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도헤니어 화산 폭발은 보통의 활화산들과는 다른 특이한 경우였다.
골드 드래곤이 하늘에 높게 떠올라 발밑의 산을 내려보았다. 사실 그것은 산이라기보다 지금은 용암 언덕이라 부르는 것이 맞았다.
쿠궁- 턱!
붉은 화염이 산 전체를 태우고, 삼켰다. 산을 보금자리로 삼고 있었던 동물들이 삽시간에 생명을 잃으며 비명을 질러 댔다. 특히 다른 동물들과 달리 그 자리를 떠날 수 없는 식물들의 비명 소리가 귀를 찔러 댔다. 다른 생명체는 들을 수 없는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해 오던 식물들은 마치 자신들의 머리 위에서 담담하게 바라보고만 있는 드래곤이 들으라는 듯 찢어질 듯한 소음을 만들어 냈다.
드래곤은 화산의 폭발이 시작되는 부분부터 지금까지 바로 위에서 지켜보았다. 드래곤의 소름 끼치게 아름다운 얼굴은 조금 구겨져 있었다. 이 폭발이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폭발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죽어 나가는 생명체들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억겁의 시간을 살아왔다.
이 커다란 산만큼은 평생 그대로일 거라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이 커다랗고 울창한 도헤니어산만큼은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이 숲 바깥의 인간들이 성을 허물고, 허구한 날 새로운 왕조를 세워 대는 것과는 다르게 이 산은 언제나 푸르고 울창한 숲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도헤니어산은 드래곤이 이 대륙에서 좋아하는 몇 안 되는 장소였다. 가끔씩 도헤니어산이 생각날 때마다 드래곤은 가볍게 휙, 날아왔다. 이 산이 주는 느낌은 인간들이 사는 도시와는 전혀 달랐다.
도헤니어산만큼은 인간들이 끊임없이 뜯어고치고, 바꿀 수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 거대한 산만큼은 영원히 그 모습일 것이라 여겼다. 골드 드래곤의 눈썹이 몇 번 찌푸려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지금 느껴지는 이 감정에 대해 입 밖으로 꺼내기 위해서는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남자의 아름다운 입술이 조금 떨리다가 결국 결론을 뱉어 냈다.
“……이건.”
그 입술에서 골드 드래곤의 청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골드 드래곤은 그제야 이 불쾌감의 근원을 알아챘다. 그래서 다시 한번 더 스스로에게 되뇌듯이 속삭였다.
“배신감이군.”
그 이후로 드래곤이 도헤니어산을 찾은 적은 없었다.
***
“도헤니어산이라면, 몇백 년 전에 폭발했던 그?”
미하일이 자신이 읽은 글자가 맞는지 확인하려 중얼거렸다. 아드리안의 표정도 자신 못지않게 놀란 눈치였다.
“…도헤니어 화산…….”
아드리안은 눈을 가늘게 좁혀 조각상 옆의 숲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어쩐지 낯익은 숲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워낙 숲과 산의 모양은 거기서 거기라 정확한 위치를 몰랐었다. 도헤니어산이었다니!
“활화산처럼은 안 보이는데. 아직은 괜찮겠지.”
“가끔 도가 지나칠 정도로 긍정적이야. 그게 아니라면 그냥 생각하기 귀찮은 거든가.”
“후자라고 생각해.”
아드리안이 별것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손에 들고 있는 젖은 옷 뭉치들을 바위 위에 툭 올렸다. 따뜻한 햇볕이 계속 내리쬐고 있어서 그런지 바위는 따끈하게 데워져 있었다.
골드 드래곤은 젖은 교복 뭉치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맨몸에 바람이 닿았다. 젖은 옷을 빨리 말려야지. 드래곤은 이렇게 서민적인 활동을 직접 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런 일을 할 때면 뿌듯함이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탁-! 탁!
골드 드래곤은 젖은 교복 상의를 공중에 몇 번 털어 낸 후 주름이 없도록 펴서 나뭇가지에 가지런히 널었다. 그런데, 아드리안은 옆의 바위에 당당하게 앉아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미하일을 빤히 바라보았다.
“…….”
남은 옷에 손을 대려다가 골드 드래곤은 고개를 기울였다.
“왜…….”
왕자는 왜 멈추냐는 표정으로 바위에 등을 기댔다.
“왜 내가 네 옷도 널고 있지?”
“그건 당연히, 네가 키우고 있는 샐러맨더가 친 사고니까 그렇지.”
취이익!
왕자의 비난에 같은 바위에 앉아 인간들을 바라보고만 있던 새끼 샐러맨더가 불을 뿜었다. 그러고는 날카로운 이빨도 없는 입으로 왕자의 손을 콱, 물었다. 미하일은 그것에 “아, 왜 이래.”라고 말하며 손바닥을 흔들어 댔다. 새끼 샐러맨더는 몸통을 멋대로 두드려 대는 미하일의 손바닥을 노려보며 슬쩍슬쩍 눈치를 봤다.
“정령은 키울 수 있는 생명체가 아니라니까. 너 그러다가 정령학 수업 낙제한다?”
골드 드래곤은 어쩔 수 없이 왕자의 것까지 옷을 널었다. 그러자 아카데미 교복 두 벌이 나뭇가지에 가지런히 널린 모양새가 완성되었다. 가끔씩 숲의 나무들이 흔들리면서 청량한 바람이 불어올 때면 교복이 살짝씩 흔들리면서 나부꼈다.
그러고 보니,
마법만 쓰면 이 정도쯤이야 금방 말릴 수 있는데. 아드리안은 갑자기 떠오르는 묘안에 윗옷을 벗은 채로 뒤에 서 있는 왕자를 바라보았다.
“저거 마법으로 말리면 빠르지 않을까?”
“…….”
왕자는 말도 안 되는 말을 들었다는 듯이 인상을 팍 구겼다.
“내가 그런 마법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빨랫감을 말리는 마법?”
감히 왕족에게 사소한 노동에 대한 마법을 가르칠 수 있는 마법사는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왕자가 말하는 것처럼 ‘빨랫감을 말리는 마법’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마 왕자가 배웠을 유서 깊은 원소 마법들의 조합으로 모든 일들을 할 수 있었다.
“왜 있잖아. 온도 마법과 바람 마법을 약간만-”
미하일의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거기까지만 하라는 시선이었다. 아드리안은 열었던 입을 다물고 다시 옷을 툭툭 털었다.
“참나, 고귀하신 마법사이십니다.”
아드리안은 입술을 살짝 밀어 올려 비웃었다. 말을 말자. 골드 드래곤은 털썩하고 왕자가 기대 있는 커다란 바위에 등을 가져다 댔다. 바지는 푹 젖지 않아 그런지 어느샌가 조금 마른 것 같았다.
평화로운 숲속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만 들렸다. 미하일이 그 평화로움을 갑자기 깨트리기 전까지 두 사람은 따뜻한 오후의 숲의 강물 옆에서 졸졸졸 흐르는 맑은 물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여기에 도착한 이후로 하루가 지났다. 어제야 얼떨결에 야영하긴 했지만 왕자는 이렇게 앉아 하늘을 바라보자 문득 불안해졌다.
“지금쯤 마법학 수업이 시작되었겠군.”
딱히 마법학 수업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 사실을 미하일은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벌써 수업에 이틀째 빠지고 있는데 우리를 찾고 있겠지?”
미하일이 따뜻한 바위에 앉아 절벽에 등을 기댄 채 꺼낸 말이었다. 아드리안은 그 말에 감았던 눈을 슬쩍 떠서 힐끔 옆을 확인했다. 수업에 들어가면 다인 줄 아나. 수업을 열심히 듣는 모범생도 아니면서 웬 걱정이지? 그러고 보니 왕자는 그의 무심한 수업 태도와는 무관하게 출석은 꼬박꼬박 열심히 하긴 했었다.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아드리안의 입술이 열렸다.
“이틀하고도…… 아마 네 시간 더 지났어.”
“뭐, 벌써?”
골드 드래곤은 의심하는 것처럼 들리는 반응에 눈을 완전히 떴다. 그러고는 하늘로 팔을 뻗어 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옆에 앉아 있는 왕자에게 그림자의 방향과 해의 방향에 대해 설명하려는 찰나였다.
“해가 저 높이에-”
“……지금 내가 시간 보는 방법을 궁금해하는 것 같아?”
미하일이 짜증스레 대꾸하며 헝클어진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언제나 그랬듯이 불쾌한 표정도, 화난 표정도 아닌 무표정으로 얼굴을 맞대어 왔다.
“지금 이틀째 돌아가는 방법을 못 찾고 있어……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갈 수 있을까?”
왕자는 초조한 듯이 한숨을 내쉬며 이를 악다물었다.
“걱정하지마.”
단호한 목소리였다.
“위험한 때에는 내가 나설 테니.”
왕자가 그 대답에 고개를 들어 올리자 아드리안과 정면으로 마주 보게 되어 갈색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갈색 눈동자는 무척 평범한 색으로 루스타바란 왕국민 중 열에 아홉이 저 색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가끔씩 저 눈동자 속에서 금색 빛의 알갱이들이 보였다. 그것들은 반짝거리며 아드리안의 금발처럼 스스로 움직였다. 바로 지금처럼.
미하일은 멍하니 아드리안의 눈동자 속을 바라보다가 주춤거리며 입을 열었다.
“……네가 뭘 할 수 있다고? 식물밖에 모르는 주제에. 차라리 내가 나서면 나섰지.”
어이없네. 미하일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순간 아드리안이 무척이나 믿음직스러워 보였던 스스로가 웃겼기 때문이다. 왕자의 반응에 아드리안은 “아, 그렇긴 해.”라고 말하며 특유의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