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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32화 (32/184)

32화

행정학 교수가 교단에 올라와 있는 어떤 물건을 들어 올렸다. 작은 서류를 담을 수 있는 상자였다. 틸론이라는 게 저기에 담겨 있는 건가? 아드리안 헤더는 강의실 책상에 앉아 그 상자를 살폈다.

“그러면…….”

교수는 그것을 살짝 흔들었으나 소리가 나지 않는 걸 보아 보석이나 동전이 담긴 것 같지는 않았다.

“한번 나눠 드려 볼까요?”

달칵, 교수가 상자의 잠금쇠를 풀었다. 상자의 열린 틈으로 작은 크기의 양피지가 둥글게 말려 있는 것이 보였다. 교수의 손짓에 양피지 조각들이 붕, 공중에 떠올랐다. 그것들은 빠르게 학생들을 향해 날아왔다.

모든 학생의 얼굴 바로 앞에서 양피지가 마치 빨리 손을 뻗어 자신을 펼치라는 듯이 둥둥 부양하고 있었다. 그것에 학생들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양피지를 툭, 손으로 건드렸다.

“여러분들이 루스타바란 왕국에서 얼마나 대단한 가문의 일원인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골드를 가지고 있는지는 이 아카데미 안에서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우선, 여러분의 앞으로 날아간 계약서를 펼쳐 보세요.”

학생들은 손을 뻗어 둘둘 말려 있는 양피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양피지들은 학생들의 손길을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수직으로 쫙 펼쳐졌다. 양피지는 유려한 필체로 가득 차 있었는데, 자세히 확인해 보니 내용은 틸론의 정책에 대한 설명이었다.

“틸론이라는 화폐를 인지했다는 계약서입니다. 계약이 성사되면 여러분들은 이제부터 가지고 있는 틸론을 사용하고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계약자들끼리는 이게 보일 거예요.”

교수는 자신의 머리 위를 검지로 가리켰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학생들이 의문으로 가득 찬 표정을 짓자, 행정학 교수가 웃었다.

“계약을 하면 보인다니까요. 이제, 제 설명을 모두 들은 분들은 계약서 하단에 숨결을 불어넣으세요. 그래,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좋아요.”

아드리안은 양옆의 학생들이 착실하게 교수의 말에 따르는 것을 확인하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종이 앞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마나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따뜻한 바람이 천천히 계약서를 휘감았다. 결국에는 계약서의 하단에 ‘아드리안 헤더’라는 이름이 새겨졌다. 읏, 아드리안은 손등이 간지러워 테이블 밑에 있던 손을 들어 올렸다.

그때였다.

눈앞에 갑자기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환한 빛이 화악- 뛰어들었다가 삽시간에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 밝은 빛에 아드리안은 눈을 살짝 감았다가 다시 크게 떴다. 그제야 골드 드래곤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교수가 처음에 가리켰던 머리 위에 마름모 모양의 특이한 문양이 작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들은 양옆의 다른 학생들의 머리 위에도 하나둘씩 밝은 빛을 일으키며 동시에 생겨났다.

마치 모래가 움직이는 것처럼 스르륵, 서류에 올린 손등 위를 마나가 일으킨 바람이 쓸어갔다. 그 잔잔한 마나의 움직임이 지나간 손등 위에는 바사미엘 아카데미의 문장인 날개 문양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하고 하얬던 손등에 특이한 문양이 새겨졌다.

“첫 자본금으로 모두에게 10틸론을 지급해 드렸습니다.”

교수는 잔고를 확인해 보려면 계약할 때처럼 손등에 숨을 불어넣으면 된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고는 가장 중요한 점을 학생들에게 이야기했다. 바로 이 강의실에 앉은 모든 학생이 관심이 있는 주제였다.

“방금 틸론을 어떻게 버는지 물어보셨죠? 먼저 학교의 가치관에 관해 설명해 드리죠. 아카데미에서는 신입생 여러분들이 사교 모임들에 참여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습니다. 아카데미의 의미가 고작 지식을 배우는 것에서 그치지 않도록.”

아드리안은 뚱한 표정으로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사교 모임이라…… 인간들과 어울리는 것은 어렵지는 않았으나 굳이 나서서 하고 싶지는 않은 행동이었다.

“사교 클럽에 들어가 틸론을 벌어 보세요. 학생회에서 정한 비율로 교내의 학부들에 예산이 돌아가고, 각 클럽은 학부의 특색에 맞추어 클럽의 학생들에게 틸론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교수의 말에 아드리안은 단숨에 틸론 벌이에서 관심을 떼어 냈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것은 약초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지 사교를 위해서는 절대 아니었다. 고작 어린아이들과 친구 놀이나 하려고 아카데미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미하일도 마찬가지였던 듯싶었다. 강의실의 대각선 저 멀리 앉아 있는 미하일의 얼굴이 이쪽에서도 훤히 보였다. 그는 특유의 심드렁한 표정으로 테이블에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한 손에 쥐고 있는 깃펜을 반복적으로 까딱거리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행정 학부 교수의 말을 귀담아듣고 있지도 않아 보였다.

“매년 틸론 사용을 권장하기 위해 우승 상품을 걸고 있으니 관심 있는 학생들은 틸론을 모아 보세요. 단, 강조해 드리고 싶은 점이 있다면 무턱대고 많이 틸론을 모으려 애쓰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돈 관리를 배우는 거지 아카데미에 틸론을 벌러 온 게 아니니까요.”

솔직히 이 강의실에 앉아 있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아등바등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하는 평민이 아니었다. 교수의 말에 불안해하던 학생들이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틸론은 일 년마다 모두 초기화됩니다. 아시겠죠? 많이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어요.”

그럴 생각은 어차피 전혀 없는 아드리안은 편하게 책상에 기대 뚱한 얼굴로 교수를 바라봤다. 그는 아마 이 강의실의 많은 학생 중 틸론에 관심이 하나도 없는 몇 안 되는 존재일 것이었다.

신입생들은 손등에 새겨진 틸론의 문양을 신기하다는 듯이 쓸어 보며, 첫 자본금으로 받은 10틸론을 확인하고 있었다.

자신이 가진 틸론의 양을 확인하기는 아주 쉬웠다. 손등의 문양에 숨을 살짝 불어넣는 것이 전부였다. 학생들은 모두 교수의 말에 따라 숨을 내쉰 후, 입가에 가져다 댄 손등을 떼어 내어 눈으로 확인했다.

빛으로 만들어진 숫자가 ‘10틸론’이라고 공중에 잠시 표시된 후, 스르륵 사라졌다.

10틸론이라…… 교내 신문을 한 달간 구독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아드리안은 곧바로 흥미가 식어 손을 툭 테이블로 내려놓았다.

***

특이했던 행정학 수업이 끝나고, 신입생들이 빠르게 강의실을 나서는 참이었다.

“오, 드디어 바사미엘의 평화로운 일주일이 다 갔나 봐?”

뭐지? 가장 먼저 밖에 나온 학생이 발걸음을 멈췄다. 강의실 밖은 학생들로 가득했다. 그들의 넥타이 색을 보아하니 선배들이었다. 선배들은 신입생들의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던지 복도의 유리창 틀에 앉아 있거나 벽에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켰다.

“수면 시간을 줄여 주는 엘릭서에 관심 있어?”

“……네?”

“교내 아지트가 소개된 지도는?”

신입생들은 당황해서 손을 저으며 말했다.

“무슨, 갑자기 무슨 말-”

“이제 이게 보이지?”

선배 중 하나가 자신의 머리 위에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반짝이는 구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계약의 증거였다. 그것은 이제 교실을 나오고 있는 모든 신입생의 머리 위에서도 빙빙 돌아가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손을 들어 손등에 새겨진 문양을 스윽 쓸어 보았다.

한낱 아카데미의 수업 따위에 쓰이기에는 아까운 정교하고 고상한 마법의 기운이 느껴졌다.

“마나에 반응하는 목걸이도 있어. 어때, 관심 있는 사람?”

대놓고 호객 행위를 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신입생 중에 골드랑 틸론이랑 바꿀 사람 있어? 100골드당 1틸론에 교환해 줄게.”

아직 시세를 모르는 신입생들을 등쳐 먹으려는 놈도 있었다. 물론 아드리안도 시세를 잘 알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시장의 가장 첫 번째 가게에서 물건을 구매하는 멍청이는 아니었다.

“……저요.”

신입생 중 하나가 그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언제나 주머니 사정이 넉넉했던 아이들이 지갑이 비어 있는 틈을 못 견디는 것은 뻔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아카데미의 선배들은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이뤄지는 틈새 장사였다.

“다시 생각하는 게 좋을걸.”

“응?”

아드리안의 부름에 그 학생이 고개를 돌렸다. 학생은 자신을 걱정해 주는 아드리안을 살짝 바라보더니, 괜찮다는 듯이 웃었다.

“……일단 혹시 모르니까 조금만 바꿔 놓을 거야.”

그때였다.

“뭐? 100골드에 1틸론? 너 인마, 그럼 나는 80골드로 해 준다! 훨씬 싸게.”

푸른색 넥타이를 맨 남학생 하나가 신입생의 어깨를 붙잡고 소중한 호구를 중간에서 낚아챘다. 그 거친 움직임에 윽, 신입생이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야, 저기 가서 네 할 일이나 해. 다 된 거 망치지나 말고.”

“너나 꺼져.”

“……꺼지라고? 나한테 감히-”

그때였다.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고학년들 사이에 팔이 불쑥 침입했다. 아카데미 기사 훈련복을 입고 있는 학생이었다.

“어이- 여기 분위기 왜 이래?”

그러자 싸우던 학생들이 뚝 하고 움직임을 멈췄다.

“응? 무슨 일 있냐고.”

기사 학부 학생은 건들건들한 자세로 걸어와 조금 전까지 싸우던 학생들의 어깨를 툭, 손바닥으로 짚었다. 그러자 으르렁대던 남학생들은 잠시간 눈빛을 주고받은 후,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일도 없어.”

그러자 훈련복을 입은 학생이 씨익 웃었다.

“그래야지. 교내 범칙금을 내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싸우던 학생들은 그녀의 훈련복을 확인하고는 “……진짜, 아무 일도 없다니까.”라고 중얼거리며 슬금슬금 멀어졌다.

“다들 명심해. 앞으로 골드와 틸론을 바꿔 준다는 놈이 있으면 바로 신고하도록. 일반 학생은 골드와 틸론을 교환할 수 없어. 행정 학부에서 아카데미를 떠나거나 졸업하는 학생들의 틸론을 골드로 바꿔 주는 경우만 특별히 허용되거든. 다른 건 다 불법이라 신고한 사람에게는 포상금도 있다고.”

바로 조금 전 학생들이 써먹으려 했던 약은 수법이었다. 이런 상황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그녀가 투입되어 신입생들의 첫 행정 학부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것이었다.

“알겠지?”

조금 전 소란을 잠재웠던 기사 학부 훈련생이 복도 벽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오늘은 조용히 기숙사 방 안으로 들어가. 수업에 받은 틸론을 뭣도 모르고 다 써 버리지 말라는 뜻이야.”

신입생들은 영혼이 나간 상태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바사미엘의 평화로웠던 일주일이 이렇게 막을 내렸다.

이제부터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이 진짜 바사미엘 아카데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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