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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12화 (12/184)

12화

첫 수업이 끝나고 오후까지 자유 시간이었다.

아드리안 헤더는 아직 자리에 앉아 있는 미하일 루스 이네하트를 두고 자신의 짐을 빠르게 챙겼다. 그리고 다음 수업 시간까지는 뭘 할지 고민하려는 참이었다.

“너희는 오늘도 따로 점심 먹을 거야?”

아드리안은 자신에게 건네 오는 목소리에 짐을 챙기다 말고 몸을 돌렸다. 그것은 퉁명스럽지만, 밝은 목소리였다.

“어? 안녕.”

아드리안은 몸을 돌려 말을 걸어온 학생에게 대답했다. 그는 고개를 돌리느라 흐트러진 밝은 금발을 손으로 넘겼다. 아드리안의 뒷자리에 앉아 있었던 학생이었다.

“그런데 방금 그게 무슨 말이야?”

아드리안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학생은 뒤쪽을 손짓하며 대답했다.

“가넷에 들어온 학생끼리 매일 점심을 같이 먹고 있거든. 너희는 항상 따로 먹는다고 듣긴 했는데, 직접 물어본 것뿐이야.”

“……그래? 난 그런 제안은 거절한 적 없어.”

아드리안은 강의실을 나가려고 옆에서 짐을 챙기고 있는 미하일한테도 들리도록 크게 말했다.

“미하일이 내 대신 거절해 준 것 같은데.”

저쪽에서 내 교우 관계를 차단했단 말이지? 고맙게도. 아드리안은 겉으로 웃으며 왕자가 싫어할 만한 짓을 해 주기로 했다.

“오늘은 우리도 갈게.”

아드리안은 미하일의 어깨를 잡아끌어 억지로 대화에 끌어넣었다. 미하일은 아드리안의 ‘우리’라는 말에 눈을 치켜떴다.

“뭐? 싫어. 난-”

“어차피 점심은 먹어야 하잖아. 아, 왕자님이라 점심은 우아하게 드셔야 하나?”

아드리안은 이왕 왕자의 꼬투리를 잡은 김에 조금 더 빈정거렸다.

“그러게 누구 마음대로 내 점심까지 취소하래?”

“……멋대로 해석한 건 저쪽이야.”

왕자는 자신에게 물어 온 학생에게, ‘점심은 따로 먹을게.’라고 대답했을 뿐이었다. 다만 그 대답을 들은 학생들이 미하일이 아드리안과 둘이서 점심을 먹는 것으로 오해했던 것이었다.

길어질 것 같은 둘의 대화에, 처음 말을 걸었던 여학생이 다시 끼어들었다. 뒤쪽에 점심을 함께 먹으러 가려고 기다리고 있는 학생들이 그녀를 재촉한 탓이었다.

“그래서 갈 거야 말 거야?”

“갈게.”

“안 가.”

아드리안은 왕자의 어깨를 툭, 쳤다. 까탈스럽게 굴지 말라는 뜻이었다. 아드리안은 하루빨리 왕자의 사회성을 키워 주기로 마음먹었다. 장차 루스타바란 왕국을 위해 왕족으로서 모범을 보여야 할 왕자가 영 사람들과 어울리질 않았다.

그때 갑자기 아드리안에게 엄청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미하일은 루스타바란 왕국의 왕자이고, 언젠가는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될 인간이었다. 일 년 동안 어쩔 수 없이 룸메이트가 되었으니 최선을 다해 왕자에게 좋은 친구를 만들어 준다?

아드리안의 ‘꿰뚫어 보는 눈’이 가벼워지는 소리가 벌써 여기까지 들려왔다.

이거였다!

그가 생각하는 동안 가넷의 학생 열댓 명이 강의실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는 미하일에게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사 년 동안 친구도 없이 지낼 거야? 이럴 때 친구도 만들고 해야지. 조용히 하고 한 번만 따라와.”

아드리안은 자신 있게 왕자의 어깨를 한번 두드린 후, 무지막지한 힘으로 팔을 잡아끌었다. 왕자는 자신을 잡아끄는 팔을 힘겹게 떼어 냈지만, 발걸음을 물리지는 않았다. 미하일은 강의실 밖의 무리를 향해 걸어가는 아드리안과 함께 걸었다. 어차피 점심시간이고, 점심은 먹어야 했다. 아카데미에 식당은 하나였으므로 방향이 같을 수밖에 없었다.

아드리안과 미하일이 강의실을 나가서 가넷의 학생들에게 점심을 함께 먹겠다고 하자, 그들은 둘의 합류에 기뻐했다.

“오. 드디어 다 같이 먹는구나!”

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공부할 사이인데, 며칠 동안 밥 한 번 같이 먹지 않고 개인플레이를 하는 그들이 궁금했을 것이다. 식당으로 걸어가는 동안 그들은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내 이름은 유시 산드리아. 유시라고 불러.”

“반가워. 나는 아드리안 헤더. 그리고 이쪽은-”

“알아. 너희 둘 다 벌써 학교에서 유명해.”

아드리안은 옆에서 걷고 있는 학생을 바라봤다. 유명하다는 의미가 궁금해서였다. 처음 그들에게 말을 걸었던 여학생이 너털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안 좋은 의미로 유명하진 않으니 걱정 마. 둘이 워낙 잘생긴 데다가…….”

유시는 미하일에게 잘 들리지 않도록 작게 말했다. 하지만 왕자에게도 들렸을 것이다.

“……그 미하일 루스 이네하트잖아. 유명할 수밖에.”

아드리안은 대충 왕족과 왕족의 따까리 조합이라 유명한 거군. 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

아카데미의 식당은 고급스러운 학생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하여 좋은 식자재를 매일 아침 공수해 오고 훌륭한 셰프들을 모셔 오는 것으로 유명했다.

학생들은 교복에서 미리 구매해 둔 식권을 하나씩 꺼내 들고는 식당의 주문서를 작성하러 걸어갔다. 아드리안의 ‘왕자에게 친구 만들어 주기 프로젝트’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미하일의 사회성 기르기 프로젝트 1차 시도였다.

“음…… 나는 B 코스.”

“그래? B 코스에 농어가 있어. 나도 B 세트로 할래!”

“나도! 나도 B 코스!”

아이들은 왁자지껄하게 주문서를 함께 작성하며 들떴다. 개학 첫날이라 긴장하며 첫 수업에 들어가서 그런지 더 배가 고플 것이다.

모두가 B 코스를 주문하는 분위기라, 아드리안도 그것에 동참했다.

“그럼 나도 그걸로.”

말끔히 정리된 밝은 금발 사이로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가 싱긋 접혔다. 모두를 대표하여 주문서에 정리하던 학생이 그의 미소에 멍하니 얼굴을 붉혔다.

“A 코스.”

왕자는 주문서를 들고 있는 학생을 당당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같은 학생치고는 무척이나 명령하는 투였다. A 코스라면…… 아드리안은 식당의 메뉴판을 다시 한번 봤다. A 코스는 육류로 오늘은 스테이크였다.

“……농어가 맛있어 보이는데?”

아드리안은 왕자에게 B 코스를 들이밀어 보았다. 점심 메뉴는 대충 통일하는 게 여러모로 편했다. 그리고 같은 음식을 먹으면 이야깃거리도 많고 그러지 않나? 아드리안은 꼰대 같은 생각을 서슴없이 했다.

그러나 왕자는 꿋꿋이 자신의 선택을 바꾸지 않았고 학생 중 하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하일의 주문을 대신 작성해 주었다.

그렇게 아이들은 점심 메뉴를 고른 후, 식당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열 명이나 되었으므로 기다란 테이블 하나 전체를 차지했다.

이윽고, 그들이 주문한 요리가 완성되어 하나둘씩 학생들의 앞에 차려졌다.

“와……! B 코스 시키길 잘했다.”

“그러게. 진짜 잘 익혔네.”

그들은 자신의 요리에 나이프와 포크를 빠르게 가져갔다.

“……으음!”

유시도 물론 B 코스를 주문했었다.

“진짜 괜찮다. 매일 나왔으면 좋겠어.”

“아니야. 또 매일 먹으면 질릴걸?”

아이들은 하하 호호 웃으며 점심을 먹었다. 미하일 앞에는 큼직한 스테이크 한 장이 잘 구워져서 나왔다. 왕자는 우아한 칼질로 스테이크를 조각냈다.

아드리안은 농어에 대해 아이들과 이야기하다가 미하일에게 말을 걸었다. 이것도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스테이크는 어때?”

미하일은 입에 있는 스테이크를 전부 삼킨 후, 대답했다.

“……식사 중일 땐 말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해.”

아드리안은 다급한 학부모가 된 마음이 바로 이런 거구나. 라고 혼자 생각하곤 픽, 하고 웃었다. 그 웃음에 미하일이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자신의 스테이크에 집중했다.

식사를 어느 정도 끝내자, 아카데미 식당의 서버가 음료와 디저트를 테이블로 가져왔다. 학생들은 저마다 식후 디저트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드리안은 식사를 마친 후, 입가를 닦고 있는 미하일을 바라봤다.

아드리안은 다시 한번 시도해 보기로 했다. 우아한 귀족의 취미인 차 이야기라면 왕자도 흔쾌히 그의 지식을 뽐내 줄 것이었다.

“후식에는 바나르산 차가 제일 좋더라.”

“적당히 씁쓸하고, 뒷맛이 깔끔해서 더 그런 것 같아.”

“아, 바나르 쪽에서 나오는 차는 품질이 좋지. 혹시 이 주위에서 찻잎만 취급하는 가게에 가 봤어?”

“당연하지!”

아드리안은 바나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옆에서 조용히 차만 들이켜고 있는 미하일을 힐끔거렸다. 그는 방금 우린 차가 뜨거울 텐데도 찻물을 식도로 잘도 넘겼다. 아드리안은 차를 벌써 한 잔 다 마시고 뚱하니 앉아 있는 미하일의 무릎을 살짝 밀었다.

뭐야? 미하일이 그 움직임에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고는 반응했다.

“차 맛은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

미하일에게 차는 그저 풀잎이었다. 어느 동네에서 나는 풀잎이 제일 맛있는지는 그가 좋아하는 대화 주제가 아니었다. 왕자의 차가운 반응에 학생들은 뻘쭘하게 웃고 넘겼다.

“저번 주에 ‘록시아’에 갔을 때 말이야-”

누군가가 위태롭게 단절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아드리안은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또 실패였다.

아드리안은 아무래도 미하일이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할 수 있는 주제를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잠깐 고민하다가, 왕자가 흥미를 보였던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입을 열었다.

“교장 선생님 말이야. 입학식 때 보니 엄청나게 멋있으시던데. 원래 기사였다며?”

아드리안이 입을 열자 미하일이 무심했던 눈을 이쪽으로 가져왔다. 됐다. 걸려들었다. 아드리안은 잠자코 왕자의 반응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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