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다행히 던전은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루스 페니건을 여기까지 데려다준 마부가 던전 앞을 떠난 것은 조금 전이었다. 그는 던전을 무서워하면서도, 루스를 향해 고개를 몇 번이나 숙이며 끝까지 감사 인사를 전하다가 마지못해 이곳을 떠났다.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인 던전에 스스로 들어간다는 것을 말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루스는 마차가 이곳을 떠나자마자 귀찮은 인간 하나가 드디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카를로 기사단과 루스는 던전의 입구에 서서 다시 한번 서로를 확인했다. 이 입구에 들어서는 것은 선택일지 몰라도, 나오는 것은 의지만으론 불가능할지도 몰랐다. 카를로는 자신의 기사단을 향해 의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모두 목숨을 걸고 이 던전을 돌파할 생각이었다.
루스는 그것을 바라보면서 인간들이란 대단한 종족들이라 생각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살아가는 것들은 가끔 드래곤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어떤 목표에 목숨을 내던졌다. 카를로의 붉은 눈동자가 기사단의 옆에 조용히 서 있는 루스에게 향했다.
루스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를로는 그 움직임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는 던전의 입구로 발을 가장 먼저 디뎠다.
기사단과 드래곤이 통과한 것은 어떤 형용할 수 없는 투명한 막으로 막혀 있는 동굴의 입구였다. 그들은 어두운 동굴에 완전히 들어오자마자, 코를 찌르는 냄새에 인상을 찡그렸다.
기사 중 하나가 불평했다.
“욱, 시체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이건 시체 냄새가 아니야. 유황이지.”
드래곤은 소란스러운 일행들을 진정시켰다. 시체 냄새라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유황? 그러면 위험한 건가?”
루스는 카를로의 얼굴을 보았다.
“당연하지.”
드래곤은 별것을 묻는다는 투로 대답했다. 이번 유희에 그는 마법사였다. 어느 정도 이 그룹에 도움은 줄 생각이었다.
“어두운 지하 동굴에서 유황 냄새가 난다는 건…….”
드드드드——
던전의 동굴이 순간 잘게 떨리며 진동했다. 동굴 안에 서 있는 모든 일행이 넘어지지 않으려 몸의 중심을 낮췄다.
“골렘들이 살기에 딱 좋다는 뜻이야.”
루스가 말을 마무리하는 것과 동시에 지진이 멎었다. 하지만 지진과 다른 굉음이 계속해서 저편에서 들렸다. 바위와 돌이 스스로 구르고 있었다. 그것들은 어떤 규칙이라도 있다는 듯이, 특정한 곳으로 굴러갔다. 그리고는 돌과 바위가 모여 어떤 형체를 만들어 냈다. 그냥 돌무더기가 아니었다. 형체를 갖춘 돌무더기는 돌이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마치 커다란 산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골렘이다! 모두 전열을 갖춰!”
카를로는 가장 선두에서 자신의 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루스는 마나를 천천히 일으키며 두 팔을 들어 올렸다. 반짝이는 마나가 함께 들어온 일행을 천천히 감싸 안았다.
카를로는 반짝이는 마나를 알아보고는 루스에게 눈인사했다. 루스는 당연한 일을 했다는 듯이 다음 마법을 시전할 준비를 했다. 골렘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감사를 표현할 시간은 나중이었다.
루스는 한쪽 팔을 크게 앞으로 뻗어, 모든 인간들이 들고 있는 검에 강화 마법을 걸었다. 골렘의 바위를 가르려면 일반적인 검으로는 힘들었다. 카를로와 기사들은 합을 맞춘 적이 많은지 빠르게 전열을 가다듬었다. 카를로가 가장 먼저 골렘을 향해 달려갔다. 강화 마법이 걸려 있는 검은 골렘을 부드럽게 횡으로 갈랐다. 인간들보다 몇 배는 커다란 덩치를 가진 바위였다. 골렘 무리를 해치우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던전의 입구가 아직 그들의 바로 뒤였다.
“지금부터 최단 거리로 간다.”
카를로는 골렘이었던 돌조각을 검에서 털어 내며 말했다. 카를로는 시간이 없었다. 나이는 어렸으나, 청년은 자연스럽게 무리의 주목을 집중시킬 만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다.
***
그들은 계속해서 지하로 전진했다. 이 끝에서 무엇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는 몰라도, 밑으로 가면 갈수록 이전보다 강한 몬스터와 만났다.
골드 드래곤은 일행들과 걸어 내려가며, 계속해서 주위를 살펴보았다.
의외로 던전 아래까지 내려오기는 무척 쉬웠다. 카를로가 말했던 것처럼 일행들이 대륙 내에서 수준급의 기사들이라 그런 것도 있었다. 루스의 적절한 마법 실력도 큰 보탬이 되었고 말이다.
하지만 너무 수월했다. 겨우 이 정도 던전을 몇백 년간 인간들이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루스는 미간을 좁혀 던전 지하에 있는 신전의 커다란 문을 바라보았다. 던전 입구의 골렘은 물론이고, 몇 마리의 몬스터를 맞닥트린 루스와 카를로 일행은 모두 힘을 합쳐 그것을 죽였다. 소문대로 몬스터가 몇 마리 있기는 했다. 그러나 너무 쉬웠다.
진짜 이게 끝이라고?
일행은 던전의 동굴을 벗어나 보이는 건물에 발을 멈췄다.
그곳에는 신전이 있었다. 광활하고 어두운 동굴에 홀로 밝은 빛을 내는 흰 대리석으로 세워진 신전이었다. 신전에는 커다란 문이 있었다. 루스는 미간을 좁혀 신전의 문을 바라보았다. 기사 한 명이 굳은 표정으로 대리석 문에 두 손을 가져다 댔다. 많은 힘을 쓰지 않아도, 신전의 문은 마치 누군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스르륵, 가볍게 열렸다.
“……너무 쉽잖아?”
기사 한 명이 중얼거렸다. 떡하니 나타난 신전과 쉽게 열리는 문에 그제야 드래곤뿐만 아니라 인간들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의심은 금방 사라졌다.
신전의 커다란 문이 열리자, 내부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흰 대리석 바닥과 기둥, 그리고 넓은 신전의 복도에 그들이 찾아 헤맸던 보석이 멀리서도 보였다. 일행들이 서 있는 곳과는 거리가 조금 있었다.
“찾았어……! 드디어 발견했다……!”
“……진짜 저게 그 보물이라고? 우리가 해냈어!”
“아니.”
루스는 이미 보물을 차지한 듯 환호성을 내지르는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드래곤은 던전 깊은 곳, 저 멀리서 반짝이며 인간들을 유혹하는 보물을 바라봤다. 그는 보물의 진위를 가늠하려는 듯 눈을 가늘게 좁혀 미간을 찡그렸다.
“마지막까지 의심을 놓지 마. 어차피 다시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면 실패야.”
“제기랄. 여기서 실패하면 아까워서 어쩌지?”
……여기서 죽으면? 다시 다른 동료를 구해 와서 도전해야 한다.
그러나 드래곤의 심드렁한 속과는 다르게 겉모습은 착실히 인간을 연기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처럼 신기하다는 듯이 신전 내부를 두리번거렸다는 뜻이었다.
“이번에 성공하면 우리가 이 대륙의 운명을 바꿀 거라고!”
기사 한 명이 크게 외쳤다.
카를로가 굳은 결심을 하고 신전 안으로 첫발을 들였다. 신전은 조용하게 인간 네 명과 드래곤 하나를 받아들였다.
그들이 보석을 향해 조심스럽게 걷고 있을 때였다.
“와. 저걸 봐.”
일행 중 한 명이 검지로 천장을 가리켰다. 그에 루스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곳에 천장의 벽화가 있었다. 지하의 신전이 정말로 야외에 있는 것처럼 사실적인 하늘을 묘사한 그림이었다. 푸른 하늘빛과, 흰 구름이 천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활을 한 손에 들고 있는 천사가 구름 위에 앉아 있었다. 고작 벽화였지만 화가의 역량이 무척 뛰어났던 모양인지 천사가 마치 정말로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천사의 자애로운 표정과 웃고 있는 눈은 신전에 들어온 그들을 따뜻하게 환영하고 있는 듯했다.
“아름다워. 황홀한 그림이군.”
인간들이 그 자리에서 발을 멈췄다. 인간이라면 가던 길을 멈출 수밖에 없는 벽화였다. 잠깐 천장의 벽화를 구경하던 인간들은 곧이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저기까지 걸어가면 되는 건가?”
“다행히 아무 일도 없군.”
기사들은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며 앞서 걸어갔다.
하지만 드래곤은 그 자리에 멈춰, 여전히 천장의 벽화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루스는 고개를 들고 천사를 바라보았다. 드래곤은 그림 속 천사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기시감이 들었다. 그림이 너무 사실적이어서? 아니. 이 느낌은 그 이상이었다.
이 느낌은.
마치…… 저것이 정말로 천사인 것처럼 느껴졌다.
웃음을 짓고 있는 천사에서 눈을 떼려는 순간, 드래곤은 섬뜩한 기운을 감지했다. 천사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그것의 눈은 신전으로 걸어가고 있는 일행들을 향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벽화 속의 천사는 그가 가지고 있는 활을 들어 올려 팽팽히 당겼다. 그것은 인간들만을 겨냥했다. 마법의 영역을 벗어난 움직임이었다. 드래곤이 즐겨 사용하던 마나와는 차원이 달랐다. 더 깨끗하고, 순도가 높았다.
드래곤은 그 마나를 느끼자마자, 무력감을 느꼈다. 저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