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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39화 (39/184)

39화

조용한 왕성의 집무실이었다. 고급스러운 장식들과 커다란 책상이 그곳을 채우고 있었다. 집무실의 가장 상석에 앉은 아름다운 남자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루스.’

‘…….’

은발의 남자는 테이블에 올려 둔 손가락을 약하게 두어 번 두드렸다. 그러나 곧이어 그 손가락을 힘주어 말아 주먹을 쥐었다. 카를로 데 이네하트는 잔뜩 힘주어 쥔 주먹을 잘게 떨었다.

‘그때 내가 이 대륙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지 궁금하다고 말했었지.’

‘맞아.’

아름다운 금발을 한 남자가 집무실에 앉은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금색 눈동자의 밝은 빛이 눈동자 안에서 일렁거렸다. 그것은 마치 조금 어두운 왕궁의 실내를 밝히려는 듯이 환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그런데 왜!’

쾅! 왕좌에 앉은 남자가 주먹으로 앉은 자리를 내리쳤다.

‘왜 도와주지 않는다는 거지? 이 마지막 전쟁만 끝내면 대륙은 내 것이 되는데!’

‘카를로.’

금발의 남자는 화를 내고 있는 인간을 바라보며 고개를 옆으로 천천히 기울였다.

‘나는 분명 네가 이 대륙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지 궁금하다고 말했었어.’

그건 사실이었다.

카를로가 감히 집무실에 앉아 있는 왕 바로 앞에서 당당하게 서 있는 금발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말 중 어디에서도 네게 도움을 약속한다는 뜻은 없다만?’

하, 카를로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골드 드래곤은 고개를 기울인 채 그의 말을 기다렸다. 골드 드래곤으로서는 카를로의 일렁이는 분노가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네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군.’

크큭, 하하- 카를로는 드래곤의 질문에 불현듯 웃음을 터뜨렸다.

‘이해할 수가 없다-라.’

즐거워서 웃는 것이 아닌 허탈한 웃음이었다. 카를로는 집무실에 앉아 사납게 웃으며 눈앞의 고귀한 생명체를 노려보았다.

‘모르겠어?’

‘…….’

골드 드래곤은 입술을 비죽 늘여 비웃는 카를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카를로는 집무실 한쪽 벽에 크게 난 창문을 손짓했다.

‘네게 이건 소꿉장난 같은 유희일지 몰라도, 이 전쟁은…… 대륙의 운명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덧없이 죽을 거야.’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운명.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드래곤이 카를로의 옆에 이렇게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것이었다. 카를로가 이 전쟁에서 패배하든, 승리하든 그것이 대륙의 운명을 결정지을 것이었다. 그때 그 던전에서의 벽화처럼.

드래곤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의 아름다운 금발이 집무실로 들어오는 약간의 햇볕을 받아 반짝였다. 카를로는 드래곤의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운 외모에 잠시 시선을 돌렸다가 고개를 숙여 힘없이 속삭였다.

‘넌 이 전쟁을 단번에 끝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잖아.’

카를로가 왕이 되기 이전의, 그러니까 마치 그 던전에 함께 들어갔던 어린 청년의 말투였다.

골드 드래곤은 그때의 맑고 깨끗했던 눈을 기억했다. 청년은 스스로 이 전쟁을 끝내기를 원했고, 그래서 소드 마스터가 되기 위해 필사의 힘을 다해 수련했다.

그러나 지금 집무실에 앉은 이가 원하는 것은 그 청년이 원했던 것과 정반대의 소원이었다.

‘당연하지.’

골드 드래곤의 손짓 한 번이면 곧 시작될 대륙의 역사상 가장 큰 전쟁은 단번에 끝날 것이다. 루스는 카를로를 바라보며 입술을 다시 열었다.

‘하지만…….’

집무실에 앉은 남자는 이어지는 골드 드래곤의 이야기에 표정을 굳혔다.

‘그러면 인간들이 대륙에 필요한 이유가 뭐지?’

‘뭐라고?’

‘스스로 일으킨 전쟁을 다른 종족이 마무리해 줘야 한다면 그 종족이 존재할 이유가 없잖아. 인간들은 엘프의 나라인 엘 메르의 멸망에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왜 나는 인간을 도와줘야 해?’

골드 드래곤은 잠시 고민하다 감탄사와 함께 결론을 냈다.

‘아, 어쩌면 이게 바로 대륙의 운명일 수 있겠군.’

카를로는 굳은 얼굴로 드래곤의 표정을 마주했다.

그러나 드래곤의 얼굴은 언제나 그랬듯이 무표정했다. 카를로는 그 표정에 그제서야 눈앞의 생명체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실감했다. 그에게 감정적인 이해를 요구했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당신은.’

카를로가 입을 열려다가 자신의 여린 살을 짓씹으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절대 이해 못 해.’

‘너희들의 이 시시한 소꿉놀이를?’

골드 드래곤은 화를 내는 카를로의 표정을 빤히 바라보며 대답했다. 집무실 창밖의 풍경이 드래곤의 눈에 담겼다. 인간들의 무리가 무장을 한 채 결연한 표정으로 성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지키고 있는 것은 드래곤과 카를로가 있는 이 왕성이었다.

카를로는 이를 악물고 짓씹듯이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에는 다양한 감정들이 이리저리 뒤섞여 있었다. 배신감과 혐오, 그리고 실망과 같은 감정이 카를로의 몸 전체를 훑고 지나갔다.

‘……당신은 죽어도 이 전쟁을 이해할 수 없을 거다.’

‘다행이군.’

난 별로 그런 감정에 휘둘리고 싶지 않아서 말이야.

골드 드래곤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에서 입술 양 끝만 살짝 올려 대답했다.

‘집무실에서 나가.’

카를로의 축객령이었다. 골드 드래곤 또한 그곳에 더 머무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왕의 말이 끝나기 전에 휙, 몸을 돌려 집무실을 나섰다.

***

촤아악-

아카데미 기숙사의 커다란 커튼이 순식간에 걷혔다. 고급스러운 침대의 푹신한 이불에 파묻혀 숙면을 취하고 있던 아드리안에게 햇빛이 와르르 쏟아졌다. 꿈틀, 그의 눈가가 일순 움직였다.

그러나 얼굴로 쏟아진 햇빛은 줄어들기는커녕 따갑기만 했다.

아드리안은 감고 있는 눈꺼풀을 뜨려다가 갑자기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에 눈가를 찡그렸다. 골드 드래곤은 그 상태로 입술을 짜증스레 열었다.

“……몇 시?”

“열 시.”

아드리안의 질문에 곧바로 상대방의 대답이 날아왔다. 후우- 골드 드래곤은 이미 이 상황이 무척 익숙했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키고는 몸을 가볍게 일으켰다. 데자뷔였다.

“훈련장이 열렸을 텐데? 왜 또 기숙사에서 그러고 있어.”

아드리안이 침대에 앉아 헝클어진 머리칼을 손으로 대충 정리하며 물었다. 그러나 기숙사 바닥에서 열심히 푸시업을 하던 미하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하고 있는 훈련에 집중할 뿐이었다.

못 들었나? 아드리안은 왕자가 있는 방향에 대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응?”

골드 드래곤은 바닥을 향해 고개를 약간 숙여 미하일의 대답을 기다렸다.

“……가더라고.”

그러자 왕자가 후우- 한숨을 내쉬고 푸시업을 한 번 했다.

“뭐라고?”

“……훈련장 입장에도 2틸론을 받아 가더라고.”

하, 아드리안이 짧게 웃었다. 기사 학부들의 주 수입원은 그거였군? 골드 드래곤은 기사 학부생들의 그럴듯한 명분에 납득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의 수중에 남은 것은 0틸론이었다.

“아주 철저한 시스템이네 그래.”

그들은 왕자라고 봐주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이해 가능했다. 어떤 이든 아카데미의 숲의 경계를 넘어오면 바사미엘 아래에서 모든 신분이 사라진다는 것이 학칙이었다. 오히려 왕자만 훈련장에 들여보내 주었다면 아카데미에서 큰 소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2틸론이면 내가 빌려줄까?”

아드리안은 강의가 없는 수요일 정도는 조금 더 늦잠을 자거나 푹 쉬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왕자에게 2틸론을 빌려주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니.”

미하일은 그 도움의 손길을 단칼에 거절했다. 왕자가 거절할 것을 미리 예감하고 있던 골드 드래곤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일 년 안에 1만 틸론을 모은다는 계획은 어때?”

아드리안은 침대에 기대어 가볍게 안부 인사를 했다. 겉으로는 안부를 가장한 왕자의 신경을 살살 긁는 발언이었다. 미하일이 바닥에서 푸시업을 하던 자세 그대로 붉은 눈을 치켜떴다.

“적어도 하운즈에는 들어가지 그래? 매달 100틸론도 벌고, 훈련장도 공짜로 이용할 수 있잖아.”

“……백삼십.”

미하일은 아드리안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하며 백삼십 번째 푸시업을 이어 했다.

“그리고 틸론을 빌리지 않으면 오늘 점심이랑 저녁은 어쩔 수 없이 ‘오늘의 메뉴’를 먹어야 할 텐데?”

아드리안은 ‘오늘의 메뉴’ 부분에서 손가락 두 개를 얼굴 양옆에서 까닥이며 강조했다.

“알아. 어차피 그때 그 점심이 최후의 만찬이었어.”

응? 아드리안은 의외로 상황 파악을 잘하고 있는 왕자를 다시 쳐다보았다.

“오늘의 메뉴를 먹을 수 있다고?”

“틸론이 없으니 당분간은 그래야겠지.”

별거 아니란 말투였다. 흐음, 골드 드래곤은 고개를 살짝 기울여 왕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카를로와 같은 은발에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하지만 조금은 다를지도? 아드리안은 저 인간과 마찬가지로 이네하트라는 성을 가진 카를로를 떠올렸다.

“귀찮으니까 자꾸 질문하지 마.”

미하일의 싸가지를 다시 실감하기 전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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