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아카데미의 대련장은 본관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미하일과 아드리안, 캐서린, 한스가 대련장에 도착하자 그곳은 이미 아카데미 학생들로 꽉 차 웅성거리고 있었다. 학생들의 검술 수업 중에 급작스럽게 일어난 대련이었던지 이 학년생들이 월등히 많았다. 그들은 조금 늦게 들어선 캐서린과 한스에게 인사를 하며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아드리안과 미하일은 그들을 따라 들어가 대련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웬 대련이야?”
캐서린이 옆의 친구를 팔꿈치로 툭, 치며 질문했다. 그에 열심히 대련을 지켜보던 남학생이 “이야. 캐서린도 왔네. 소문 참 빠르다.”라고 웃은 후, 대강의 정황을 이야기해 주었다.
오전의 이 학년 검술 수업 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검술 교관인 이드로스 교수와 점심 약속이 있었던 교장이 손수 대련장으로 나오는 바람에 시작된 대련이라고 그가 말했다. 홧김에 시작된 대련은 점심시간이 시작되기 전부터 휴식 시간이 끝나가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몇 시간 동안이나 저곳에서 검을 부딪치며 겨루었다는 뜻이었다.
캐서린은 대련이 시작된 시간을 듣고, 혀를 내두르며 대련장 중앙에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어지간한 체력이었다. 특히 이드로스 교수는 지쳐 있는 것이 보였지만, 데클레어 교장은 겉으로 봐서는 그녀의 체력을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현존하는 기사 중, 가장 강하다고 평가받는 데클레어 파스터였다.
미하일은 어릴 적부터 기사들의 대련을 지켜봐 왔다. 왕국의 기사는 루스타바란 왕국에서의 최강.
루스타바란 왕국에서의 최강은 곧 대륙에서의 최강이었다.
데클레어 교장은 편한 일상복을 입고, 그녀의 키와 비슷한 길이의 큰 검을 한 손에 가볍게 들고 서 있었다. 조나단이 이름을 잘못 말했던 그 테마리아였다.
교장의 모습은 입학식에서 격식을 차린 드레스를 입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구불거리는 회색빛 바랜 머리칼에서 그녀의 많은 나이가 느껴졌으나 그뿐이었다. 오랜 훈련으로 단련된 신체가 일상복 안에서 팽창했다가 이완되는 것이 멀리서 보아도 느껴졌다.
이미 대련이 시작된 지 시간이 조금 되어 대련 상대방의 옷이 몇 군데 찢겨 나가 있었다. 끝이 뭉툭한 훈련용 검이 아닌, 진검을 사용하는 대련이었다.
“그때가 생각나는데.”
하아- 하아- 데클레어 교장의 반대편에는 기사 한 명이 힘겹게 서 있었다. 그는 데클레어 교장보다 더 큰 덩치가 있는 사내로, 데클레어과의 오랜 대련에서 지쳐 있었다.
“……그때? 한창 전장에서 제 조언 따위는 귓등으로도 안 들으셨던 그때 말씀입니까?”
“하하! 아직도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어?”
데클레어 교장은 자신의 기다란 검을 가볍게 좌우로 휘두르며 그에게 말했다. 그녀는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그런 것만 마음에 담아 두면 어쩌나. 검식을 마음에 담아서 완벽히 구사해야 할 것을.”
안 그래? 데클레어 교장은 대련장에 서서 한때 그녀의 부관이었던 자를 도발했다. 적당한 도발이 그들의 대련을 더욱 즐겁게 만들 것이다.
교장의 도발에 검술 수업의 교수, 이드로스가 잠시 쉬던 몸을 일으켜 이를 악물었다.
훤칠한 신장의 기사가 이를 갈며 데클레어 교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의 검이 넓게 횡로를 그리며 데클리어 교장을 향해 날아들었지만, 교장은 간단하게 몸을 틀어 검을 피했다. 이에 교장의 테마리아가 빛나는 검신을 뽐내며 맞은편의 사내에게 날아갔다. 스스로 사자의 아가리에 걸어 들어온 사냥감을 낚아채려는 움직임이었다.
이드로스는 치고 들어오는 테마리아의 움직임을 알아채고, 공중에서 자신의 검의 방향을 다른 손으로 억지로 바꿔 들었다. 그 움직임에 팔의 근육들이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지만, 데클레어의 검을 받으려면 그 수밖에는 없었다.
쾅-!
불쾌한 쇳소리가 대련장에서 잘게 울렸다. 마주 보는 검의 힘에 우열을 가리기 위해 두 검의 검신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드로스의 악다문 입을 바라본 데클레어 교장이 실실 웃었다. 오래간만의 즐거운 대련이었다. 보통의 기사였다면 방금의 일격에서 대련이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오랜 부관은 데클레어의 패턴을 어느 정도 몸으로 익혔다. 무의식적으로나마 그녀의 검을 받아 낸 것이다.
이드로스의 검과 데클레어의 검이 서로 맞부딪쳐 힘겨루기를 이어 가다 데클레어 교장의 다른 한 손이 자신의 검 면을 붙잡고 맞닿은 면을 돌렸다. 그러자 검 두 개가 스르릉-하고 쇳소리를 내며 간격이 벌어졌다. 이드로스 교수는 자신의 검의 방향을 틀어 올린 후, 상체를 기울여 가까스로 데클레어 교장과 거리를 조금 벌렸다.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괴물 같은 실력이었다. 이드로스의 검을 든 쪽 팔이 파르르-떨렸다. 억지로 역방향으로 사용했던 근육들이 그만하라며 고통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저런 사람이 소드 마스터가 되지 못했다면, 도대체 어떤 인간이 소드 마스터가 되는 걸까?’라고 생각하며 이드로스 교수는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몸통을 크게 들썩거렸다. 그러나 데클레어는 그에게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어허.”
데클레어는 자신의 오랜 부관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방금의 마찰에 우우-하고 떨리는 테마리아의 검 면을 손바닥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러자 검의 잔떨림이 서서히 멎어 들었다.
“자네가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있던가?”
데클레어가 몇 달음에 대련장 끄트머리에 몸을 굽히고 숨을 고르고 있는 이드로스에게 달려들었다. 이드로스는 교장의 발 빠른 움직임에 이를 악다물고 검을 쥔 두 손으로 땅을 짚고는 한 바퀴 굴러 피했다.
그러나 늦었다.
대련장 바닥을 굴러 이드로스가 두 발을 땅에 딛고 상체를 일으키려는 순간.
스윽-
테마리아가 목덜미를 그어 버리겠다는 듯이 이드로스를 그의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드로스는 대련으로 올렸던 온몸의 힘을 풀면서 데클레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기까지입니다.”
“그래. 늦은 점심이라도 먹자.”
“그러게 적당히 하셨으면, 제때 식사할 수 있었습니다.”
“오랜만이라 뭐. 조절을 할 수 있어야지.”
이드로스는 데클레어 교장을 향해 질린 표정을 한 후, 자신의 진검을 한번 털어 냈다. 그리고는 검집에 검을 챙겨 넣었다.
두 사람의 오랜 대련이 끝났다는 의미였다.
대련장을 둘러싼 학생들이 그 움직임에 환호를 보냈다. 기사 학부 학생 몇은 열렬하게 발을 구르며 멋진 대련에 찬사를 보냈다. 최강의 기사가 보여 주는 대련은 때로는 직접 하는 훈련보다 더 높은 성취를 가져다줄 때가 있었다.
미하일은 조금 전 교장과 기사가 보여 주었던 대련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왕자의 눈은 당장이라도 대련장에 뛰어들고 싶다는 듯 뜨겁게 달아올랐다. 미하일은 똑바로 선 자세에서 시선은 고정한 채, 두 주먹을 서서히 쥐었다.
드디어 그의 목표에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왔다.
검에 대한 꿈을 밝힌 이후부터, 왕자가 감당해야 했던 것들은 수많은 반대였다. 그의 꿈은 왕국의 막내 왕자가 꿈꾸기에는 위험하고, 무모한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미하일은 꿋꿋이 그가 가진 목표를 향해 노력해 왔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캐서린이었다.
“아! 이제 숙제를 받으러 가 볼까?”
옆의 한스는 투덜거리며 온 것 치고는 지나치게 대련에 과몰입한 상태였다. 그는 끝난 대련의 몇 가지 검술을 주위의 친구들과 세세하게 이야기하며 즐기고 있었다.
“와…… 진짜 멋있었다.”
“내가 재미있을 거라고 했잖아.”
“야. 이건 데클레어 교장의 대련이라 그런 거야. 대련이랍시고 저학년생들이 치고받는 건 내 눈이 썩을 정도라고.”
캐서린과 한스는 옆에 서 있는 아드리안과 미하일을 바라봤다. 어딘가를 향해 미소 짓고 있던 아드리안이 그 눈빛을 알아채고, “가자.”라고 먼저 말했다.
아드리안과 미하일의 오후 수업도 곧 시작이었다. 미하일은 마지못해 대련장을 벗어났다.
***
대련을 마치고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내쉬고 있던 이드로스가 대련장을 둘러보다, 미하일을 발견하고 데클레어에게 말했다.
“어? 왕자님도 와 계셨네요.”
“미하일이?”
왕국의 기사였던 두 사람은 왕성에서 근무하면서 왕자의 어린 시절을 지켜보았던 사람들이었다. 그가 반가울 만도 했다.
“벌써 아카데미에 들어오다니. 세월이 참 빨라.”
“인사는 안 하십니까?”
“뭘, 교장이 인사한다고 뭐 되나? 알아서 잘해야지.”
데클레어 교장은 자신의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스르릉-하는 쇠붙이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대련장을 울렸다.
교장은 아이들을 찬찬히 바라보다 대련장에 뻗어 있는 자신의 부관에게 한쪽 팔을 내밀었다. 바닥에 누워 쉬고 있었던 부관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교장의 한쪽 팔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사교성이 좋은 아이인 줄은 몰랐는데, 친구를 벌써 사귀었군?”
데클레어 교장은 미하일 루스 이네하트의 옆에 서 있는 아드리안을 바라보고 말했다.
……저희 친구 아닌데요?
청력이 좋은 드래곤 아드리안은 멀리서 둘의 이야기를 들었으나, 조용히 입을 다물고 데클레어 교장을 향해 빙긋 웃었다. 대련장을 둘러싼 학생들은 대련을 한 이후 이야기를 나누는 교장과 기사의 입모양만 보일 것이다. 데클레어 교장은 오랜 연륜이 느껴지는 눈빛으로 왕자와 함께 서 있는 아드리안을 주욱- 훑었다.
훤칠한 신장에, 단련된 몸이었다.
친구도 기사 학부 희망생인가? 데클레어는 혼자 상상한 후, 왕자와 어울리는 친구라고 생각하며 이드로스와 함께 대련장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