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그 데클레어 파스터?”
테이블의 맞은편에 앉은 학생이 교장의 이름을 말했다. 그러자 차를 즐기던 다른 아이들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기사 이야기에 참여했다.
“기사 중에서 데클레어 파스터가 최강이야.”
“맞아. 검술로 교장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지금 아무도 없지.”
“데클레어 파스터가 나간 전장만 해도 수십 개라던데. 나중에 왕국 역사 수업 시간에 배우겠지?”
“당연하지. 특히 그 리처드령 전쟁에서의 전술이 진짜…….”
미하일은 자신의 빈 잔을 테이블에 내려 두고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얌전히 귀 기울여 듣고 있는 걸 보니 음식이나 차 이야기를 할 때와는 다르게 관심은 있는지, 의자에 기대 있던 그의 상체가 테이블 쪽으로 조금 나와 있었다.
“대단해. 조나단은 기사에 대한 거라면 모르는 게 없네.”
“당연하지. 나는 빨리 이 학년이 돼서 기사 학부 수업을 듣고 싶어.”
조나단은 데클레어 파스터를 보면서 기사의 꿈을 가졌다는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수수해 보이는 조나단의 얼굴이 기사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면 반짝거렸다.
“난 기사는 잘 모르지만, 유명한 그 검을 실제로 봤다는 게 안 믿겨.”
“아, 입학식의 그 검? 그게 유명한 거야?”
“데클레어 파스터의 검? 진짜 유명하지! 그 검을 테이리아라고 불러. 특히 테이리아의 은빛 검집에 박힌 사파이어를 두고 두 가문이 전쟁했을 정도로 아름답대.”
미하일이 조나단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조나단이 떠드는 이야기에 불만이 있는 몸짓이었다. 미하일은 차갑게 찢어진 눈을 슬쩍 감았다 떴다. 그러다 조나단이 데클레어 파스터의 검 이야기를 다시 하는 순간이었다.
미하일은 조나단의 이야기를 갑자기 끊었다.
“테이리아를 만든 장인이 그 검을 만들고 다시는 다른 검을 만들지-”
“테마리아.”
“뭐?”
“교장의 검 이름은 테마리아라고. 멍청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떠들어 대지 마.”
미하일은 검의 이름을 짓씹듯이 강조했다. 왕자의 잘생긴 얼굴에 차가운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교장의 검을 한껏 묘사하던 조나단이 그 비소에 멈칫했다.
겨우 검 이름 때문에 처음 보는 친구한테 멍청이라고 한 건가?
이런 성격을 가지고 지금까지 칼 맞은 적 없다니. 왕국의 왕자라는 위치는 대단했다.
“……검 이름 정도야 실수할 수 있지.”
머쓱해진 조나단이 중얼거렸다. 맞는 말이었다. 시험도 아니고 친구들과 대화하다가 아카데미 교장의 검 이름 정도야 틀려도 된다.
하지만 왕자의 앞에서 그래서는 안 되었던 듯하다.
아드리안의 첫 번째 프로젝트는 단 몇 시간 만에 종료되었다. 아드리안은 침묵이 내려앉은 테이블을 애써 정리하려 하지 않았다. 이미 멍청이라고 한 판국에 자신이 나서 봤자 잘 마무리될 것 같지도 않았다.
으음-
그는 알맞은 온도의 차를 천천히 목으로 넘겼다.
친구 정도야 없어도 되지 않을까? 국력이 어느 정도 있는 왕국의 왕자에다가, 얼굴은 저 정도면 아주 충분했고, 마법보다 검술에는 더 자신 있을 것이다. 괜히 억지로 데려왔나 보군. 아드리안은 잠깐 후회했으나, 그뿐이었다.
미하일은 더는 조나단의 입에서 ‘기사’나 ‘검’ 이야기가 나오지 않자,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지 입을 다물었다. 기가 찬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드리안에게 ‘그러니까 내가 오기 싫다고 했잖아.’라는 뚱한 표정으로 대답해 주었을 뿐이다.
그때, 누군가가 신입생들의 테이블로 천천히 걸어왔다. 검은 생머리의 학생이었다. 그녀의 넥타이 색으로 가늠해 봤을 때, 이 학년생으로 보였다.
“식사 시간에 끼어들어서 미안한데.”
그녀는 길고 결 좋은 검은 머리칼을 넘기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신입생들이 갑자기 다가온 이 학년 선배에게 바짝 긴장했다. 그녀의 볼일은 다행히 아드리안에게 있었던 듯, 아드리안의 의자 뒤쪽에 한 손을 짚은 후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스가 아침부터 징징거려서 말이야.”
“야! 내가 언제?!”
한스? 아드리안이 여학생의 뒤편을 보자, 아침에 정원에서 시비를 걸었던 붉은 머리의 남자가 서 있었다. 그의 이름이 한스인 듯했다.
“네가 내 숙제를 주워 줬다며? 고마워, 별거 아닌 것으로 보이겠지만 제일 중요한 부분을 적어 뒀던 거라……잃어버려서 곤란했었어.”
“아-.”
아드리안은 그제야 그녀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캐서린 에스테반?”
“그래.”
캐서린 에스테반이 아름다운 얼굴로 아드리안을 향해 싱긋 웃었다. 밝은 금발의 잘생긴 남자와 캐서린이 함께 식당에 자리하자, 둘은 선남선녀처럼 잘 어울렸다.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한스는 약이 오르는지 “캐서린…! 빨리 달라고 해.”라고 뒤에서 종알거렸다. 캐서린은 “아!” 하고 정신을 차리고는 자신이 식사를 방해한 이유를 다시 생각해 냈다.
“한스가 그걸 다시 찾아오려고 정원에 뛰어갔었는데, 그냥 한스에게 넘겨주지 그랬어.”
“어쩌지? 아침에 주운 건 강의실 쪽 사물함에 놔두고 왔는데. 지금 가져다줄게.”
캐서린을 식당에서 만날 줄은 아드리안도 몰랐다.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나타난 도움의 손길이었다. 빨리 이 테이블에서 뜨자고 아드리안이 생각했다.
“어차피 다음 강의도 그쪽이니 나도 같이 가서 받으면 되겠다.”
캐서린이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뒤에서 한스가 불만으로 나직하게 궁시렁거렸지만, 그는 캐서린이 간다면 대륙 끝까지 따라갈 기세였다. 아드리안은 그 모습을 바라보고 식당의 테이블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식사를 다 마쳐서 식당을 나갈 타이밍이었다.
“그럼 오후 수업에서 만나자.”
“어어. 응.”
“그래. 나중에 만나.”
아드리안은 테이블에 앉아 후식을 즐기고 있는 같은 반 아이들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자 미하일도 슬금슬금 몸을 일으켰다.
응? 아드리안은 그런 미하일에게 말했다.
“나만 가면 되는데?”
“누가 같이 간대? 방으로 갈 거거든.”
미하일은 차갑게 대답하고는 식당을 먼저 걸어 나갔다.
아이들은 두 사람이 테이블을 떠나자, 다시 이야기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아까 미하일 때문에 기분 상했던 조나단도 다시 아이들과 웃으며 이야기했다. 한창 낙엽 굴러가는 것만 보아도 온종일 웃을 수 있는 나이였다.
***
한스와 아드리안, 미하일, 캐서린이 복도를 함께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강의실 건물은 식당이 있는 본관과 조금 거리가 있었다. 학생용 구두가 대리석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복도를 채웠다.
본관 현관으로 향하는 커다란 복도에는 웬일인지 학생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네 사람을 뛰어서 지나갔다. 아카데미의 교복을 입은 채로 저렇게 달리기도 쉽지 않을 텐데, 엄청난 속도였다.
“어. 캐서린. 안녕!”
그는 뛰어가다가 복도에서 마주친 캐서린에게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캐서린은 그에 대답했다.
“안녕. 어디를 그렇게 뛰어가?”
“데클레어 교장이 대련장에 나타났대!”
“오, 한탕 벌 수 있겠는걸.”
캐서린이 약간은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에이, 누가 반대에 걸겠어, 당연히 교장이 이기지!”
복도에서 마주친 학생이 무슨 이상한 말을 하냐는 듯이 외쳤다. 그는 “먼저 간다.”라고 말하며 복도를 뛰었다. 캐서린은 그것을 바라보다가 반짝이는 눈으로 뒤의 신입생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신입생 두 사람의 정수리를 힐끔 바라보곤 “아.” 하고 중얼거렸다.
“……너희, 아직 바사미엘의 평화로운 일주일이구나?”
“예?”
아드리안이 반문했으나, 캐서린은 귀찮았던지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말하며 고개를 가볍게 양옆으로 저었다. 그녀는 방금 남학생이 뛰어간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서 대련 끝나기 전에 가 보자!”
“……숙제는?”
“지금 숙제가 중요해?!”
캐서린은 그녀의 눈동자를 반짝이며 크게 소리쳤다. 어차피 오후 수업 시간까지는 한참이었다. 시간은 충분했다.
“대련 같은 거 봐서 뭘 한다고…….”
한스는 투덜거리면서도 캐서린의 뒤를 따랐다.
“예술 학부는 그게 문제라니까. 경쟁심이라는 게 없어.”
캐서린은 자신의 단짝에게 웃으며 뼈가 있는 농담을 했다.
“무식하게 힘자랑하는 걸 보면 경쟁심이 미친 듯이 샘솟냐.”
한스도 그런 농담쯤은 수십 번째 들어 보는지,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꺼내 들었다.
미하일은 그런 그들을 뒤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대련장이 어디야? 빨리 안내해!”
“……캐서린에게 명령 투로 말하지 마!”
한스가 캐서린과 함께 뛰어가며 뒤쪽의 미하일에게 소리쳤다.
미하일은 그런 한스를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아드리안도 어쩔 수 없이 학생들이 뛰어가는 방향으로 함께 이동했다. 유명한 데클레어 파스터의 대련을 직접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제일 궁금한 것은 그녀의 검 테이리아였다.
…아니 테마리아가 맞았나? 괜히 더 헷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