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루스 페니건과 카를로 데 이네하트가 차를 모두 마시고 가게를 나선 참이었다.
던전 바로 옆에 만들어진 이 마을은 평화롭고 조용한 분위기였다. 조그마한 시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이라 그런지 투박한 길 위에는 인간들이 별로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며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카를로는 옆 남자의 실력에 대한 의심을, 루스는 마을의 울퉁불퉁한 돌바닥에 대한 불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조용한 마을의 한쪽 길에서 말이 흥분해 날뛰는 소리가 들렸다. 두 남자는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떤 커다란 마차 한 대를 끌고 있는 말이 놀라 펄쩍 뛰어오르고 있었다.
으아아악!
마차를 몰던 마부의 비명이 들렸다.
동시에 말이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마차가 뒤틀리듯이 요동쳤다. 커다란 굉음과 함께 마차가 뒤집히면서 밑에 말과 마부가 함께 깔린 듯 보였다.
“윽, 도와주세요! 누구 안 계십니까?”
마부의 애타게 도움을 구하는 목소리가 그 잔해 밑에서 들렸다. 그에 카를로가 빠르게 발걸음을 돌렸다.
“마, 마차에 사람이 깔렸습니다! 도와주세요!”
마차의 잔해 밑에서 한 번 더 남자가 소리를 쳤다.
순식간에 그곳에 도착한 카를로가 상태를 살피며 밑에 깔린 남자를 안심시켰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많이 다쳤습니까?”
카를로는 바닥에 흘러나오는 피를 보고는 조용하게 혀를 찼다.
엄청난 양이었기 때문에, 이 정도 피라면 치명상을 입었을 거라 예상되었다. 그는 커다란 마차 밑으로 두 손을 집어넣어 들어 올리려 했다. 그러나 집채만 한 마차를 단번에 들어 올리기 힘들었다.
골드 드래곤은 가던 길에 멈춰 서서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루스는 그 자리에서 한 손을 뻗었다. 저대로 놔두었다가는 몇 시간 동안 낑낑거리고 있을 기세였다.
드래곤은 눈을 살짝 감았다가, 조금씩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레어에 잠들어 있는 드래곤의 몸에서 마나를 조금 끌어왔다. 그 탓에 따뜻하게 익은 밀색의 눈동자에 금빛의 이채가 맴돌았다. 골드 드래곤은 들어 올린 손의 손가락을 살짝 움직여 마나를 이용했다.
달그락,
바닥에 순식간에 처박혀 망가진 마차의 장식이 조금 움직였다. 마차를 들어 올리려 애쓰고 있던 카를로가 바닥의 쇳조각을 힐끔 보고 ‘저게 갑자기 왜 움직이지?’라고 생각할 때였다.
달그락, 달그락.
그가 손으로 잡은 마차 전체가 지진이라도 온 듯이 잘게 떨었다. 윽, 카를로는 부서지려는 듯이 강하게 요동치는 마차의 전면을 붙잡으려 했으나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때였다.
집채만 하게 무거웠던 마차가 천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바닥과 부딪혀 부서졌던 장식품과 조각난 것들도 함께였다. 그것들은 공중으로 떠오르면서 천천히 마차에서 떨어져 나오기 전에 있었던 자리로 움직였다. 이윽고 깔끔한 마차 한 대가 공중에 바닥과 간격을 둔 채로 둥둥 떠 있는 상태가 되었다.
마법이었다. 아주 정교하고 강력한. 카를로는 고개를 돌려 뒤쪽을 바라보았다. 루스의 흰 손이 이쪽을 향해 뻗어져 있었다. 마법사를 발견한 것만으로 운이 좋다고 생각했으나…… 생각보다 더 커다란 수확일지도 몰랐다.
으으윽-
카를로는 떠 있는 마차 아래에서 들리는 신음에 곧바로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려 두 팔을 뻗었다. 조금 전까지와는 다르게 그는 손쉽게 마차 아래에 깔렸던 마부와 말 한 마리를 꺼낼 수 있었다.
루스는 그 둘이 마차 아래에서 나온 것을 확인하고는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 움직임과 맞추어 마차는 툭, 하고 바닥에 바퀴를 내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멀쩡하게 서 있게 되었다.
“윽, 생각보다 상처가 아주 깊군.”
카를로가 침음에 잠겨 중얼거렸다. 그는 마부가 세게 붙잡고 있는 다리를 눈으로 확인하고는 혀를 찼다. 의원을 찾아야 할 듯싶었지만, 카를로도 루스도 이 마을 사람이 아니었으니 의원을 찾는 데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았다.
“루스 페니건, 혹시-”
그는 그와 동행했던 남자의 신분을 떠올리고는 간단한 치료 주문을 부탁하려 했다. 회복 주문까지 바라지는 않아도 피를 멎게 하는 정도면 충분했다. 그 뒤는 마을의 의원에게 맡기면 될 터였다.
카를로의 말이 끝나자마자 투박한 돌바닥을 걷는 발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카를로의 바로 옆까지 온 남자가 입을 열었다.
“비켜.”
희고 아름다운 손이 불쑥, 카를로와 상처를 입은 말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남자의 손이 애처롭게 신음하고 있는 말의 옆구리에 살짝 얹혔다.
회복.
루스의 무심한 목소리와 동시에 우우웅- 하고 대기의 떨림이 느껴졌다.
잠시 후, 그의 주위로 대기의 마나가 요동쳤다. 자연에서 발생한 마나만으로 충분한 마법이었기 때문에 그 묘한 움직임은 잠시 후 멎었다.
스으윽- 마나가 일으킨 바람이 점차 가라앉았다.
루스의 금을 갈아 넣은 듯한 금발이 그 움직임에 맞추어 붕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루스는 흐트러진 머릿결을 손가락으로 빗어 원상태로 돌렸다.
힘없이 쓰러져 있던 검은 말이 순간 꿈틀거렸다.
골드 드래곤이 누워 있는 말에서 손을 떼자, 검은 털을 가진 말이 언제 다쳤냐는 듯이 눈을 끔뻑끔뻑 감았다 뜨면서 바닥에서 단번에 일어났다. 루스는 똑바로 서 있는 말의 털을 무심하게 슥슥 쓸어 주며 혹시 상처가 더 있나 살펴보았다.
“……마부를 치료해 달라는 뜻이었는데.”
남자의 아름다운 마법에 심취해 있던 카를로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말한 것이었다. 마부는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붙잡고 낮게 신음하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 틈으로 새어 나오는 피를 보아하니 큰 상처였다.
카를로는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당황했다. 무릇 마법사들이란 이해타산에 굉장히 빠르고 자신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 일에는 자신의 마나를 쉬이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루스가 아주 최소한의 마나만, 그리고 마부만 신경을 쓸 줄 알았다.
루스는 특유의 무심한 얼굴로 말의 옆구리에서 손을 뗐다.
“알아, 그런데 이놈의 상처가 더 깊었어.”
이미 죽은 걸 다시 살릴 수는 없다고. 루스가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카를로에게 눈짓했다. 하여간 인간들이란, 저들끼리만 챙기기 바빴다. 다 죽어 가는 말 한 마리보다는 고작 다리에 상처가 난 인간이 더 소중하다니. 그러나 루스는 굳이 입을 열어 자기 생각을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말을 꺼내 봐야 드래곤은 이해 못 할 이상한 논리를 늘어놓을 것이 뻔했다.
말의 상처가 모두 나았으니 이제 다음 차례였다.
루스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마부를 향해 걸어갔다. 나직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가 금발의 남자의 입술 틈에서 흘러나왔다. 마법 주문은 언제나 그렇듯이 어떤 음률을 가진 노랫소리처럼 들렸다.
“회복.”
루스의 흰 손바닥이 마부의 다리에 올라가자, 이윽고 현장을 가득 채웠던 신음이 잦아들었다.
카를로는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금빛 마나 알갱이를 그의 기다란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마나 알갱이가 눈에 보일 정도의 숙련되고 화려하고, 강력한 마력을 가진 마법사였다. 서로의 목숨을 맡기고 던전에 들어갈 자격이 충분했다.
“좋아.”
우연한 기회로 루스의 실력까지 알아볼 수 있었다. 카를로는 씨익 입술을 끌어올려 웃었다. 역시 그는 자신의 운을 믿었다. 루스는 예상하지도 못했던 월척이었다. 그것도 아주 실력 있는.
데 룰스가 탐낼 만한 인재로군- 카를로는 속으로 그 멍청이들을 비웃었다. 한껏 잘난 척하더니 이런 인재를 못 알아보고 저들끼리 싸우고 있는 꼴이었다.
루스의 회복 주문 하나에 마부의 다리는 말끔하게 치료되었다. 그는 바로 바닥에서 일어나 다리를 구부렸다 펴 보며 마법사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평민들에게 치료 마법이란 말로만 들어 보았던 고급 주문이었기 때문에, 그는 당황하며 은혜를 어떤 방식으로 갚아야 하는지 쩔쩔매고 있었다. 루스는 그런 남자의 노력은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며, 그냥 가던 길을 가라고 말했으나 마부는 절대 그럴 수 없다며 두 남자의 앞길을 막아섰다.
그때였다.
“이네하트 님.”
저 멀리서 아까 사라졌던 기사단의 우두머리처럼 보이는 기사가 카를로를 불렀다. 카를로가 명령했던 물건들을 모두 확보했다는 뜻이었다.
“마침 좋은 타이밍이야. 실력 좋은 마법사도 찾았으니…….”
루스는 ‘실력 좋은 마법사’라는 단어에 자신의 어깨를 가볍게 올렸다 내렸다. 좋다는 기준이 어느 정도일지는 몰랐으나 썩 마음에 드는 단어는 아니었다. 카를로의 눈동자에 이채가 들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군.”
그는 루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드디어 던전으로 들어갈 시간이었다. 각자 말을 타고 이곳을 찾았던 기사단과 카를로와 달리 단신으로 이 마을에 머물고 있었던 루스에게 마부는 고집을 부려 던전까지 이동을 도와주는 것으로 결정했다.
고작 그런 일로 말싸움하기 귀찮았던 루스는 말끔히 복구된 마차를 타고 카를로 기사단을 뒤따라갔다. 마부는 가는 동안 마차 칸에 앉은 마법사에게 오히려 더 새것 같아졌다며 조잘거렸고, 사교성이 부족한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잠든 척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