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망연자실한 채 서 있는 미하일의 등을 아드리안 헤더가 툭툭 두드렸다.
“수업 시작까지 이제 십 분 정도 남았어.”
아드리안이 먼저 선수를 쳤다. 아드리안은 정령학 수업에 지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왕자의 등에 댄 손에 느껴지는 잔떨림이 수상했다.
“설마…… 우는 건 아니지?”
아드리안은 조심스럽게 왕자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 숙인 그의 얼굴을 확인하려 했다.
“울긴…… 뭘 울어…….”
왕자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그의 말과는 다르게 목소리는 흡사 울기 직전의 목소리였다. 하아, 왕자는 숙인 채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름대로 진정하려는 몸부림이었다.
미하일은 한숨을 쉬던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려 붉은색으로 일렁이는 용암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마치 그렇게 노려보면 당장이라도 샐러맨더가 다시 용암 호수 위로 튀어 올라올 거란 듯이.
홧김에 용암에 뛰어들 기세라 드래곤은 왕자의 어깨를 한 손으로 짚었다. 왕자의 자살을 지켜본 유일한 목격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길래 왜 잘 알지도 못하는 동물을 건드려. 자, 너무 상심하지 말고.”
검은 새로 사면 되잖아- 아드리안이 무심하게 위로하는 중이었다. 왕자가 고개를 번뜩 옆으로 돌렸다. 눈빛이 날카로운 것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는 듯했다. 어쨌든 옆에서 위로해 주는 사람에게 보여 줄 표정은 아니었다. 미하일의 날카로운 눈에 물기가 어려 왠지 모르게 측은해 보이긴 했다.
“더 아는 건 없어?”
아무리 노려봐도 샐러맨더가 다시 용암 호수에서 고개를 내밀 기색이 없자, 미하일이 침울하게 질문했다.
“샐러맨더는 일생에 한 번 전설의 검을 뱉어 낸다더군.”
괜찮은 위로였다. 바로 다음에 이 말만 덧붙이지 않았더라면 완벽히 괜찮았을 것이다.
“방금 검 하나를 먹었으니, 지금부터 몇백 년만 기다리면 돼.”
“…….”
미하일의 아름다운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붉은 용암 호수의 뜨거운 열기로 그의 얼굴은 살짝 익어 있었다. 아니면 얼떨결에 아끼는 검을 잃어 화가 났거나.
“……그게, 그게 위로야?”
왕자는 무척이나 어이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이 말을 더듬었다. 아드리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인간한테는 아니겠지만 다른 드래곤에게는 위로일 것이었다.
“다시 찾을 방법이 있겠지.”
……없으면 말고.
아드리안은 도통 용암 호수 앞을 떠날 줄 모르는 왕자에게 공수표를 날렸다. 애초에 이럴 거라면 샐러맨더가 도망가기 전에 손으로 붙잡았겠지. 물론 그랬다면 이번 유희가 끝나 버렸겠지만.
미하일이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오늘 세상이 멸망해도 어쨌든 수업에는 출석해야 했다. 아드리안은 발걸음을 좀처럼 떼지 못하는 왕자의 한쪽 팔을 잡고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평소 같으면 손대지 말라며 예민하게 굴었을 왕자는 뒤에서 조용히 아드리안을 따랐다.
정령학 수업 시작에 늦고 싶지 않았던 아드리안은 왕자를 살살 달래면서 지하 계단을 올라왔다. 계단 중간쯤에서 스스로 ‘내가 이놈이 뭐라고 출석까지 챙겨야 하나’라고 생각했다가 다시 입학식 장면이 드래곤의 눈앞에 지나갔다. 분명 출석을 부르곤 왕자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면 모든 학생과 교수가 아드리안을 쳐다볼 것이다. 그 시선에 못 이겨서 다시 여기로 내려와야 할 거고 말이다.
강의실에는 이미 교수가 교단에서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바사미엘 아카데미는 정년 제도라는 게 없었던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될 정도로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었다. 교수는 학생들이 하나둘씩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하면서, 가끔 교단의 자료에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드리안과 미하일은 교수의 인사에 답하며 자리를 찾아 걸어갔다. 아드리안은 교수가 가지고 있는 종이를 힐끔 쳐다보면서 걸어갔는데, 그 종이들은 아카데미 상급생들의 시험지처럼 보였다. 상급생인 것은 확실했다. 왜냐하면, 신입생들은 시험 칠 정도로 뭔가를 배운 적이 없으니.
교수의 채점은 아주 가차 없이 빠르게 진행되었는데, 그 움직임은 아드리안이 강의실 의자에 앉았을 때도 너무나 잘 보였다. 그는 자리에 앉아서도 상급생들의 시험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교수는 교단에서 보이는 시계를 힐끔 확인하더니 자료를 툭툭 정리했다. 수업 시간이었다.
“자. 시작할까요.”
정령학 교수는 천천히 강의실 가장 앞의 벽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벽 한쪽의 어떤 버튼을 누르자, 극단의 커튼처럼 위에서 아래로 무언가가 내려왔다. 벽 하나를 가득 채우는 천이었다. 화가가 어떤 것을 열심히 관찰하고 펜으로 세밀하게 표현한 것 같은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정령들의 이미지였다.
여러 가지 동물들과 식물들이 흑백의 펜으로 세밀하게 묘사된 그림이었다. 그것을 구경하던 아드리안의 눈이 그중 하나에서 멈췄다. 샐러맨더도 그려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확인한 후, 미하일을 힐긋 바라봤다. 왕자도 같은 생각을 했던지 눈을 크게 뜨고 아드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아드리안이 공수표로 날렸던 ‘검을 다시 찾을 방법’이라는 게 진짜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아카데미에서 샐러맨더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 이 수업의 교수일 게 분명했다.
“여러분 중 몇은 정령학이라는 학문에 아주 회의적일 거예요. 괜찮습니다. 이해해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연구한다는 것은 가끔 저조차도 의심을 느끼게 만듭니다.”
교수는 강의실 정면 벽의 그림 바로 앞을 천천히 걸으며 수업을 시작했다.
“고대에는 정령이 실제로 인간들과 함께 살아갔다고 합니다. 인간계에 마나가 풍부해서 대부분의 인간이 간단한 마법 정도는 할 수 있었죠. 그것에 대한 증거는 여러 서적과 벽화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으니 나중에 시간이 되면 함께 보죠.”
교수는 당장이라도 학생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자료가 많은지,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요.”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금세 원래의 차가운 것으로 돌아왔다.
“아주 희박한 인원만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왜냐? 인간계가 움직일 수 있는 마나가 옅어졌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라 마나가 풍부한 곳을 좋아하는 정령들은 점차 인간들의 주변에서 모습을 감추었죠. 아쉽게도…….”
정령학 교수는 눈을 좁게 뜨고 인상을 약하게 찌푸렸다.
“여러분이 대부분 아시는 정령들은 이런 것들이겠죠?”
교수는 이미지의 어떤 부분을 손으로 넓게 움직이며 가리켰다. 그 부분에는 불을 뿜는 도마뱀이나 기다란 뱀, 두더지처럼 생긴 바위 같은 것이 그려져 있었다.
“이런 개체들 말이죠. 하지만 정령의 범위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습니다. 나중에 가서 보면 알겠지만, ‘아니 이런 것도 정령인가요?’라고 말하게 될 거예요. 예를 들자면…….”
교수는 그림에서 원하는 부분을 검지손가락으로 찾다가 어딘가에서 멈췄다.
“이 올챙이 같은 생긴 생물도 정령이랍니다. 타드폴리라는 이름을 가진 정령입니다. 이 개체들은 아주 적은 마나에서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아직도 몇 호수에서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타드폴리처럼 우리 주변에 아직 함께 살아가고 있는 고대 정령들은 많아요. 다만 다른 동물들과 섞여서 쉽게 찾지 못하는 것뿐이죠.”
교수는 타드폴리의 세밀화의 어떤 부분 위를 검지로 둥글게 그렸다.
“타드폴리의 배 부분에서 파란 반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이 바로 물에 섞인 마나를 순수하게 걸러 내고 흡수시키는 역할을 하는 기관입니다. 겉보기에는 올챙이와 똑같이 생겨서 가끔 학자들도 포획했다가 다시 호수에 놔주고는 합니다.”
교수는 뭔가를 떠올렸는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강의실 정면의 종이를 한번 툭, 하고 손등으로 치고는 이 수업의 전체적인 느낌을 알려 주었다.
“우리는 이렇게 다양한 정령들을 하나씩 살펴볼 거예요. 우선 일 학년이니 그 정도로 시작해도 충분하겠죠. 정령이라는 존재에 익숙해지는 시간이죠.”
다행히 어려운 수업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왠지 이 수업이라면, 아드리안이 입학을 결심했던 약초들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생명체는 끝없이 변화한다. 드래곤이 고대에 알았던 개체 중, 삼분의 일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부분은 새로운 생명체들이 메꿨고, 드래곤이 자신의 레어에서 찾았던 약초도 비슷한 경우였다.
“혹시 질문 있나요?”
정령학 교수는 당연히 아무도 질문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음에도, 강의실의 학생들을 한번 죽 둘러보았다.
“네.”
강의실에 있던 학생들이 주위로 고개를 돌려 도대체 누가 첫 수업부터 질문을 하는지 찾았다. 아드리안도 마찬가지였다. 드래곤은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아… 그래 당연히 질문해야지.’라는 눈으로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질문 있습니다.”
미하일이 강의실 뒤쪽에서 자신의 팔을 번쩍 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