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아카데미 입학 후 첫 주말이었다.
아드리안 헤더는 느긋한 걸음으로 아카데미 주변의 숲을 산책했다. 숲은 평화롭고, 다양한 동식물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식물은 뭐 그것들의 반응을 알 길이 없으나,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아드리안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란 것을 알아차리곤 했다. 특히, 약하고 여리며 다친 것들은 아드리안을 매우 잘 따랐다. 그에 비해 강하고 단단하며 힘이 있는 것들은 드래곤을 본능적으로 경계했다.
아카데미의 숲에는 작은 동물들이 많았다.
아드리안의 무심한 발걸음에도 토끼 몇 마리가 스스로 부드러운 털을 그의 발에 비벼 대고는 했다. 물론 드래곤은 그것들을 위해 발을 멈춰 주거나, 무릎을 굽혀 쓰다듬어 주지는 않았다.
아드리안은 동물 몇 마리와 함께 걷다가, 호수에서 물을 마시며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아주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오후의 숲을 천천히 한 바퀴 걸은 뒤, 아드리안이 아카데미 중앙 정원을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중앙 정원에서 기숙사로 가는 반대편 길 끝의 어떤 건물에는 아직도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주말에 누가 아직도 불을 켜고 있지? 아드리안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그 방향으로 향했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불이 켜져 있는 건물은 훈련장이었다.
훈련장의 커다란 양 문을 열고 들어가자, 후끈한 열기가 아드리안의 얼굴에 닿았다. 그리고 훈련장을 사용하고 있는 사람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미하일이었다. 왕자는 그의 몸통을 크게 부풀렸다가 꺼트리며 거칠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고 있었다.
터벅터벅- 커다란 훈련장을 걸어가는 아드리안의 발걸음 소리가 귓가에 크게 울렸다.
“아주 열심이네.”
훈련장 중심에 녹초가 되어 뻗어 있는 왕자는 숨이 여전히 모자란지 아드리안의 목소리에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드리안은 무릎을 굽혀 왕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미하일은 온몸으로 숨을 쉬었다 들이마시고 있었다.
골드 드래곤은 훈련장의 매끄러운 바닥에 흐트러진 밝은 은발을 빤히 바라보았다. 검을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저 집안의 숙명일지도 몰랐다.
아드리안의 멋들어진 입술이 열리며 저도 모르게 질문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소드 마스터가 되어서 왕위를 차지한다든가, 전쟁을 일으키려는 건 아니지?”
이상한 질문에 훈련장에 누워 있던 미하일이 단번에 눈가를 찌푸렸다.
“……질문이 왜 그딴 식이야?”
미하일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드리안은 손가락을 펼쳐가며 미하일에게 대답했다. 훈련장 바닥에서 천천히 호흡하는 왕자에게 한 발짝 걸어갔다.
“궁금할 만하지. 너는 이미 권력도 가지고 있고.”
미하일은 아드리안이 뭐라고 말하는지 들어 보겠다는 자세로, 말을 이어 가게 놔두었다.
“외모도 지금 이 정도면 훌륭하지. 딱히 결혼을 반대할 만한 이유나 인물도 없을 거야. 돈이라면 루스타바란 왕국의 국고는 탄탄하기로 유명하고. 그런데도 매일 이렇게 힘들게 훈련하는 게 대단해서 말이야.”
뭔가 특이하잖아. 아드리안은 왕자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소드 마스터는 목표가 아니었다.
누군가 소드 마스터가 되려고 하는 것은, 엄청난 부와 명예 그리고 뭐, 사랑이나 성공을 위해서였다. 아드리안이 아는 모든 인간은 그랬다. 그러나 왕자는 이미 그런 것들은 다 가지고 있었다. 소드 마스터가 아니라도 언제든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루스타바란 왕국의 왕족과 귀족들은 아드리안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소드 마스터가 되어서 전쟁을 일으킨다고 하면?”
미하일이 차갑게 웃었다. 아드리안은 그의 붉은 눈동자를 마주 바라보았다. 카를로의 것과 지나치게 똑같은 색이었다. 흐음- 드래곤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
“그렇다고 해도 네가 뭘 어쩌게.”
“뭐…… 내가 뭘 할려고 물어본 건 아니고.”
인간들이 전쟁을 일으키건 말건 드래곤이 상관할 바는 아니긴 했다. 할 말이 없어진 아드리안이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아드리안의 등 뒤에서 왕자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냥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하는 거야.”
아드리안은 뒤에서 들리는 왕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왕자의 목소리가 낮게 깔려 있었다.
“거기에 이유가 필요한가?”
아드리안은 훈련장의 바닥에 누워 있는 왕자를 한번 크게 훑었다. 왕자가 검에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한들, 소드 마스터는 솔직히 다른 차원이었다. 그리고 능력에 비해 너무 높은 목표를 가진 인간은 때론 불행했다. 그런 인간들을 수없이 봐 왔던 드래곤은 어린 인간에게 충고해 주었다.
“교장을 봐. 세상에는 노력으로 안 되는 것도 있어.”
왕자는 아드리안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네놈이 뭘 알아? 노력으로 되면 어쩔 건데.”
아드리안은 미하일의 날 선 대답에 정신을 차렸다. 그가 대화하고 있는 것은 인간들의 대표가 아니라 고작 열일곱 살 먹은 청년이었다. 충고할 대상이 잘못되었다.
“뭐, 열심히 하는 놈한테 괜한 시비 거는 것처럼 들렸겠군. 미안. 난 방으로 돌아갈게.”
“거기 멈춰.”
미하일은 훈련장에서 목검을 한 손에 잡고, 짓씹듯이 아드리안의 등에 말했다.
“야!”
그러나 아드리안은 한참 어린 인간의 부름에 발걸음을 멈춰 주지 않았다. 그때였다. 탁, 아드리안은 팔을 들어 올려 빠르게 공기를 가르고 날아드는 목검을 잡아챘다.
흠. 골드 드래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침음을 흘렸다.
“말 안 통한다고 검부터 들이대는 거, 도대체 어디서 배워 먹었어.”
아드리안이 가볍게 몸을 돌려 미하일의 검을 툭, 낚아채려는 순간이었다. 아드리안이 몸을 돌리자마자, 그의 얼굴 바로 앞에 왕자의 아름다운 얼굴이 있었다. 미하일이 그의 손으로 아드리안의 멱살을 잡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래곤은 순순히 그 손힘에 끌려가 주었다.
아드리안이 솔직히 말하자면, 아이를 다루는 데에는 서툴렀다. 그래서 때로는 상대의 화난 마음에 더 큰불을 지르기도 했다.
두 청년의 눈동자가 정면으로 마주친 채 서로를 한동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골드 드래곤의 입술이 열렸다.
“……저녁은 먹었어? 같이 식당이나 갈래?”
미하일은 순간 가득 찼던 분노가 사그라든 듯이, 억세게 잡고 있던 아드리안의 멱살을 툭 놓았다.
“신경 꺼.”
아드리안은 멱살이 잡혔던 교복 부분을 손바닥으로 탁탁 털어서 정돈했다. 얼마나 억세게 잡아챘는지, 구겨진 교복은 다시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룸메이트라 어쩔 수 없이 신경 쓰이는데 어떡하라고.”
미하일은 실실 웃으며 자신에게 대답하는 아드리안을 바라보면서 기가 찬다는 듯이 하, 하고 짧게 혀를 찼다.
특이한 놈이었다. 왕족이라면 설설 기는 평민들만 봐 왔는데 이놈은 아주 신선했다. 너무 신선해서 샐러드로 먹고 싶을 정도였다.
“나가.”
미하일은 검지로 문을 가리키며 아드리안에게 짓씹듯이 이야기했다.
아드리안은 입술을 늘여 피식하고 비웃으며 가볍게 발걸음을 돌렸다. 아니면 그냥 아니라고 말하면 되는 걸 저런 반응이라니.
***
카를로 데 이네하트가 황금으로 만들어진 왕좌에 앉아 있었다. 그는 한쪽 팔을 의자에 가져다 대어 고개를 기댔다. 그의 왕좌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계단 가장 위에 놓여 있었다.
“거기 있나?”
“…….”
텅 비어 있는 왕성의 집무실에서 카를로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루스. 바로 옆에 있지?”
드래곤은 카를로의 중얼거림에 대답하지 않았다. 왕좌 뒤의 그림자 안에서 드래곤의 금빛 눈동자가 반짝거릴 뿐이었다. 카를로는 입꼬리를 끌어당겨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거기서 계속 지켜봐. 결국 네 덕분에 이뤄 낸 결과이니.”
골드 드래곤은 그의 왕좌 계단 아래에 피를 흘리며 떼로 죽어 있는 인간들을 어둠 속에서 바라보았다. 그의 몸은 어둠에 잠겨, 밝은 금색 눈동자만 빛을 내고 있었다.
“우리 왕국의 이름을 생각해 냈어. 루스.”
카를로는 그의 눈을 내리깔아 금으로 만들어진 자신의 왕좌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루스타바란.”
그는 왕좌의 발치에 놓여 있던 허리를 숙여 검을 들어 올렸다. 그것은 인간들의 피에 푹 젖어 카를로가 검을 들어 올리며 흔들릴 때마다 핏방울이 바닥에 궤적을 그렸다. 왕좌의 아래에 죽어 있는 수많은 시체에서 흘러내리는 핏방울과 같은 색이었다.
“우리는 아주 강한 나라를 만들 거야. 루스타바란은 대륙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될 거다.”
누가 우리야.
골드 드래곤은 그러나 카를로에게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