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훈련장 내부를 목검 부딪치는 소리가 채웠다. 검술 수업 시간이었다. 아드리안 헤더는 첫날 얼떨결에 왕자의 대련 상대가 된 이후로 어쩔 수 없이 왕자와 같은 조가 되었다. 매 수업 시간마다 아드리안은 가넷의 다른 학생들을 향해 도움의 눈빛을 보냈지만, 그들은 모두 드래곤의 애타는 눈빛을 애써 무시했다.
미하일은 대련이 끝날 때마다 목검을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평소 애용하던 검이 아닌, 대련용 목검이라 조금 불편했다. 젠장, 그러고 보니 펠렌 디프스의 검을 손에 넣기 전에는 다른 검을 사야 하나? 왕자가 물끄러미 자신의 손에 들린 목검을 바라보며 고민할 때였다.
“미하일.”
검술 수업 교수인 타릭 이드로스가 왕자를 호명했다. 미하일이 훈련을 멈추고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었다. 오늘 수업에서 미하일은 이상했다. 지금 그가 들고 있는 것은 몇 년 동안 애지중지하면서 가지고 다니던 검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허리에 검대도 없었다.
“가지고 다니던 검은 어디다 두고 왜 갑자기 그 연습용 목검입니까?”
“……목검으로 대련하겠습니다.”
미하일은 목검을 휙휙 휘둘렀다. 타릭은 그 모습을 조금 지켜보더니, 연습용 목검으로도 수업을 잘 따라오고 있는 미하일을 내버려 두었다.
일 학년은 공통 교과라 연습용 목검으로 수업을 받고 있는 학생들이 많았다. 가지고 온 검이 아닌 훈련장에 비치된 목검을 사용하는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왕자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아드리안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오늘 배운 검식을 연습해 보자는 뜻이었다. 아드리안이 뚱한 표정으로 서 있자, 왕자가 먼저 연습용 목검을 들고 대련 준비 자세를 취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미하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대련 준비 자세에서 목검을 살짝 움직였다.
왕자의 대련 상대인 아드리안이 목검을 귀찮다는 듯이 가져다 댔다. 툭, 대련을 시작한다는 표식이었다.
턱, 아드리안은 위에서 센 힘으로 떨어지는 왕자의 목검을 받아 냈다. 아드리안의 눈이 날카로운 미하일의 눈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흠- 아드리안은 그 눈을 바라보며 왕자의 검을 옆으로 흘렸다.
이렇게 세게 부딪쳐 오면 목검이 부러질 텐데? 이 목검은 왕자가 즐겨 사용하던 금속 검과는 내구성이 달랐다.
탁!
골드 드래곤은 옆면으로 치고 들어오는 미하일의 검을 가까스로 막은 척 느리게 움직였다. 미하일은 그 짧은 시간을 놓치지 않고 몸통을 한 바퀴 빙 둘러 사이를 벌렸다가 빠르게 치고 들어왔다.
“……진짜 검에는 관심 없어?”
“전혀.”
미하일은 짜증 난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며 목검을 들어 올렸다. 관심 없다는 것 치고 가넷의 신입생 중 괜찮은 대련 상대는 아드리안뿐이었다. 관심도 없고, 호신용으로 배웠을 뿐이라는 그의 검술은 제법 매웠다. 오랫동안 정제되고 교련 서적으로 단련되어 획일화되어 있는 검술과는 조금 다른 면이 있어 아드리안과의 대련은 독특했다.
미하일은 목검을 몇 번 공중에 휙- 휙 돌리며 다시 치고 들어올 기회를 살폈다. 아드리안은 가쁜 숨 하나 내뱉지 않고 그 목검을 빤히 바라보며 반대편에 서 있었다.
곧이어 다시 목검 두 개가 세게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가 훈련장을 채웠다.
두 학생의 본격적인 대련에 가넷의 학생들이 주춤거리며 자리를 비켰다. 오늘 배운 검식뿐만 아니라 공간이 더 필요한 검술을 사용하는 터라 자칫하다간 목검에 두드려 맞게 생겼기 때문이다.
탁! 기이익-!
아드리안이 횡으로 갈라 날린 검날을 미하일의 목검이 막아섰다. 목검 두 개가 힘의 우열을 가리기 위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정면으로 노려보고 있는 미하일의 눈이 붉게 일렁였다. 아드리안은 그 시선을 약간 비껴 내며 검에 힘을 스륵 풀었다. 그에 미하일의 검이 턱-! 아드리안의 목검을 쳐 내려는 순간이었다.
뚜둑,
세 번째 목검이 두 동강이 나서 땅에 떨어졌다. 그제야 타릭은 왕자가 이상한 것을 알아차렸다.
“미하일 루스 이네하트.”
교수가 다시 한 번 왕자의 풀 네임을 불렀다. 그간 모른 척하던 미하일의 몸이 일순 멈칫했다. 타릭은 데클레어 교장보다는 못 했지만 그녀와 함께 왕자의 어린 시절부터 그를 함께 지도하고 교육했던 기사였다. 타릭은 나직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왕자에게 다시 한번 질문했다.
“하사받은 검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검은.”
미하일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가 닫혔다. 어린 시절부터 봐 왔던 이 검술 교수에게 말하기에 찔렸다. 왕자는 잘못을 모두 샐러맨더에게 떠넘기는 것보다는 간단하게 설명하기로 결정했다. 용암 호수와 샐러맨더라니. 어차피 사실대로 말해도 교수가 믿어 줄지 미지수였다.
“잃어버렸습니다.”
“……검을?”
타릭이 교수인 입장도 잊은 채 눈을 치켜떴다. 왕자가 애지중지하며 가지고 다니던 검은 루스타바란 국고에서 왕자에게 하사된 명검이었다. 지금은 잊혀졌지만 분명 유명한 장인이 만들었을 그 검을, 국왕께 하사받은 그 검을.
“잃어버렸다고?”
타릭의 말에 미하일은 속으로 한숨을 크게 쉬며 “……네.”라고 대답했다. 왕자의 대련 상대였던 아드리안도 연습용 목검을 휘두르다가 그들의 묘한 대치에 팔을 멈췄다. 아까부터 대련 중에 부서진 목검이 세 개였다. 골드 드래곤은 자신의 목검을 바라보았다. 적당히 봐주면서 할 걸 그랬나?
그때였다.
“기사가 되려는 훈련생이 자신의 검을 잃어버렸다-라.”
이때까지 들어 본 적 없는 차가운 말투였다. 미하일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듯이 교수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두 팔을 뒤로 가져갔다. 신분이 왕자인 것 치고는 가르침받는 자세가 꽤나 익숙해 보였다.
“저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미하일, 어떻게 생각합니까.”
“…….”
왕자는 변명의 여지도 없다는 듯이 그 자세를 유지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타릭은 왕자가 말하기 전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듯이 차가운 표정으로 바로 앞의 학생을 바라보았다. 미하일은 잠시 침묵하더니 스스로의 실책을 순순히 인정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다행이네요.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다니.”
타릭은 조금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니죠?”
바사미엘 아카데미는 교내 학우 관계에 매우 예민한 편이었고, 미하일은 신분이 신분인지라 다른 학생들이 멋대로 대할 리는 없었지만…… 타릭은 혹시 모를 뒷일이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없습니다.”
용암 호수랑 샐러맨더 이외에는 교수에게 할 말은 없었다. 미하일의 깔끔한 대답에 타릭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거렸다.
“그러면 제가 무슨 처분을 내리든 불만은 없겠군요.”
“네.”
미하일은 교수의 처분을 담담하게 기다렸다. 그는 가끔 죽을 만큼 힘든 수련을 시키기는 했지만, 어차피 모두 기사가 되기 위한 과정이었다.
“목검은 내려놓고, 일단 가볍게 훈련장 오십 바퀴 뛰고 오세요.”
“감사합니다.”
미하일은 검술 스승의 관대한 처분에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끼고 훈련장의 가장자리로 뛰어갔다. 아드리안이 끝없는 대련에서 갑자기 해방되어 속으로 기뻐하며 다른 곳으로 걸어가려는 참이었다.
타릭이 그를 호명했다.
“아드리안 헤더.”
“……예?”
검술 교수가 미하일이 바닥에 내려놓은 목검을 집어 들었다.
“자세를 잡으세요. 상대는 제가 이어서 해 드리겠습니다.”
왕자의 대련 상대로 괜찮은 실력인지 검증해 볼 시간이었다. 타릭은 연습용 목검을 앞으로 내밀어 대련 준비 자세를 취했다. 아드리안은 마지못해 쥐고 있던 목검을 들어 올려 그와 마주 보고 섰다.
***
진짜 기사와의 대련이었다. 고작 아카데미 일 학년생 신분으로 이길 수는 없었다. 아무리 연습 대련이라 해도 타릭을 이기는 건 말도 안 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아드리안은 적당히 그를 상대했다.
타악!
손에서 놓친 연습용 목검이 휙 날아가 원을 그리며 구석으로 처박혔다.
“제법 실력이 괜찮군요.”
타릭이 아드리안에게 걸어왔다. 그와 가볍게 악수를 한 후, 아드리안은 검을 잡았던 손을 손바닥으로 쥐었다. 검을 잡았던 손이 얼얼했다.
“……감사합니다.”
“호신용으로 배운 검술 같지는 않은데. 어디서 배웠습니까?”
“따로 배우지는 않고, 길거리에서 눈으로 본 것을 어설프게 따라 하는 정도입니다.”
“음, 그런가요?”
타릭은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금발의 소년이 구사한 검술은 절대 눈대중으로는 할 수 없는 고급 검술이었다. 심지어 몇 가지는 현재 검술 교련서에서도 알려 주지 않는 옛 방식이었다. 분명 예전부터 내려오던 검식을 구사하던 이에게 가르침받은 흔적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검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이었다.
하지만 타릭은 애써 의문을 잠재웠다.
눈앞의 학생이 기사단에 입단하려는 성인이었다면 좀 더 깊게 파고들어 질문에 질문을 이어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소년은 바사미엘 아카데미에 갓 입학한 학생이었다. 입학 기준이 높고 까다로운 아카데미에 입학한 소년을 의심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좋습니다.”
이런 학생이 미하일의 대련 상대가 된다면 실력 향상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왕자와 동갑이라 서로 좋은 경쟁 상대가 되겠지. 타릭은 여전히 훈련장을 따라 뛰고 있는 왕자를 힐끔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