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들어갔다가는…… 다시는 못 돌아올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어.”
“…….”
지하의 청년들이 침묵했다. 무서운 이야기를 듣고 난 바로 직후처럼 그들 사이에는 침묵이 가라앉았다. 심지어 지하의 음산한 바람이 그들을 휩쓸고 지나가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은 것 같았다.
“더 자세히 설명 부탁드려도 될까요?”
먼저 입을 연 것은 아드리안이었다.
억겁의 시간을 살아오는 동안 아주 가끔씩 이상한 경험을 했다. 지금처럼 드래곤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힘의 실체를 마주하는 그런 경험을. 그는 이 연결 고리가 끊어지기 전에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었다.
복도에 함께 서 있던 미하일이 질문을 하는 아드리안을 바라보았다. 자신이야 검을 되찾겠다는 목표가 있다지만, 저놈이 왜 자신을 이렇게 도와주는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더 자세히?”
한스는 입을 열려다 멈칫 몸을 굳혔다. 아드리안과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충격을 되새김질하고 있어서인지 몰라도 순간 신입생의 저 눈빛에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평소처럼 가볍게 웃는 얼굴이 아니었기 때문의 아드리안의 비인간적일 정도로 대칭인 얼굴이 도드라졌다.
드래곤은 눈앞의 것이 고작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겁을 먹고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한스를 향해 안심하라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에 한스가 천천히 굳었던 입술을 열었다.
“일단.”
한스가 중얼거렸다. 조용한 지하실 복도에 한스의 목소리만 울려 펴졌다.
“지하는 으스스하지 않아? 올라가서 이야기하면 안 돼?”
그는 울상을 지으며 양팔을 문질렀다.
“따뜻하고 밝은 햇빛 아래에서 이야기하자.”
“뭐, 그러죠.”
아드리안과 미하일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굳이 여기서 이 어두운 지하에서 이야기할 필요는 없긴 하지.
***
아카데미의 본관과 기숙사 사이에는 커다란 정원이 있었다.
그 중앙 정원에는 여러 개의 분수대와 벤치가 규칙적으로 놓여 있어, 학생들은 수업이 끝난 다음이나 수업과 수업 사이에는 그 정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아드리안과 미하일, 한스는 그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가장 중심에 있는 드래곤이 조각된 분수대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재료와 조각상이 아름답게 조경된 정원이었다.
아카데미 학생들을 위한 야외 파티를 열거나, 초대 인사의 연설을 할 때 사용하는 공간이었다. 이런 밀회를 하기 적당할 정도로 높은 나무들이 잘 조경되어 있었다.
청년들은 그중 하나의 벤치를 차지했다. 차지했다고 해 보았자 벤치에 앉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각자 편한 자세로 선 것이었다.
한스는 강의실 지하에서 나오자마자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기지개를 켰다. 어두운 지하실에 있다가 밝은 햇살 아래에 오니 살 것 같았다.
그는 들어 올렸던 팔을 가볍게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용암 호수보다는 숲이 나았네.”
그는 서 있는 후배 둘을 바라보며 웃었다. 용암 호수라니. 이름만 들어도 위험한 용암들이 부글부글 끓어 대는 것이 상상되었다.
“너희는 대단하다. 겁도 없이 거기를 들어갔어? 그런 소문도 있다고. 아카데미에서 행방이 묘연해진 학생들은 그 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는 소문 말이야!”
아드리안은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요? 지금껏 문으로 들어간 학생은 없었나 봅니다?”
그러나 한스의 얼굴은 심각했다. 그는 자신보다 어린 신입생들을 걱정하는 표정으로 아드리안과 미하일에게 말했다.
“당연하지. 정확한 이유는 몰라도 다들 문 뒤의 풍경은 제각각이었지만, 모두 나처럼 절대로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다고들 하더라.”
그런 ‘느낌’이라.
아드리안은 오히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던 자신의 감각을 떠올렸다.
인간들.
절대로 들어가면 안 되는 곳.
숲과 용암 호수.
이쪽은 드래곤이라는 변수가 있었기 때문에 다른 결과가 나온 걸까?
만약에 왕자만 내려갔다면?
아드리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 중 정답을 알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하나라도 정답을 알게 된다면 그것이 교차가 되어 다른 모든 질문의 정답에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었다.
“다음부터는 절대 들어가지 말고 아카데미 경비대를 호출해. 입학식 때 설명도 들었잖아.”
겨우 한 살 차이인 한스의 걱정에 아드리안과 미하일은 딴청을 피웠다. 그들은 심지어 한스가 말하는 아카데미 수호대의 존재도 지금 처음 알았다. 한스가 그것을 알아채고는 잔소리를 이어 가려던 참이었다.
아드리안이 “아.” 하고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한스의 말을 끊어 냈다.
“혹시, 선배도 지진을 느꼈나요?”
아드리안의 밀빛 눈동자가 마치 한스의 표정을 샅샅이 뒤지는 것처럼 그를 빤히 살폈다.
“어…….”
한스는 아드리안의 질문에 한동안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을 더듬었으나, 이내 포기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모르겠어. 아카데미 본관은 예전에도 이렇게 지진이 잦았다고.”
“그렇군요. 그러면 다른 목격자들과도 이야기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드리안은 한스에게서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전부 캐냈다고 생각하고는 다른 정보원들에 관해 물었다. 한스는 그 말에 지금 당장 떠오르는 학생 몇 명을 추려 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명 있어. 이미 졸업하신 선배들도 있지만……. 지금 재학 중인 친구들을 소개해 줄게.”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아드리안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선배.”
마무리되는 분위기에 다음 수업을 생각하고 있는 한스를 아드리안이 불렀다.
“그 문은 어떤 방식으로 생겨날까요? 마법?”
“아니.”
미하일이 분수대에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켰다.
“마법은 아니야. 마법이었다면 마나의 흔적이라도 남았어야 했는데, 그런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
미하일도 지하실의 문이 있었던 곳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었다. 마나의 흔적을 감지하는 것은 마법의 가장 기초였으므로, 그는 자신의 판단에 한 치의 망설임이 없었다. 한스는 미하일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 캐서린도 그렇게 말했지.”
예술 학부생의 의견보다 마법 학부생의 의견을 들으니 더 신뢰가 갔다. 물론 아드리안은 그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 둘에게 질문을 던지기 위한 장치였을 뿐이었다.
“마법도 아니라면…… 뭐지?”
미하일이 인상을 찡그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정해진 규칙이 있고, 그가 아는 상식 안에서 그 규칙을 거스르는 것은 마법밖에 없었다. 그런데 만약 마법이 아니라면 지하의 문은 이 세계의 기준을 벗어난 것이었다.
아드리안이 가볍게 어깨를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선배님. 문을 봤던 날짜 기억하시죠?”
“어. 어, 아마? 작년 시험쯤이라 날짜를 알아낼 수는 있을 거야.”
아드리안은 한스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한스는 아드리안과 미하일의 열의에 갑자기 팔짱을 꼈다. 정령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은 아닌 것 같은데? 그는 눈앞의 두 사람이 이렇게 열심히 질문하는 데에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뭐가 궁금한 건데. 그냥 호기심이야?”
“뭐, 그렇죠.”
“아니요.”
첫 번째 대답은 아드리안이었으나, 다음의 대답은 미하일의 것이었다.
미하일의 차가운 음성에 아드리안은 분수를 바라보던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미하일의 표정은 마치 샐러맨더를 꼭 잡고야 말겠다는 듯이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호기심이 아니라면 뭔데?”
한스의 말에 미하일이 삐죽 한쪽 입꼬리만 올려 대답했다.
“샐러맨더가…… 제 검을 훔쳐 갔습니다.”
“뭐?”
한스는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옆의 아드리안을 바라보았으나 아드리안의 나직한 끄덕거림으로 그 말이 사실인 것을 알아챘다.
“진짜?”
한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왕자가 착용하고 있는 검대에 그의 검이 없었다.
이상하다.
한스는 예술 학부이기는 하지만 일 년 동안 정령에 관해 공부했던 어엿한 아카데미 학생이었다. 그래서 그는 매우 상식적인 질문을 했다.
“샐러맨더 앞에 검을 놔두기라도 했어? 그냥 가만히 있는 사람의 검을 훔쳐 갈 정령은 아닌데.”
“…….”
그냥 놔둔 게 아니라, 거의 제발 가져가라고 앞에 내밀어 줬지. 아드리안은 웃는 얼굴로 왕자를 돌아보았다.
그에 미하일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휙 돌렸다. 안 그래도 조금 잠잠했던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질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