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학생들이 모두 외부로 나간 바사미엘은 아주 조용했다.
따사로운 햇볕이 아카데미의 아름다운 덩굴 조형으로 조각된 유리창을 통과해, 깨끗하고 흰 대리석 바닥을 비추었다. 아드리안 헤더는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 유리창들을 지나치며 복도를 홀로 걸었다.
그가 걸어갈 때마다 학생용 구두가 대리석 바닥을 규칙적으로 두드려 청량한 발소리가 복도를 채웠다.
아드리안은 어제 걸었던 아카데미 주변의 숲속 산책길을 다시 찾았다. 아카데미의 숲에는 아주 커다란 호수가 있었다. 맑은 호숫물에 햇살이 닿아 반짝거리는 모습을 죽치고 앉아 보고 있는 것만큼 드래곤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때였다. 숲속에 누군가 있었고, 그 인기척이 그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인기척의 주인을 멀찌감치 알아채고도 굳이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휴일에 굳이 이 깊은 숲속까지 들어온 사람이었다. 아마 다른 이에게 방해받고 싶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지만.
……상대방은 다르게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오. 여기에 사람이 있네.”
데클레어 파스터였다. 그녀는 아주 편안한 차림에다 기다란 회색 머리를 느슨하게 묶은 모습이었다. 볼 때마다 편안해 보이는 게, 본래는 항상 이렇게 생활하는 것 같았다.
교장은 호수 앞 나무 그늘에 대충 몸을 기대어 누워 있는 아드리안을 위에서 쳐다보다 드래곤의 발에 시선이 멈췄다.
그녀는 아드리안의 발치에 토끼 몇 마리가 잠들어 있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것들은 조금 전까지 만져 달라고 치대는 것보단 나아 그대로 내버려 두었었다. 토끼들은 교장이 아드리안 쪽으로 걸어오자 기민하게 잠에서 깨어 큰 귀를 쫑긋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학생이 키우는 건가……?”
“아니요.”
아드리안은 툭, 하고 발을 움직여 그중 한 마리의 옆구리를 살짝 건드렸으나 토끼는 아드리안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들은 잠에서 깨자마자 아드리안의 발에서 조금 뛰어 올라와 포옥, 드래곤의 허벅지 위에 올라와 앉았다.
“아니어야 할 거야. 기숙사에서 동물 키우는 건 금지니까.”
“진짜 아닙니다.”
아드리안은 교장에게 말했으나, 어차피 그녀는 믿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교장은 어이구, 라고 늙은이처럼 소리를 내며 아드리안의 바로 옆 풀밭에 앉았다. 아드리안은 그 모습을 힐끔, 한번 보고는 다시 평화로운 호수로 고개를 돌렸다.
나무 그늘 밑에 앉은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풀밭에 앉아, 따사로운 햇살에 반짝이는 호수의 물결을 바라보았다.
아드리안이 그 평화로움을 깨기 전까지, 둘은 한 마디도 말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드래곤은 멍하니 있다가 번뜩, 누가 옆에 아직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갑자기 이 나무 아래가 교장의 휴식 공간이고, 자신이 지금 방해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드래곤은 조용한 휴식이 좋았으나 굳이 이곳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여기에 자주 오세요?”
“유일하게 나 혼자 쉴 수 있는 공간이지.”
아, 혼자 있고 싶다는 거군. 아드리안은 말속에 숨은 뜻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앉았던 풀밭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움직임에 드래곤 주위에 있던 토끼가 화들짝 놀라 덤불로 깡충깡충 뛰어갔다.
“그렇군요. 그럼 남은 주말 잘 보내세요.”
“뭐야. 어디 가?”
데클레어 교장이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자리를 뜨려는 아드리안을 바라봤다.
“네? 아. 혼자 계시고 싶은 줄 알고.”
그리고 아드리안도 휴식 시간에 굳이 어색한 사람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교장이 어른스럽게 자리를 피해 달라고 했을 때, 내심 그것을 반겼던 것이었다. 데클레어는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아드리안의 팔을 잡고 바닥으로 내렸다. 그 움직임에 아드리안이 다시 풀썩, 하고 교장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드리안은 상처와 굳은살로 거친 교장의 손바닥이 닿았던 팔을 한번 쓸어내렸다.
“원래 애들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말이야. 넌 조용해서 괜찮아.”
아카데미의 교장이 할 말은 아닌 듯싶으나, 아드리안은 뭐 어차피 아이가 아니었으므로 굳이 상처받지 않았다.
교장은 “앉아, 편하게 앉아.”라고 말하며 아드리안의 등을 두드렸다. 정말로 편하게 앉으려면 교장이 옆에 없어야 했지만 뭐, 아드리안은 천천히 다시 아까 앉았던 곳에 앉았다.
“애가 싸가지 없지?”
“……예?”
“미하일 말이야.”
“…….”
함정 질문인가?
아드리안은 담담한 표정으로 호수를 보고 있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는 질문의 진의를 고민했다. 데클레어는 담담하게 왕자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막 첫 전쟁을 끝내고 잠시간 쉬는 기간이었어. 폐하가 잠시 성에 머물면서 쉬라고 하셨고, 왕성이 대접이 좋긴 하다만…… 그다지 재미는 없었거든? 매일 아침 훈련장으로 갔는데, 그때 왕자를 만났지.”
데클레어 교장은 왕자의 어릴 적 동그랗고 하얀 얼굴을 떠올렸다.
“내가 좀 더 여유가 있었을 때 가르쳤다면, 인성 교육까지 했을 텐데…… 그때는 나도 이것저것 전쟁도 나가느라 바빴거든. 그리고 난 왕자가 들어야 할 수많은 수업 중에 딱 하나. 검술 수업밖에 안 했다고.”
데클레어는 회상하는 듯이 시선을 위로 들었다. 그녀가 왕자 인성 교육을 하기에는 국력 낭비 수준 아닌가?
“처음 만났을 때, 애가 아주 심심해 보였어. 아주 훈련장에 죽치고 앉아 있더군.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으면서 말이야. 형들은 뭐 행정 교육이다 뭐다 열심히 듣는데…… 그놈은 도통 왕좌에는 관심이 없었거든. 그리고 취미를 가질 만한 게 뭐가 있겠나. 뭘 가져다줘도 뚱-했지. 그 녀석이 악기 다루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있나? 최악이라고. 취미는 좋은 거라고 하기 싫다는 걸 억지로 시켜 봤더니…… 아주 가관이었지.”
왕자의 피아노 발표회 날이 데클레어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명치까지 오는 작고 귀여운 은발의 남자아이가 피아노 발표용 정복을 맞춰 입고 무대를 걸어갈 때만 해도, 관중들은 열광적으로 손뼉을 쳐 주었다. 아름다운 은발 머리와 맞춘 새하얀 정복은 아이를 인형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손뼉을 치던 관중들은 아이가 피아노 연주를 시작하자마자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왕자의 피아노 선생만이 ‘그러길래, 제가 이런 연주회는 안 열어도 된다고 했잖아요…….’라고 무언의 눈빛을 보냈을 뿐이었다. 왕가의 식구들은 아주 안타까운 왕자의 피아노 연주회를 녹음한 영상석을 그 이후로 한 번도 다시 틀어 보지 않았다.
“아무튼 어렸을 때는 귀여웠다고. 사회성은 그때도 부족하긴 했지만, 옛날에는 그래도 뭘 가르쳐 주면 얼마나 반짝거리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던지……. 지금은 뭘 가르쳐 주면 죽자고 그거 써 보겠다고 나한테 달려드는데 말이야.”
어휴, 생각만 해도 징그럽다. 교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미하일을 욕했다.
“그래도 아카데미에 와서 친구를 사귀어서 다행이야.”
교장은 투박하고 근육으로 꽉 찬 팔로 옆에 앉아 있는 아드리안의 등을 세게 두드렸다. 정신을 놓고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아드리안이 그 공격에 윽, 하고 교장에게 찡그린 표정을 보여 주었다. 드래곤은 굳이 교장에게 미하일과 친구가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네.”
아드리안은 호수를 보며 영혼 없이 대답했다. 데클레어는 그런 드래곤을 보며 “아주 잘생겼구만, 여자 친구는 있고?”라며 길거리 건달처럼 웃으며 말했다. 있으면 주말에 이렇게 혼자 안 있겠죠. 아드리안은 하하. 라고 작게 반응해 주었다.
두 사람이 앉아 있던 풀밭에서 교장이 먼저 일어났다.
“그럼.”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는 이곳에 왔을 때처럼 교장은 한 번에 몸을 일으켜 산책을 이어서 했다. 골드 드래곤은 그대로 풀밭에 앉아, 그녀는 참 이상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왕자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는 거치고는 별로 영양가 있는 정보를 주지는 않았다. 보통 칭찬이나 장점을 말해 주지 않나?
교장이 떠나자마자 옆 덤불에 뛰어들었던 토끼가 슬금슬금 아드리안에게 다가왔다.
아드리안은 잠깐 침묵하며 방금 무슨 대화를 한 건지 생각했다가, 마침내 적절한 단어를 찾아냈다.
긴급 학부모 면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