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다시 돌아온 <취향과 예술> 수업 시간이었다. 수업이 있는 계단형 강의실에 도착하자 지난 시간의 끔찍했던 왕자의 연주가 떠올랐다.
“저번 시간에 좋아하는 음악을 정해 오기로 했었죠?”
학생 몇이 교수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는 그중 몇 명을 손가락으로 지목해 좋아하는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시간을 줬다. 한참 좋아하는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던 교수가 강의실의 한쪽을 바라봤다.
밝은 금발을 가진 학생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교수는 학생이 바라보고 있는 창밖을 힐끔 확인했다. 평소와 별다를 것 없는 푸른 하늘이 보였다. 아무래도 이 수업이 재미가 없는 모양이다.
“그럼 음악 이야기는 이 정도로 끝내고.”
교수는 슬쩍 웃으며 강의실에 앉아 있는 어린 학생들의 얼굴을 하나씩 살폈다.
“이제는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요?”
예술 학부 교수 루크 캐니어는 신입생들을 위한 이 수업에 들어오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아카데미의 모든 학생들은 어렸으나, 그중 가장 어린 일 학년들의 반짝거리는 눈을 마주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갑자기 바뀐 주제에 학생들이 입을 닫자, 루크 교수가 제일 먼저 입을 뗐다.
“저는 수업을 끝낸 후 맑은 날 시간을 내서 바사미엘의 중앙 정원을 걷는 것을 좋아해요. 그 상쾌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면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것 같죠.”
강의실에 앉은 학생들이 교수의 말에 납득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도 그 공기가 느껴졌다. 루크는 잠시 말을 멈춘 후, 학생들에게도 생각해 볼 시간을 나눠 줬다.
“혹시 또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말해 볼 학생이 있나요?”
강의실 가장 앞좌석에 앉아 있는 학생이 슬쩍 손을 들어 올렸다.
“……저요. 저는 부드러운 타월을 좋아합니다. 중요한 건 마법으로 말린 게 아니라 햇볕으로 말려야 해요.”
“그렇군요. 좋은 이야기에요. 또 이야기해 볼 학생?”
첫 학생의 이야기에 안심을 한 학생들이 그제야 하나둘씩 손을 들었다.
루크는 그것을 보면서 조용히 미소 지었다. 이 년 뒤면 성인일 학생들이었으나 그녀의 눈에는 언제나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저는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요. 찰리와 산책하는 그 길이 제일 좋아요.”
“귀엽군요.”
“뭐냐, 갑자기 웬 찰리? 강아지 이야기로 착한 척하지 마, 오팔에 있는 제클린 라이너스를 좋아하면서!”
무슨 소리야! 농담하지 마-와 같은 이야기를 하며 강의실에 앉은 학생들이 키득거렸다. 그들은 서로 아카데미에서 관심 있는 학생들을 주제로 여러 가지 농담들을 주고받으며 투닥거렸다. 저 나이대의 아이들다웠다.
루크 교수는 잠시간 아이들이 웃고 떠들게 놔둔 후, 상황을 가볍게 정리했다.
“오, 좋아요.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영감을 가져다주죠. 거기 학생?”
루크의 말에 학생들이 시선을 돌렸다. 교수의 시선이 강의실 뒤쪽을 향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여전히 수업에 관심 없어 보이는 금발 학생이 앉아 있는 곳이었다. 그 학생은 당연하게도 아드리안 헤더였다.
“뒤쪽에 앉은 학생?”
아드리안은 그제야 교수가 자신을 부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학생들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예?”
아드리안가 창밖에만 집중했던 얼굴을 정면으로 가져왔다.
“지금 우리는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요. 어때요, 학생은 어떤 사람이 생각나나요?”
좋아하는 사람? 아드리안은 교수의 뜻밖의 질문에 당황했다.
그는 저번 수업 시간에 교수가 이야기했던 ‘좋아하는 음악’에 대해서만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숙제랑 다른 질문이잖아. 좋아하는 음악에 대해서라면 사흘 밤낮을 새워도 이야기할 거리가 많았다.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서라면…….
골드 드래곤은 미간을 약간 찡그렸다.
“……그게.”
아드리안은 바사미엘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 처음으로 당혹감을 느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주제였다.
루크 교수가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교단에 서 있었다. 그리고 강의실의 모든 아이들이 이쪽을 바라보며 골드 드래곤의 대답을 기다렸다. 미하일 또한 마찬가지였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부모님이나 친구들이나. 그런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부모님과 친구들? 그렇게 생각하면 말하기가 더 어려워지는데. 아드리안의 입술이 잠깐 열렸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닫혔다.
대강 말하고 넘어가야 했는데 억겁의 시간 동안 드래곤을 스쳐 지나갔던 그 수많은 인간들의 이름 중 그 누구의 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
대답하고 싶었으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이 모두 불분명했다.
그러나 이미 많은 시간을 지체했다. 골드 드래곤은 우선 생각나는 대로 말을 뱉기로 결정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아드리안을 강의실 반대편 벽에 기대어 앉아 있던 미하일도 빤히 바라보았다.
“……데니스 바냐.”
좋아하는 사람이라…… 아드리안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인간들 중 아무나 한 명 골라냈다.
“……매일, 매일 심심했는데, 제게 언제나 흥미로운 말들을 해 줬거든요.”
“그렇군요.”
“같이 놀러 나갈 때마다 재미있었어요.”
용병이라 정말로 놀러 나갔다기보다는 주로 임무를 수행하고, 적들을 죽이러 다녔지만 어쨌든 재미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데니스 바냐. 골드 드래곤은 그 인간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발음해 보았다. 꽤 오랜만에 불러 보는 이름이었다. 그제야 침묵으로 잠시 조용했던 강의실 안의 학생들과 특히 루크 교수가 안심하면서 아드리안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쳤다.
“좋은 친구네요.”
“……네.”
교수는 곧이어 다른 주제를 가지고 아이들과 이야기를 시작했다.
겨우 끝났군. 골드 드래곤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데니스 바냐?
아드리안은 속으로 스스로를 비웃으며 중얼거렸다. 지금 이 순간에 그 녀식이 생각났다고?
아주 옛날에, 정확한 날짜를 세기도 힘들 정도로 오래전 유희 때 스쳐 지나갔던 인간이었다. 그는 몇 번의 유희에서 수많은 인간을 만났다. 골드 드래곤은 심지어 이 왕국을 건국한 카를로 데 이네하트까지도 만났었다.
하지만 방금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어느 나이 많은 용병의 이름이었다. 바냐는 가족이 없었다. 용병단이 처참하게 궤멸했어도 그의 죽음을 슬퍼할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아마 지금까지 그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본인뿐이라는 것을 아드리안은 장담할 수 있었다.
예술 학부 교수는 아무렇지도 않게 수업을 이어 나갔다.
그때였다.
드륵, 아드리안이 앉은 강의실의 옆 의자가 소리를 내며 뒤로 끌렸다. 그 의자에 누군가 털썩, 하고 주저앉았다. 그 사람은 팔꿈치를 책상에 대고 앉아 있는 아드리안에게로 상체를 기울였다.
골드 드래곤은 그 인영을 무시한 채 펼쳐져 있는 책에 집중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것은 아드리안이 책에 집중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았다.
“맙소사, 단장님. 겨우 나온 이름이 제 이름이라니? 당신 좋아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불쌍하구만. 그렇게 오래 살았다면서 한 명도 없어?”
데니스 바냐였다.
바냐는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비어 있는 아드리안 헤더의 옆자리에서 팔을 탁! 하고 테이블을 내리쳤다. 저것은 환영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도 환청일 것이 틀림없었다.
용병단 시절 함께 술에 취해 웃으며 농담을 주고 받던 그의 얼굴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는 그 언덕에서.
“하긴.”
바로 옆자리에 앉은 바냐가 웃었다. 그의 웃는 얼굴 위로 붉은 피가 한 줄기 미끄러졌다. 그 피는 남자의 투박한 턱선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 툭, 툭 붉은 핏자국이 강의실의 책상에 한 방울 두 방울씩 떨어졌다. 섬뜩한 모양새였으나 그게 다였다.
“심지어 단장이 죽인 사람의 이름을 말할 정도인데. 안 그래?”
닥쳐. 죽이다니 그건 과장이잖아? 난 너희들이 죽는 것을 내버려 두었을 뿐이야. 그게 너의 운명이었을 뿐이라고. 골드 드래곤이 무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인간들은 드래곤을 이해할 수 없다. 혼자라는 점은 억겁의 시간을 살아온 드래곤에게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래요? 뭐, 단장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그런 거겠지.
바냐는 드래곤의 속마음에 대답했다.
그러고는 아드리안이 유일하게 기억해 낸 좋아하는 인간 바냐는 드래곤의 말에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갑자기 강의실에 나타났던 것처럼 갑자기 사라졌다.
아드리안은 휙, 고개를 다시 창밖으로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