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7. 빈털터리 왕자와 드래곤
함성이 들렸다.
서로를 격려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겁에 질린 자신을 격려하기 위한 함성이었다. 그들의 앞에 벌어진 풍경은 인간이라면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처참한 것이었다.
귀를 찢을 듯이 날카로운 마물들의 소리와 인간들의 비명이 뒤섞였다. 골드 드래곤은 그 난장판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인간과 마물들은 골드 드래곤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스쳐 지나갔다. 골드 드래곤은 그것들을 흘끔 바라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저 멀리 서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은발이었다.
카를로.
골드 드래곤의 표정은 차가웠다. 드래곤은 발을 굴러 높게 공중에 떠올랐다. 그 과정에서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골드 드래곤은 단번에 높은 곳에서 난장판인 아래를 관찰할 수 있었다.
기어이 이런 장면을 내 눈으로 보게 만드는군. ‘전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민망한 상황이었다. 마물 한 마리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일반 병사 열다섯 명의 전력이 필요했다. 마법사가 포함된 전력이라면 그나마 조금 나을지는 모르겠으나…… 골드 드래곤은 지평선 너머를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상대편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마물들이다. 굳이 숫자를 가늠하지 않아도 이미 패배로 결정되어 있었다.
공중에서 조용히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하강했다. 골드 드래곤은 이 전장의 결말을 알고 있을 만한 남자의 앞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마나를 사용하고 있는 골드 드래곤의 금발과 눈동자가 따뜻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드래곤의 발이 하나씩 천천히 땅으로 떨어졌다.
“이게.”
그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어리석은 인간을 책망하기 위함이었다. 골드 드래곤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때였다.
이런…… 골드 드래곤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가, 이윽고 평상시의 크기로 돌아왔다. 전장의 인간과 시선을 마주한 채로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무나 당연히 카를로라고 생각했던 남자는 드래곤도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이게 네가 진정 원하는 것인가?”
뜻밖의 인물이었으나, 드래곤이 눈앞의 인간에게 할 질문은 카를로에게 하려고 했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대답해 봐. 미하일.”
아름다운 갑옷을 입고 전장을 지휘하는 남자가 드래곤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햇볕을 받은 그의 은발이 바람에 흩날려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아카데미 시절의 시절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이제는 갑옷과 커다란 장검이 어울리는 기사였다.
좋은 검이군. 골드 드래곤은 미하일이 가지고 있는 검을 훑었다. 흰 장검에 날개 문양이 아름답게 세공되어 있었다.
미하일은 골드 드래곤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저 얼굴로 화사하게 웃으니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뭐?”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주변의 전장에서 나오는 소음이 커서인가? 골드 드래곤은 고개를 앞쪽으로 내밀어 “뭐라고?”라고 중얼거렸다. 은발의 남자는 그런 드래곤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입술을 천천히 움직였다.
안 들려.
골드 드래곤이 눈살을 찌푸리며 미하일에게 짜증을 냈다. 드래곤의 청력은 인간의 능력을 훌쩍 상회한다. 지금 이 거리에서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미하일이 일부러 목소리를 내지 않는 한은 말이다.
더 크게 말해.
골드 드래곤이 중얼거렸다.
“……아……나.”
그제야 미하일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정확히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골드 드래곤은 그 작은 목소리를 들으려 집중했다.
그때였다.
“그냥 간다?”
아드리안의 눈이 번뜩- 뜨였다. 순식간에 현실로 끌어당겨지는 느낌이었다. 아드리안은 눈가를 짜증스럽게 문지르며 상체를 일으켰다.
“…….”
그러고는 아카데미 기숙사 침대 위에 있는 자신의 몸을 천천히 살폈다. 아주 실감 나는 꿈이네. 아드리안은 손을 들어 올려 머리칼을 스윽, 한번 가볍게 정리했다.
정령학 수업을 들은 후 잠시 기숙사로 들어와 다음 수업까지 기다리는 중이었지. 현실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사실적인 꿈이 머리를 멍하게 만들고 있었다.
“……얼마나 남았어?”
아드리안은 기숙사 방문에 서 있는 미하일을 향해 물었다. 꿈에서 봤던 성인 기사보다는 앳된 모습이었다.
“십 분.”
미하일은 힐끔 기숙사의 시계를 확인하고는 퉁명스럽게 대답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왕자가 수업에 같이 가려고 자신을 친히 기다려 주고 있었다. 왜지?
아드리안은 빠르게 몸을 일으켜 따라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그는 그러면서 기숙사의 방문 앞에 서 있는 미하일을 한 번 더 힐끗 눈으로 확인했다.
“쳐다볼 시간에 빨리 준비하지?”
미하일이 새침하게 재촉했다. 그제야 전쟁터에 선 그를 본 것이 꿈이고 지금이 현실이라는 사실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아드리안은 웃으며 책을 손에 집어 들었다.
흠. 그러고는 작게 헛기침을 하며 미하일에게 준비를 끝냈다는 것을 알렸다. 미하일은 그것을 보고는 기숙사 방문을 열고 먼저 방을 나섰다.
“웬일로 혼자 안 가고 나를 깨웠대?”
아드리안이 웃으며 팔꿈치로 왕자를 툭툭 쳤다. 대답이 예상되긴 했어도 왕자의 입으로 듣고 싶었다. 옆에서 걷고 있는 미하일의 눈썹이 순간 꿈틀거렸지만, 왕자는 순순히 입을 열었다.
“그 문이 열리면-”
미하일의 목소리에 아드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왕자가 지금 짓고 있을 표정이 궁금했다. 그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들어가서 그 샐러맨더를 찾아야 할 것 아니야. 책에서는 샐러맨더가 삼킨 것을 소화하는 데에는 몇 년이 걸린다고 했으니.”
“……거기에 내 의사는 없구나?”
아드리안은 왕자의 말에 질문했다.
왕자는 옆에서 자신을 따라 걸어오는 룸메이트를 뚱하게 바라보았다. 굳이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표정은 ‘그래서 네 의사는 뭔데.’라고 말하고 있었다.
“뭐, 들어가면 죽을 것 같은 문이라잖아.”
아드리안이 웃으며 대답했다. 고작 문에 들어간다고 죽는다는 것을 믿지도 않고, 어차피 드래곤은 죽지도 않기 때문에 정말로 두렵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꼭 들어가 봐야지.”
“……너도 진짜 이상한 성격이야.”
“네 룸메이트가 나라는 걸 감사히 여기도록 해.”
휙, 미하일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걷고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드리안은 그 어린애다운 태도에 나직하게 미소 지었다.
***
행정학 교수는 아주 평범한 인상의 남자로, 학생들이 모두 강의실에 도착하자마자 교단에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바사미엘 아카데미에 입학한 것을 축하드립니다. 바사미엘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상, 여러분들이 루스타바란 왕국을 이끌어 갈 재목이라는 것에 반박할 사람은 아무도 없겠죠.”
교수의 말이 맞았다. 입학 조건이 까다로운 대신 바사미엘 아카데미 졸업자는 왕국 어디서든 환영받았다.
“앞으로 사 년간 여러분들은 바사미엘에서 검술, 마법, 정령술, 연금술, 예술에 대해 지겹도록 공부할 겁니다. ……그러나 아무리 검술이 뛰어난 기사면 뭘 합니까. 기사도, 마법사도, 연금술사도 결국에는 루스타바란 왕국의 사회인이라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행정학 수업에서는 책으로 배우는 지식이 아닌, 진짜 사회를 알려 드리려 합니다.”
교수는 검지손가락을 들어 올려 강의실에 앉아 있는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행정학 수업에서는 관리하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그것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돈 관리를!”
돈 관리? 아드리안은 강의실에 앉아 팔짱을 낀 채 시큰둥한 표정으로 교단을 바라보았다. 아드리안 외에도 많은 학생이 비슷한 표정이었다. 이곳에 있는 학생들은 하나같이 돈이라면 아쉬운 소리 한 번 해 본 적 없는 이가 대부분이었다.
“단.”
교수의 경쾌한 목소리가 아이들의 시큰둥한 표정을 흔들었다.
“아카데미에서 사용하는 화폐는 루스타바란 왕국의 통화인 골드가 아닙니다. 바사미엘에서 생활하는 데에 최소한으로 필요한 물품과 식사는 아카데미가 제공하고 있지만…… 그 이외의 서비스와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서는 아카데미의 통화인 ‘틸론’을 사용하게 됩니다.”
학생 중 몇은 교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바사미엘 아카데미에 대한 소문을 전해 들어 이미 알고 있는 학생도 있었고, 지난 일주일 동안 아카데미의 교정에서 틸론이라는 화폐를 접한 이들도 있었다.
아드리안은 전혀 모르는 사항이었기에 교수의 말을 조금 더 경청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카데미 운영은 행정 학부가 맡고 있습니다. 물론 아카데미 교수진이나 기숙사를 관리하는 부서가 있기는 있지만,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영역은 따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행정 학부는 지금 왕국의 행정부가 하는 것처럼 틸론의 공급량과 학부들의 예산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죠. 다른 학부들도 각각 하나씩 담당하는 역할이 있습니다. 기사 학부는 훈련장과 숲을, 마법 학부는 교내의 모든 마나 충전소를 관리하고 있습니다. 정령 학부는 연금술 학부와 함께 아카데미의 약초밭과 온실을 운영하고 있고, 예술 학부는 축제와 행사를 관리합니다.”
교단에 선 교수가 학생들에게 마지막으로 충고했다.
“왕국의 골드와는 화폐 단위가 아주 다를 거예요. 예를 들면, 교내 신문을 구독하는 데에 필요한 틸론은 한 달에 10틸론입니다.”
……교내 신문을 누가 본다고. 아드리안은 관심도 없다는 듯이 뺨을 긁적였다. 주위의 다른 학생들도 표정은 비슷했다. 차라리 바사미엘 아카데미에 대한 내용이 아닌 루스타바란 왕국에 관련된 신문이라면 구독할 마음이 조금 생겼을 것이었다.
피식, 아이들의 표정을 둘러본 행정학 교수가 나직하게 웃었다. 지금은 저런 표정이지만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르면 아마 모든 학생이 신문을 구독하고 있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교수님.”
유시가 손을 들어 입을 열었다. “네, 말씀하세요.” 행정학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틸론은 어떻게 벌 수 있죠?”
행정학 교수가 그 질문에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