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전부터 생각하긴 했는데 진짜 신기한 문이야.”
아드리안의 감탄 섞인 발언에 미하일이 고개를 휙, 돌렸다. 왠지 모르게 밝은 목소리였다. 왕자는 정신 차리라는 뜻으로 붉은 눈을 치켜떴다.
그들이 들어왔던 문이 있던 자리에는 아드리안이 그어 놓은 푸른 염료만 덩그러니 그여 있었다. 그것도 성의 없이 그은 터라 조금 삐뚤었다.
“……이제 어쩌지?”
왕자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명확한 답을 구하기보다는 그저 지금 현 상황에 대한 당혹감의 표출이었다.
음…….
아드리안은 문이 사라진 방향을 잠시간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마나의 기운은 아니었다. 그보다 좀 더…… 골드 드래곤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은 저 이상한 철문을 열어 대는 미지의 존재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애초에 생각해 봐야 할 게…… 학생들마다 문 너머로 봤던 광경이 달랐어. 누군가는 숲을, 누군가는 용암 호수를, 누군가는 불타는 산을 봤지.”
아드리안은 카일이 건넸던 약초밭 일지와 메모지 들을 떠올렸다. 그 자료들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학생들의 증언들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증언할 수 있던 학생들은 바사미엘 아카데미로 돌아온 학생들이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느낌.’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저 문의 용도를 직감했던 것이다. 아드리안은 슬쩍 옆의 왕자를 살폈다. 그는 불행하게도 유희 중인 드래곤과 같은 방을 쓰게 됐고, 이렇게 문을 함께 넘어왔다.
이것까지가 운명일까? 안타깝게도 그것은 아직 아드리안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말은.”
미하일은 그제야 아드리안이 무슨 말을 할지 알아차렸다.
“……문은 언제나 다른 공간에 생긴다는 거군.”
“맞아.”
왕자는 이 정도는 알아차릴 정도로 총명했다. 골드 드래곤은 잘 알아들었다는 듯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더 중요한 건.”
아드리안 헤더가 울창한 숲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숲의 나뭇가지들이 스산했다.
“과연 공간만 다를까?”
“…….”
광활한 숲에서 아드리안과 미하일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숲의 나무들이 이따금씩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만 들렸다. 맙소사, 왕자가 영혼 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무들이 빼곡하게 차 있어 낮임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모르게 어두워 보이는 지면과 달리 하늘은 맑고 비현실적으로 쾌청했다.
“우선 오늘은 꼼짝없이 여기서 노숙해야겠는데?”
아드리안은 아주 오래전 숲에서 노숙했던 경험을 떠올렸다. 혼자였다면 아무런 준비가 필요 없었겠으나 바로 옆은 아직 어리고 미숙한 인간이었다. 책임지고 다시 아카데미에 돌려놓아야 할 것이었다.
물론, 이 문에 대해서 샅샅이 알게 된 이후에.
골드 드래곤은 지금 이 상황에 무척이나 흥미롭고 재미있어서 콧노래를 부르고 싶었으나, 겉으로는 아무런 반응 없이 담담한 표정을 흉내 냈다.
미하일은 여전히 침착한 아드리안을 향해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거렸다. 왕자는 아드리안이 속으로 콧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위급 상황에서는 담담한 편인가보군.’이라고 생각했다.
***
“더 어두워지기 전에 준비를 더 해야겠어.”
망연자실한 미하일과는 달리 어디서나 적응을 해내는 골드 드래곤이 말했다. 왕자는 마지못해 고개를 움직인 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드리안의 말처럼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 숲에서 노숙하려면 필요한 일이 많았다.
미하일과 아드리안은 간단하게 역할을 나눠 맡았다. 미하일은 주변을 돌아보면서 불을 피울 만한 나뭇감을 대강 가져왔다. 그가 제자리로 돌아오자, 아드리안은 불을 피우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친 채로 “왜 이렇게 늦게 와.”라고 말했다. 그는 그사이에 큼지막한 돌멩이들로 구역을 나눈 후 불을 피울 준비를 모두 마친 채였다.
“이 근방에는 아무것도 없던데. 다 숲이야.”
미하일은 간단한 정찰 결과를 공유했다. 주위를 살펴보려 최대한 멀리 걸어 나가 보았으나, 왕자가 본 것은 울창한 숲뿐이었다. 그는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불을 피우기 위해 더 나아가려던 걸음을 마지못해 멈춰 걸었던 길을 되돌아왔다.
탁!
왕자는 모아 온 나무 조각들을 준비된 자리에 가지런히 올린 후, 손가락 두 개를 부딪쳐 경쾌한 소리를 냈다. 미하일은 한 명이라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화악-!
그러자 왕자의 검지손가락 끝에 주먹만 한 불꽃이 화르륵 불탔다. 넘실거리는 불꽃이 생각보다 커서 미하일은 윽! 하고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대기의 마나가 평소보다 많은 탓이었다. 아드리안은 맞은편의 바위에 앉아 그 모습을 한번 힐끔 살핀 후 아까 찾아낸 구황작물 몇 덩어리를 살펴보았다.
타닥, 타닥.
곧이어 둘 사이에 조그만 모닥불이 일렁거렸다. 미하일은는 가끔씩 장작에 불이 더 옮겨붙도록 모닥불을 기다란 나뭇가지로 툭툭 정리했다. 기사 훈련이란 명목으로 야영을 해 본 경험은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순탄했다.
아드리안은 그 모닥불에 방금 전 찾아낸 덩어리들을 몇 개 던져 넣었다.
“아마 먹을 만할 거야.”
아드리안의 자신감 있는 태도에 왕자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불을 피우고 앉아 있다 보니 그도 어느 순간부터 공복감을 느꼈던 것이다.
모닥불이 불규칙적으로 일렁이면서 그것을 익히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골드 드래곤은 정말로 할 말이 없었으므로 당연했으나, 왕자는 머릿속이 복잡해서 할 말이 없는 것이었다.
“자. 다 익었다.”
아드리안은 모닥불 속의 덩어리를 나뭇가지로 찔러 넣어 건너편의 미하일에게 내밀었다.
왕자는 아드리안이 건넨 볼품없는 덩어리를 불만스레 잠시 살피더니 눈을 질끈 감고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없어.”
미하일의 아름다운 얼굴이 단번에 구겨졌다. 그는 먹던 것을 슬쩍 내려놓았다. 아드리안의 말에 의하면 ‘감자와 아주 유사한 종류’의 덩어리였다. 하지만 맛은 완전히 다른걸. 왕자는 실망했다는 눈빛으로 맞은편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아드리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같은 솔라나케이아인데.”
“……그게 무슨 말이야.”
솔라나-뭐? 미하일은 갑자기 들려오는 괴상한 단어에 미간을 좁혔다. 무슨 학술적인 용어임이 틀림없었다. 왕자는 입속을 맴도는 떫은맛을 무시하려 애썼다.
“아무튼 맛은 완전히 다르잖아.”
“양념이 안 되어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군.”
아드리안은 손에 들고 있는 감자를 한번 크게 베어 물었다. 물론 감자와 다른 맛에다가 약간 떫긴 했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심지어 골드 드래곤은 영양분을 섭취할 필요도 없었지만, 맞은편의 왕자 때문에 식사 시늉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괜찮은걸, 뭐.”
왕자는 몇 입 베어 먹은 자신의 감자를 내려다보았다. 골드 드래곤은 자신의 몫을 완벽하게 해치우면서 말했다.
“내일부터 숲을 돌아다니려면 먹어 두는 게 좋을 거야.”
“…….”
아드리안의 말이 맞았다. 내일을 위한 체력을 비축해 두는 것이 필요했다. 미하일은 한숨을 한번 크게 내뱉고는 말없이 그것을 입에 넣었다. 그러나 표정을 구긴 채 눈살을 찌푸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미하일은 최대한 빠르게 식사를 마친 후,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아드리안은 말없이 모닥불이 잘 타도록 불을 뒤적이고 있었다.
“꽤 익숙해 보이는데. 헤데라 상단에서 배웠나?”
“헤데라?”
아드리안은 왕자가 꺼낸 말에 입가를 정리하던 손을 잠깐 멈췄다.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아드리안 헤더의 가짜 인적 사항 때문이었다. 아, 헤데라 상단. 가문의 할아버지 쪽 차남이 운영한다고 ‘적혀 있는’ 작은 무역상의 이름이었다. 어떻게 그 서류를 봤는지는 모르지만, 왕자의 권력으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뭐, 종종 따라다녔지. 너는?”
“이 정도야 기사 훈련에서도 가르치니까.”
그렇군. 아드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 사이의 모닥불이 따뜻한 빛을 내며 타올랐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을 불이 타오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타닥, 타닥 장작이 불에 타오르며 내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뜨거운 불이 한시도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도 시간 보내기에 딱 맞았다.
넘실거리는 불꽃이 눈앞까지 왔다가,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가 했다. 어둑해지는 숲과는 대조적으로 이 작은 불 주위로 따뜻한 빛이 넘실거렸다. 아카데미에서 약초학이나 배우려 했는데, 왜 갑자기 야영을 하게 된 건지는 모를 일이었다.
“내가 불침번을 설 테니 먼저 잠을 좀 자.”
다행히 바람도 불지 않고 모닥불을 피워 온도도 적당했다. 둘은 아카데미 교복의 겉옷을 벗어 모닥불 한쪽에 가지런히 정리했었다. 편한 옷차림에도 춥지는 않았다.
왕자는 마법 몇 가지를 사용해 모닥불 근처에 누울 만한 자리를 만들었다. 미하일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조금 뒤에 깨워.”라고 말하며 자신의 자리에 천천히 몸을 뉘었다.
“그래.”
골드 드래곤은 웃으며 대답했다. ‘조금 뒤’라는 시간의 개념은 인간과 드래곤에게 아주 다르게 다가오는 단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