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일어나. 아침이야.”
아드리안 헤더의 나직한 목소리에 미하일 루스 이네하트는 눈을 떴다. 미하일은 일어나자마자 눈동자에 들어오는 밝은 빛에 눈을 잔뜩 찌푸렸다. 윽, 벌써 아침인가? 왕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찡그린 눈가를 손바닥으로 매만졌다.
“……왜.”
미하일의 입술이 열렸다. 그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낮았다. 밤새 한 번도 깨지 않고 죽은 것처럼 잘 잤기 때문이다.
“왜 안 깨웠어? 불침번은 돌아가면서 서기로 했잖아.”
“깨어 있다 보니 잠이 안 와서. 괜찮아.”
왕자는 아드리안의 대답에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숙면을 취하긴 했지만 약속했던 일을 저쪽 마음대로 바꾼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자는 밤새 피웠던 모닥불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밤새 불은 안 꺼지고-”
미하일의 말이 중간에서 끊겼다. 아드리안이 예상했던 바였다. 왕자는 모닥불을 보고 있는 시선을 떼지 않으면서 자신의 허리춤에 손을 천천히 가져갔다. 그의 손이 허리춤을 탁, 하고 두드렸으나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미하일은 인상을 찡그리며 손을 움직이다, 그제야 항상 가지고 다니던 검은 이제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저건.”
미하일이 이미 일어난 채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아드리안에게 눈짓했다.
불타고 있는 모닥불 한가운데를 붉은 덩어리가 몸을 둥글게 말아 깔고 앉아 있었다. 그것은 자신을 응시하는 왕자를 빤히 바라보며 검은 눈망울을 끔뻑끔뻑 움직였다.
“저게 왜 여기 있어?”
“저거라니. 샐러맨더라고 해야지.”
아드리안은 무례한 왕자의 언행을 곧바로 지적해 주었다. 미하일은 그 대답에 ‘지금 그게 중요해?’라는 뜻으로 인상을 구겼다.
“샐러맨더가 왜 여기 있지? 작아 보이는데, 새끼인가?”
“그런 것 같아.”
왕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아드리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여기에 샐러맨더가 자리를 틀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하긴 이 앞에서 밤새 불침번을 섰다면 절대 모를 리 없는 것이었다.
“……저놈을 언제 발견한 거야? 발견하자마자 나를 깨웠어야지!”
“얼마 안 됐어.”
골드 드래곤은 별것 가지고 호들갑을 떨어 대는 왕자 앞에서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샐러맨더는 인간에게 위험하지 않아. 오히려 인간을 좋아하는 정령이야.”
그리고 인간의 말을 할 수 없는 샐러맨더를 대신해 왕자에게 변명을 해 주었다. 취익- 그에 모닥불에 웅크리고 있던 새끼 샐러맨더가 작게 불을 내뿜었다.
미하일은 짜증스레 자신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그 바람에 그의 은발이 이리저리 뒤엉켰다. 왕자는 이를 악물고 샐러맨더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불침번을 선다는 건 이런 일이 있을 때 동료를 깨우는 일이야. 알겠어? 지금처럼 그냥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게 아니라.”
“…….”
아드리안은 삐죽 웃으며 왕자를 빤히 응시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생명체에게 감히 불침번의 의미 따위를 따져 묻는 꼴이었다. 밤새 잘 재워 놨더니 고맙다는 말은 안 하고 말이야. 골드 드래곤은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다음번에는 꼭 깨울게.”
미하일은 그 대답에도 썩 믿음이 가지 않았는지 한동안 아드리안을 바라보다가 다시 샐러맨더로 고개를 돌렸다.
왕자는 어제 가져다 두었던 불쏘시개용 기다란 나뭇가지를 검 대신에 들었다. 그는 그것을 들고는 샐러맨더의 몸통을 툭툭 가볍게 건드렸다. 그 움직임에 샐러맨더가 귀찮다는 듯이 꿈틀거렸다.
“어이.”
미하일은 그래도 한낱 짐승이 아닌 정령이라 불리는 샐러맨더가 말을 알아듣기를 기대했다.
“너희 가족들은 어딨어? 지금 안내해.”
취이익-
샐러맨더는 자신을 찔러 대는 나뭇가지에 불을 뿜었다. 그러자 화르륵, 왕자가 들고 있던 나뭇가지 끝에 불이 붙어 점점 손까지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것을 바라보던 왕자는 나뭇가지를 모닥불에 마저 던져 넣었다.
“조금만 기다려 봐. 어차피 나무들이 다 타서 곧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거야.”
아드리안은 팔짱을 낀 채로 둘을 향해 서서 말했다. 미하일은 기지개를 켜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는 매일 아침마다 하던 스트레칭을 간단하게 하며 몸을 가볍게 움직였다. 그러자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었다. 미하일은 모닥불 근처에서 샐러맨더를 지켜보고 있는 아드리안을 확인했다.
“이건 다른 이야기인데.”
아드리안은 심심하지도 않은지 모닥불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왕자는 그런 그를 향해 질문했다.
“어제 아카데미에 문이 열린다는 건 어떻게 알아챘지?”
아- 골드 드래곤은 왕자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해 올 만한 질문이었다.
“메를라인 잎이 붉게 물들고 난 다음 날에는 언제나 그 문이 나타났거든.”
“메를라인?”
“음…… 잠깐만 기다려 봐.”
아드리안은 검지손가락을 내밀어 왕자를 기다리게 한 후, 가볍게 몸을 일으켜 혼자 풀숲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풀 하나를 꺾어 들고 걸어왔다. 그 정도로 이 숲에는 메를라인이 많이 자라고 있었다.
“이거야.”
그가 들고 온 풀을 왕자가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골드 드래곤은 더 자세히 보려면 보라는 뜻으로 그것을 내밀었다. 왕자는 메를라인을 건네받았다. 그러고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건 벌써 붉게 물들었는걸?”
“맞아. 저쪽에 메를라인이 많이 자라고 있는데, 모두 다 물든 지 오래야. 어제 여기서 메를라인을 봤을 때에도 그랬고.”
흠, 미하일은 아드리안의 말에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다면 그 이론은 이곳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건가?”
“만약 오늘 그 문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렇겠지. 그리고 그 문이 이 숲 어딘가에서 나타난다 해도 우리가 모를 가능성도 커.”
“최악인데?”
“맞아, 딱히 좋은 상황은 아니지.”
아드리안은 왕자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미하일이 그런 아드리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곤란한 상황에 있는 것 치고 아드리안의 표정은 너무나 침착해 보였다. 왕자는 어제도 그것을 눈치채기는 했으나 워낙 그도 당황했기 때문에 곧 잊어버렸었다. 그러나 이렇게 어딘지 모르는 숲에 낙오된 상황에서도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아드리안의 표정이 무언가 이상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
미하일이 자신을 바라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아드리안은 왜 그러냐는 듯이 왕자에게 눈짓했다.
“왜 이렇게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
“뭐?”
“어제까지만 해도 아카데미에 있던 학생이 이름 모를 숲에 낙오가 되었는데, 아무렇지 않아 보이잖아.”
“그렇게 보여? 지금 내 머릿속은 굉장히 복잡한데.”
아드리안은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왕자는 그 웃음에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했다.
“그런 건 전혀 모르겠는데.”
“그러면 내가 막 울면서 소리치기를 바라는 거야? ‘우리는 이제 이 숲에서 죽을 거야. 아카데미에 돌아가지 못할 거라고. 흑흑.’ 이렇게.”
“……됐어.”
아드리안이 과장된 말투로 내뱉으며 왕자의 팔을 붙잡았다. 미하일은 그 말투에서 빈정거림을 눈치채고는 자신의 팔에 붙은 아드리안을 밀어냈다.
‘눈치 빠른 놈.’ 골드 드래곤은 그런 왕자를 바라보며 웃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때였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어?”
미하일이 모닥불이 있던 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땔감을 더 넣지 않아 모닥불이 천천히 꺼져 가고 있었다. 검은 재 위에서 샐러맨더가 천천히 일어났다. 그것은 일어나면서 불만스레 몸통에 묻어 있던 재를 털어 냈다.
샐러맨더는 원래 따뜻한 곳을 좋아하는 불의 정령이었다. 샐러맨더는 아마 다시 따뜻한 곳을 찾아 헤맬 것이고, 이 정체 모를 산에서 샐러맨더 무리가 어디에서 사는지를 알려 줄 것이었다. 미하일은 그 무리 중에서 부디 자신의 검을 가져간 샐러맨더가 있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미하일이 입을 열었다.
“움직인다.”
샐러맨더가 그 말에 휙, 걷던 몸을 틀어 제 쪽을 바라보고 있던 인간들을 불만스레 쳐다보았다. 그러나 곧이어 한발 두발 천천히 풀숲을 기어갔다.
“……따라가자. 짐은 대충 챙겨.”
아드리안은 미하일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문을 찾는 것은 시간이 조금 걸릴 듯했다. 이곳과 아카데미의 연결고리는 저 샐러맨더였다.
둘은 얼른 모닥불이 있었던 자리로 돌아가 벗어 두었던 교복 겉옷을 챙겨 들었다. 어차피 짐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별로 없었다. 새끼 샐러맨더는 기어가는 속도가 아주 느렸기 때문에 다행히 둘은 풀숲으로 달려가 그것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