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모두가 잠든 밤이었다.
입학식이 있던 날의 밤, 침대에 누웠던 아드리안 헤더는 그의 돌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다행히 입학식에서 마법사가 캐스팅했던 마법은 어떤 것을 새롭게 ‘만들어 내는’ 마법이 아니라 만들어져 있는 것을 ‘옮기는’ 마법이었다. 골드 드래곤은 그것이 원래 있었던 곳으로 찾아가 자신의 돌을 가져오기로 마음먹었다.
아드리안은 기숙사의 침대에서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다행히 미하일은 옆에서 쥐 죽은 듯 자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침대에서 발을 내려 발걸음 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히 방을 나섰다.
아드리안은 기숙사 방문 바로 앞에 있는 커다란 유리창을 조심스레 열고, 난간 위로 두 발을 올렸다. 그들의 방은 건물의 이 층에 있었지만, 골드 드래곤에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드리안 헤더는 가볍게 난간에서 발을 뗐다. 마치 그에게만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 것처럼 그의 몸이 조용히 낙하해 땅에 내려앉았다.
본체의 마력을 조금 더 가져왔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여, 극소량의 마력을 신체에 불어 넣고 슬며시 두 눈을 떴다. 눈꺼풀이 걷히자 어두운 밤에 골드 드래곤의 달처럼 빛나는 금안이 반짝였다.
고귀한 드래곤의 눈이었다.
아드리안은 한번 크게 심호흡했다. 그의 큰 몸통이 그 박자에 맞추어 부풀었다 줄어들었다. 연회장이 있는 방향으로 아드리안이 지면을 박차고 뛰어갔다. 바사미엘 아카데미의 보안도 보통은 아닌지, 곳곳에 감시용 마법이 설치되어 있었다. 아드리안은 감시용 마법이 활성화된 부분을 뛰어넘으며 연회장에 도착했다.
사람들로 꽉 차 왁자지껄했던 낮의 연회장 모습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그곳은 적막이 감돌았다. 아드리안은 커다란 벽 한쪽에 나 있는 유리창 밖에서 어둠이 내린 실내를 바라보았다.
두 눈을 감아 마나의 흐름을 온몸으로 느꼈다. 마나의 움직임 중 하나가 이곳에서 시작하여 어딘가로 흘러간 것이 느껴졌다. 드래곤은 흐름에 집중하기 위해 그대로 눈을 감은 채 발을 움직였다. 아드리안은 마나를 감지하며 몸을 돌려 나무를 피하고, 감시용 마법을 뛰어 넘었다. 마나의 흐름은 아카데미를 둘러싼 숲으로 향했다.
이윽고 도착한 깊은 숲속에서 바사미엘의 분수대를 발견했다. 그것은 달빛 아래에서 고고하게 맑은 물을 뿜어내어 달빛에 잔물결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분수대의 맑은 물 안에 가지런히 놓인 돌들을 수면 위에서 들여다보았다. 아드리안의 금빛 머리칼과 금안이 달빛에 화답하듯 수면 위로 반사되어 달과 함께 반짝였다.
아드리안은 팔을 뻗어 분수대의 맑은 물에 손을 담갔다.
물을 휘적이던 흰 손에 무언가 걸려들었다. 수많은 돌 중에 유독 무거운 것이었다. 아드리안 헤더는 그것을 물 밖으로 건져 냈다.
“…….”
무거웠다. 이건 천칭에 무게를 잴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아드리안은 애써 현실을 외면하며 분수대의 제단에 있는 천칭의 한쪽에 그것을 올렸다. 손바닥에서 돌이 굴러 천칭의 접시에 닿자마자 접시가 바닥을 쾅! 하고 찍어 눌렀다.
흐음. 그게 이 정도의 무게였나?
천칭의 접시를 바라보던 아드리안의 눈앞에 광활한 전쟁터가 스쳐 지나갔다.
‘으아아아아악!!’
전쟁터에서 병사들이 죽을힘을 다해 큰 함성을 지르며 우두커니 서 있는 아드리안을 지나쳐 뛰어갔다. 그들이 뛰어가는 대지에는 시체들이 점점이 내팽개쳐져 있었고, 여기저기서 어두운 연기가 솟아올랐다. 병사들이 향한 곳은…….
그는 상념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었다.
아드리안은 혹시나 하고 분수대의 다른 돌멩이를 손에 쥐어 보았다. 그것들은 손에 들고 있는지 인지할 수도 없을 만큼 가벼웠다. 아드리안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돌을 천칭에서 내리고 다른 돌멩이를 대신 올렸다. 그러자 그것은 놀랍게도 천천히 위쪽으로 올라가며 천칭을 조금 전과는 반대로 기울게 만들었다. 돌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참으로 가벼운 삶이었다.
그는 돌을 집어 들어 손바닥에 올리고 그것을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돌의 매끄러운 표면에 멋들어진 서체로 이름 하나가 보였다.
미하일 루스 이네하트.
이윽고 아드리안은 아름다운 금안을 일그러트리며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골드 드래곤은 어두운 숲속에서 나지막이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대로만 흘러간다면 그것은 유희가 아니었다.
아드리안은 한 손에는 자신의 돌을, 나머지 한 손에는 미하일의 돌을 들어 무게를 가늠해 보듯이 팔을 앞으로 뻗었다. 오른손에 들린 아드리안의 돌은 들고 있기 힘들 정도로 무거웠으나 미하일의 것을 든 왼손은 그에 비해 지나치게 가벼워 오히려 평행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였다.
드래곤은 자신의 것과 미하일의 것 둘 다 손바닥으로 꾸욱 눌러 쥐었다.
흥미롭군.
새로운 제약이었다. 약초학 이외에는 관심 없던 드래곤에게 특별한 맞춤 과제가 생겼다.
가장 먼저 이것을 분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아드리안은 손에 쥐고 있던 자신의 돌을 들고 우선 다시 기숙사로 돌아왔다. 바사미엘의 분수대에 갔던 것과 정확히 반대로 움직여 기숙사 일 층에서 뛰어 이 층의 열어 둔 유리창 난간에 가볍게 착지했다. 그는 기숙사의 방문을 조용히 열었다. 미하일의 숨소리를 들어 보았을 때 그는 정말 잘 자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우선 자신의 침대 밑에 돌을 밀어 넣었다. 침대 아래는 이불보에 가려 그 밑에 있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공간 이동으로 레어에 두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겠지만, 우선 무게를 줄일 확실한 방법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수시로 무게를 재 볼 예정이었다. 그리고 왕자가 이곳까지는 절대 보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침대조차 열심히 정리하는 성격이 아니니까.
아드리안은 자신의 이불 안으로 천천히 미끄러져 들어갔다. 바사미엘 아카데미의 입학 첫날밤은 아직 한참이었다.
***
아카데미의 일 학년은 어제 들었던 것처럼 특정한 학문의 구분 없이 모든 것을 배운다. 모든 학문의 기초 과정을 속성으로 훑어보는 것이 일 학년의 교육 과정이었다.
입학 후 첫날 들어야 하는 첫 번째 수업은 <마법학 개론>이었다.
“자! 출발하자.”
아드리안은 어제의 경험을 영양분 삼아 아직까지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검술훈련집을 보고 있는 미하일에게 다가갔다. 아드리안은 미하일의 침대를 손바닥으로 몇 번 가볍게 두드렸다.
“어제처럼 다시 오게 하지 말고 같이 가.”
아드리안의 예의 없는 행동에 미하일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첫날부터 지각할 거야?”
아드리안은 그런 그에게 단호하게 한 번 더 말했다. 미하일은 더러워서 그냥 해 준다는 심정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마법 따위 관심은 하나도 없지만, 어차피 꼭 가야 할 수업이긴 했다.
아드리안 덕분에 그들은 조금 일찍 기숙사를 나섰다.
아카데미의 부지가 넓어서 기숙사 건물과 본관은 거리가 조금 있었다.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맡으며 아카데미의 아름다운 정원을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아드리안의 눈에 땅에 떨어진 종이 한 장이 들어왔다.
아드리안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걸어가며 삭제 종이를 힐끔 살폈다. 누군가 실수로 흘리고 간 듯 종이에는 복잡한 수식이 이것저것 쓰여 있었다. 평소의 아드리안이라면 그것을 무심하게 지나쳤을 것이다. 그는 멍청하게 중요한 것을 흘리고 다니는 사람을 나서 도와주는 성격이 아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그 종이를 지나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그는 자신의 침대 밑에 시퍼렇게 눈 뜨고 있을 돌멩이 하나를 떠올렸다.
아드리안은 우선 이걸로 실험해 보기로 정했다. 겸사겸사 이번 유희에서 아카데미에 있는 인간들과 유대를 쌓을 수 있을 것이다.
아드리안은 상체를 숙여 흰 손으로 땅에 놓여 있는 종이를 낚아챘다.
운이 좋게도 종이 위에는 주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왕자는 중간에 다른 행동을 하는 룸메이트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걸음 속도를 유지했다. 아드리안은 종이를 주워 들고 다시 미하일 뒤를 쫓았다.
‘캐서린 에스테반.’
아드리안 헤더는 종이에 적힌 이름을 속으로 발음해 보았다. 칠칠찮은 학생치고는 대담한 마나 수식이 종이에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는 수업이 있는 본관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종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심심함을 달래기에 딱 맞았다.
그때였다.
“그렇게 안 봤는데, 남의 숙제를 멋대로 읽으면 안 되지.”
왕자와 함께 걸어가던 잘생긴 금발의 청년이 종이를 주워 드는 것을 유심히 관찰하던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그의 말에 뒤를 따라 걸어오던 아드리안이 멈추자 미하일은 ‘빨리 가자는 놈이 누구였더라.’라는 눈으로 길 중간에 멈춰 섰다.
아드리안은 종이에서 눈을 떼고 말을 걸어온 사람을 향해 말했다. 웬만한 신입생들보다 훨씬 큰 미하일이나 아드리안과 비슷한 눈높이를 가진 학생이었다.
“주인을 찾아 주려고 한 건데, 그렇게 보였다면 미안. 네가 캐서린이야?”
“……캐서린이면 적어도 여학생이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그의 대답에 아드리안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 캐서린 에스테반 본인이 아니면 신경 끄시지. 그럼 이만.”
아드리안은 멈춰 섰던 발걸음을 다시 떼었다. 수업 시간이 곧이었다. 하지만 불청객은 등을 돌린 아드리안의 어깨를 잡고 억지로 그의 앞을 막아섰다. 불청객의 예의 없는 행동에 앞쪽에 서 있던 미하일이 아드리안의 어깨에 놓인 손을 응시했다. 하지만 본인에게 한 행동이 아니므로 내버려 두었다.
“내놔. 내가 대신 돌려줄게.”
아드리안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네가 도와주고 싶으면 어제 와서 이걸 줍지 그랬냐.
“싫다면?”
짧고 붉은 머리를 가진 청년의 단정한 표정이 찌푸려졌다. 그는 자신이 입은 교복의 넥타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넥타이는 아드리안의 것과 다르게 푸른색이었다.
“너 캐서린을 모르잖아. 내가 돌려주는 게 더 편하지. 그리고 나 이 학년이다.”
아드리안은 기껏 쉽게 얻을 수 있는 착한 짓을 다른 누군가에게 뺏기고 싶지 않았다.
“내가 주웠으니 내가 알아서 할게.”
물론 고집부리는 아이의 말을 들어주고 싶지 않은 청개구리 같은 마음도 포함되었다. 아드리안은 자신의 어깨에 놓인 청년의 손을 힘을 주어 밀어냈다. 상대는 손쉽게 밀렸다.
“뭐 해? 가자.”
조금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미하일에게 아드리안이 말하자, 그는 특유의 무표정으로 불청객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왕자는 누군가의 뒤를 따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터라 속도를 조금 높여 아드리안보다 앞에서 걸어갔다.
“와……. 성격 장난 아니네.”
일 학년에게 무시당한 한스 타비엔은 혼자 남아 중얼거렸다.
그의 황당한 마음을 알아주는 이는 그 자리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