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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44화 (44/184)

44화

아드리안 헤더는 호수 바닥에 누워 자신의 입과 코에서 조금씩 나오는 공기 방울들이 점점 커지면서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골드 드래곤이 주말 일정은 전부 오르디나스의 온실에서 보내는 것이었다.

적당히 따스한 온도의 물, 가끔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가는 물고기 떼. 아드리안은 얼굴 바로 옆에서 물결에 따라 흔들리는 해초를 손바닥으로 스윽, 쓸었다. 그의 흰 얼굴에 호수 수면의 빛이 닿아 반짝거렸다.

골드 드래곤의 눈 밑은 멀끔하게 희었다. 호수 바닥에서 숨쉬기 위해 염료 따위는 필요 없었다. 신입생은 아직 혼자라 들킬 염려는 전혀 없었다. 적당한 마법 한 번이면 충분했다. 그는 물론 교복이 젖지 않도록 하는 마법도 함께였다.

이런 게 행복이지. 골드 드래곤의 빛나는 눈동자가 물속에서 일렁거렸다.

커다란 물뱀이 스륵 호수 바닥의 흙을 훑으면서 지나갔다.

골드 드래곤은 영양가 없는 지난 생을 돌아보기보다는 현재에 충실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아드리안이 가장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것은 그 이상한 문이었고, 조금 더 멀리 보자면 입학식에 나눠 받은 꿰뚫어 보는 눈을 어떻게든 속여서 이 학년으로 진급하는 것이었다. 이 두 개 이외에는 신경 쓰지 말자. 골드 드래곤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체온과 비슷한 온도의 물이 밝은 색의 머리카락을 느릿하게 움직였다. 아드리안은 휙- 빠르게 물살을 가르며 헤엄쳤다.

약초밭과 이 온실을 관리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들은 은근히 많았다.

촤악- 드래곤은 가볍게 호수에서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검지와 엄지를 튕겨 간단한 마법을 사용했다. 푹 젖었던 옷과 머리가 상쾌한 소리와 함께 단번에 뽀송하게 말랐다. 이렇게 쉽게 마법을 쓰면 될걸. 아드리안은 연금술 학부 학생들의 우직함에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온실을 혼자서 관리하는 동안에는 이렇게 편하게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아드리안은 터벅터벅 따스한 온실 안에서 푸르게 잎을 펼치고 있는 나무에 걸어가 털썩, 하고 편하게 앉았다. 그곳에는 온실에 들어오면서 카일에게 잠깐 빌려 온 약초밭 일지가 놓여 있었다.

“우선은 가지고 있는 단서에 집중해야지.”

드래곤은 혼자 중얼거리며 일지의 첫 장을 넘겼다.

스윽- 가벼운 종이를 넘기는 소리와 졸졸졸 호수의 물소리가 조용한 온실을 가득 채웠다.

아드리안은 평화로운 호숫가의 잔디 위에 누워 넘겨받은 약초밭 일지를 읽었다. 아카데미 일 학년생들이 관리했던 일지라 그런지 일지의 필체는 한 권에서도 여러 번 바뀌었다. 그 내용도 아마추어들이 쓸 만한 내용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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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5일(월)

작은 양초 해파리 떼 발견

케비쉬 묘목 20그루 작업 (이번에는 꼭 성공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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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9일(화)

메를라인 이파리가 다 자랐음 → 곧 수확 철!

사슴에게 틸런 열매 급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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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9일(화)

연구 중인 디에나 군락을 옮겨 심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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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0일(월)

혹시 몰라 케비쉬 묘목 34그루 추가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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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비쉬 묘목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페이지든 등장했다.

“많이도 심었네.”

그러나 카일의 말처럼 그들의 노력은 언제나 실패했다. 골드 드래곤은 휙휙- 약초밭 일지 뒷장으로 성의 없이 더 넘겼다. 지진이 일어났던 날짜 이외에는 전부 필요 없는 정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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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토)

메를라인 이파리가 붉게 변해서 한 웅큼 수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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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일(일)

케비쉬 씨앗 재구매 필요

***이게 다 망할 지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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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일.”

아드리안 헤더는 아카데미 교복 상의에 아무렇게나 꽂아 두었던 펜을 휙, 꺼내 일지에 적힌 날짜에 크게 표시를 했다. 지진이 나서 케비쉬가 죽은 날을 체크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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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0일(월)

트라코니어스 약초 채취

아주 약간의 기대를 가지고 아주 소소하게 케비쉬 묘목 10그루만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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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9일(월)

메를라인 이파리가 붉게 물들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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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0일(화)

이 클럽에 더 이상의 희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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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9월 10일.”

다음 날짜에도 크게 표시했다. 약초밭 일지를 넘기는 손이 더 빨라졌다. 약초밭 일지의 남은 페이지가 점점 줄어들수록 아드리안의 표정은 심드렁해졌다.

약초밭 일지에 적힌 이 많은 날짜들은…… 아드리안은 고개를 기울이며 약초밭 일지에 표시한 부분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지진이 일어난 간격을 대강 암산해 보았다. 10일, 14일, 2일 그리고 20일. 간격에는 아무런 규칙이 없었다. 역시나 오늘도 별 소득은 없었다.

아드리안은 짜증스레 약초밭 일지를 덮어 옆쪽에 가볍게 던져두었다.

그때였다.

쓰읍.

골드 드래곤이 가볍게 경고를 했다. 어느샌가 슬금슬금 그에게 다가온 토끼들이 그의 교복 위에서 장난치고 있었다. 그 바람에 멀끔하게 다려진 교복 한쪽이 진흙으로 더러워졌다. 드래곤의 경고에도 토끼들은 큰 귀를 한번 살짝 앞뒤로 움직였을 뿐 가볍게 뒷발을 움직여 잔디와 다리를 발로 차 댔다.

“그만.”

귀찮다는 듯이 다리 근처에서 뒤엉켜 놀고 있는 토끼들을 팔로 치워 낼 때였다. 아드리안의 눈이 어디엔가 고정되어 잠시간 움직이지 않았다.

저건…….

부드럽게 둥근 이파리 끝과 짧은 줄기. 그리고 붉은 반점. 잔디들과 잡초들 틈바구니에서 작은 메를라인 군락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드리안은 옆에 던져둔 일지를 빠르게 낚아챘다. 그는 종이를 빠르게 넘기며 지진이 일어나기 하루 전날들을 눈으로 훑어 내렸다.

지진이 오기 하루 전 언제나 메를라인의 잎이 붉게 물들었다.

이 예민한 풀은 급격한 외부 변화를 가장 빠르게 알아차리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메를라인의 좁은 잎의 여기저기에 붉은 반점이 나 있었다. 보통은 때를 기다렸다가 우연히 잎의 전체가 붉게 물들었을 때 부드러운 장갑을 착용한 채 수확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아드리안은 붉은 잎을 손가락으로 살짝 훑으며 조금 인상을 썼다.

***

미하일은 매주 주말이면 마음껏 검술 교련 서적을 보면서 혼자 훈련을 하는 것을 즐겼다. 이번 주말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틸론이 없어 훈련장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바사미엘 아카데미의 숲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타릭 교수는 검술 수업이 끝난 이후 왕자가 아무런 불만 없이 훈련장을 달리는 것을 끝까지 확인한 후 연습용 목검을 하나 건넸다. 잃어버린 검을 다시 찾거나 사기 전까지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이었다.

그가 잠들 준비를 마친 후 간편한 복장으로 침대에 몸을 눕혔을 때였다. 옆 침대의 아드리안 헤더의 뚜렷한 목소리가 그의 귀를 깨웠다.

“내일 일정이 어떻게 돼?”

“……일정은 왜. 별것 없어.”

반대편 벽 쪽으로 돌린 채 말하는지 왕자의 목소리가 울리듯이 들렸다. 내일도 오늘처럼 검술 훈련이었다. 대련을 해 준다는 건가? 그럴 리는 없을 텐데. 왕자가 감았던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음, 내가 내린 가정이 맞다면…….”

아드리안이 기숙사의 침대에 누운 채로 말했다. 가정? 잠에 들려던 미하일이 바로 옆 침대로 몸통을 돌렸다. 어두운 방 안에 왕자의 붉은 눈동자가 보이는 것 같았다.

“아마 내일 그 문이 또 열릴 거야.”

“뭐?!”

미하일이 빠르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진짜야?”

아드리안은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대꾸했다. 미하일이 저렇게 반응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골드 드래곤은 혹시 모를 상황에 여지를 뒀다.

“듣고 싶은 부분만 듣지 말고. 앞에 ‘내가 내린 가정이 맞다면’이라는 게 있었잖아.”

“어떻게 알았- 아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좋았어.”

왕자의 붉은 눈동자가 삽시간에 타올랐다. 침대 옆에 세워 둔 연습용 목검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건방진 샐러맨더의 얼굴이 그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좋았어. 그놈을 빨리 잡아서-

“들어갈 거지?”

아드리안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왕자가 건너편 침대의 룸메이트를 바라보았다. 평범한 갈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는 왠지 밝은 달빛처럼 느껴졌다.

“당연히.”

골드 드래곤은 왕자의 대답에 기다렸다는 듯이 씨익- 크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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