. 사슴의 올망졸망한 눈동자가 드래곤의 무심한 눈동자에 비쳤다.
왕자는 조용히 숨 쉬고 있는 사슴을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퍼뜩 사슴이 몇 번 기다란 목을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그러나 발이 묶여 있기 때문에 사슴이 할 수 있는 저항은 그것이 전부였다.
골드 드래곤은 천천히 바닥에 무릎을 대고 꿇어앉아 왕자를 바라보았다.
“줘 봐.”
아드리안의 깨끗하고 흰 손이 왕자의 몸통 바로 앞으로 스윽 뻗어졌다.
“……뭘?”
미하일은 한동안 곧고 흰 아드리안의 손가락을 바라보다가 질문했다. 사슴을 보다가 갑자기 내밀어진 손바닥이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왕가의 단검.”
“…….”
미하일의 표정이 미묘하게 틀어졌다. 저 한마디에 한 달을 함께 방을 써 왔던 저놈이 무척이나 의심스러워졌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골드 드래곤은 오랜 유희로 거짓말이라면 굳이 머릿속으로 진실 여부를 고민하지 않아도 술술 입 밖으로 꺼냈고, 대부분 납득 가능할 만한 말들이었다.
“헤데라 상단은 그런 마법 물품들을 자주 취급해. 왕가의 주문은 좀 더 주의해서 관리하지. 가끔씩 상단 교육을 해 줄 때면 제일 먼저 알려 주는 게 그 장부거든.”
상단들은 왕가의 사소한 전통까지 알고 있는 건가? 하지만 지금 그 사실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기보다 급한 것이 있었다. 둘 사이에는 측은하게 떨며 신음하고 있는 연약한 사슴이 있었다.
왕자는 미심쩍은 표정만은 지우지 못한 채 팔목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그 움직임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아드리안에게 눈빛으로 경고했다.
“……지금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보여 주겠지만, 원래라면 보여 주는 건 금기 사항이야.”
“그래.”
아드리안은 빨리 꺼내기나 하라는 듯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스윽- 왕자가 팔목에 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무언가 속삭였다. 마법 시전어였다. 그러고는 엄지와 중지를 사용해서 무언가를 천천히 팔목에서 뽑아냈다.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이자 작은 단도 하나가 빛을 뿜으며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루스타바란 왕가의 단검이었다. 유사시에 호신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수단으로 왕가에서 태어난 어린아이라면 필수로 받게 되는 마도구였다.
미하일은 그 귀한 마도구를 깃펜 하나 빌려 달라는 듯이 성의 없게 손바닥을 뻗고 있는 아드리안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그는 그 손바닥을 무시하면서 바닥으로 상체를 굽혀 한마디 했다.
“내가 할게.”
“다듬을 줄은 알고?”
미하일은 고개를 작게 끄덕거렸다. 평소 자신감 넘치는 태도와는 무척 다른 자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잡은 동물을 죽이고 먹을 수 있는 부위를 다듬는 일이었다. 왕자는 기사 훈련에서 몇 번 어깨너머로 봤었다. 아무리 훈련이라 해도 왕자에게 사슴을 도축하는 일까지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미하일은 지금 이 숲에서 누군가 사슴을 도축해야 한다면 당연히 자신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낑…… 끙…….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슴이 앞발을 몇 번 허우적거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아드리안의 무감각한 갈색 눈동자가 그런 사슴의 앞다리와 표정에 닿았다.
미하일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고는 가지고 있는 단도를 높게 쳐들었다가, 확 내리꽂을……려다 몸을 굳혔다.
그러면 그렇지. 한 번도 죽여 본 적이 없군.
바로 옆에서 팔짱을 낀 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아드리안이 입을 열었다.
“비켜. 넌 저기 가서 땔감이나 더 가져와.”
눈높이가 비슷한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아드리안은 툭, 왕자의 어깨에 손을 올려 힘을 줘 옆으로 밀어냈다. 그 와중에도 사슴은 발치에서 발버둥 치고 있었다.
“뭐? 내가 할 수-”
아드리안은 좀처럼 발걸음을 떼지 않으려는 왕자의 등을 더 세게 턱! 두 손바닥으로 밀쳤다.
“어설프게 도우려 하지 말고 가.”
미하일은 단호하게 자신을 밀어내는 아드리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바닥의 사슴도.
“…….”
“어서.”
왕자는 입을 다시 열려다가 눈가를 찡그리며 뒷목을 쓸어내렸다. 짜증 나지만 저놈의 말이 맞았다.
그제야 미하일은 더 깊은 숲으로 머뭇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아드리안은 한동안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슴을 바라보며 풀 위에 앉아 있었다. 드디어 왕자가 적당히 멀어지자, 골드 드래곤의 입이 열렸다. 하필 그 많은 생명체 중에 너라니.
“운이 나쁘구나.”
사슴은 고귀한 골드 드래곤의 자애로운 음성에 잘게 떨며 애처롭게 끼잉- 하고 울었다. 하지만 왕자의 손에 사로잡힌 이상 사슴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었다. 골드 드래곤은 사슴을 향해 안타깝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이런…… 다시 돌려보내 줄 수는 없어.”
아드리안은 희고 상처 하나 없는 매끄러운 손으로 떨고 있는 사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어느새 사슴의 이마에서 그 손바닥이 멈췄다.
“대신 고통 없이 보내 주지.”
골드 드래곤의 입에서 무언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가 흘러나왔다.
드래곤이 사슴의 이마에서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 내자 그의 손가락 끝에서 밝은 빛 덩어리가 이끌려 나오듯이 따라 나왔다. 손가락 전부가 떨어지자 드래곤의 손바닥 안에 밝게 숨 쉬는 빛이 가득 찼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바닥에서 조용히 숨 쉬던 사슴의 움직임이 멎었다.
“수고했다.”
골드 드래곤은 여전히 자신을 향해 있는 까만 눈망울을 손바닥으로 쓸어 천천히 감겨 주었다. 그는 손바닥을 허공에 움직여 빛 덩어리를 공중으로 날려 보냈다. 다음 생을 살아갈 신체를 찾기 전까지 사슴의 영혼은 이렇게 허공을 맴돌 것이다.
드래곤은 한동안 하늘의 빛 덩어리를 바라보다가, 곧이어 왕자의 식사를 위해 고깃덩어리만 남은 사슴을 왕자의 단검으로 조각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