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같이가용-9화 (9/184)

9화

충격의 입학식이 끝나자, 선배들과 교수진들은 연회장을 먼저 우르르 빠져나갔다.

그 뒤에 신입생들은 연회장에 그대로 남아 하나둘씩 모여 저마다 인사를 했다. 루스타바란 왕국은 대륙에서 가장 큰 왕국이었지만, 지위와 재력의 계층 구조상 상위로 갈수록 그들만의 사교 활동이 분명 있었다.

당연히 골드 드래곤을 알아볼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아드리안 헤더는 연회장 가장자리에 신입생들의 사교를 위해 아카데미 측에서 준비해 둔 테이블에서 차가운 음료 한 잔을 집어 들었다. 골드 드래곤은 그것을 잡자마자 입가에 가져다 대어 빠르게 마셨다. 일 학년도 마치지 못할 수 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을 직후였으므로 드래곤은 적당한 알코올이 간절했다.

젠장. 술이 아니잖아.

골드 드래곤은 인상을 찌푸리며 입에 머금은 것을 꿀꺽 넘겼다.

아무리 돈 많은 평민들과 귀족, 왕가의 자식들을 위한 곳이라 해도 바사미엘은 엄연한 교육 기관, 아카데미였다. 신입생들을 위해 준비해 둔 것은 마치 샴페인처럼 보이는 여러 종류의 에이드였다. 아드리안은 그래도 이게 어디냐는 생각을 하며 가장자리의 벽에 기대어 신나서 떠들어 대는 신입생들을 관찰했다.

이백여 명의 신입생들은 연회장을 바쁘게 가로지르며 아는 얼굴을 찾아다니느라 바빠 보였다. 아드리안은 시원한 에이드를 목으로 넘겼다. 누군가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해 그가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였다.

드래곤은 미하일의 붉은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왕자는 아드리안이 기대어 있는 벽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우뚝 서 있었다. 왕자는 그의 주위에서 한마디라도 걸어 보려 서성거리는 인간들을 완전히 무시한 채 재미없다는 눈을 하고 있었다.

저놈은 왜 가만히 있는 거야.

골드 드래곤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손에 들고 있는 에이드를 마시는 데에 집중했다.

“안녕. 네가 마시고 있는 건 무슨 에이드야?”

누군가 골드 드래곤의 어깨를 살짝 두드려 왔다. 아드리안은 웬만한 신입생들보다는 훨씬 큰 신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학생은 그를 부르기 위해 뒤꿈치를 살짝 들어 올려야만 했다.

“안녕.”

아드리안은 먼저 다가가서 인사를 할 생각은 당연히 하나도 없었지만, 먼저 건네 오는 인사에는 절대 허투루 대답하지 않았다. 골드 드래곤은 따뜻한 갈색 눈동자를 살짝 접으며 멋있는 미소를 만들어 냈다. 그러고는 마시고 있던 잔을 힐끔 바라보았다. 맛을 음미하며 마시고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에이드의 정체 파악을 위해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이건…… 힐튼 베리 에이드야. 하나 가져다줄까?”

그를 부른 학생이 여학생이었기 때문에 골드 드래곤은 예의를 차려 질문했다. 그러자 잘생긴 동급생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학생이 뺨을 붉히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드리안은 하하, 라고 웃으며 학생을 테이블로 데려가 깨끗한 잔에 에이드를 적당히 옮겨 담았다. 그러고는 에이드를 건네받은 학생에게 “……고마워.”라는 인사를 받았다. 아드리안은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름을 물어봐도 돼?”

“당연하지. 아드리안 헤더야. 그리고-”

골드 드래곤은 웃으며 에이드 잔을 손가락으로 툭, 두드렸다. 그리고는 하던 말을 이어서 덧붙였다.

“이건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뇌물로 받아 줘.”

“뭐? 하하. 나도 잘 부탁해. ‘헤더’라면… 내가 아는 그 ‘헤데라’ 상단을 운영하는 가문 맞아?”

“헤데라를 아는구나? 맞아. 그런데 상단의 주력 가문에서는 조금 멀긴 해.”

헤데라 상단의 주력 가문이면 오히려 곤란했다. 아드리안은 화제를 빠르게 전환하기 위해 그의 가문이 아닌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리려 했다.

“지금까지는 어때? 난 바사미엘에 대한 것은 소문으로만 들었거든.”

“오, 그래? 난 바사미엘을 졸업한 친척이 있어서 전해 들었어. 조금 전에 봤던 그 꿰뚫어 보는 눈에 대해 얼마나 겁을 주던지! 그런데 정말 아무것도 아니잖아.”

“……그러게.”

아드리안은 웃는 낯을 그대로 유지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에게는 엄청난 난관이었으나 대부분의, 아니 모든 신입생들에게는 그냥 하나의 절차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여학생이 작게 중얼거렸다. 아드리안은 “응?”이라고 반응하며 에이드를 따랐던 손을 냅킨에 문질러 닦았다.

“네가 그 ‘왕자’님이랑 같은 방을 쓴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학생은 손등으로 입가를 살짝 가린 채, 비밀스럽게 말한다는 듯이 이야기를 꺼냈다.

“아, 응.”

“힘들지는 않아? 물론 아카데미 안에서 신분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지만…… 아무래도 진짜 왕족은 대하기 껄끄럽잖아.”

아드리안은 힐끔, 건너편에서 신입생들에 둘러싸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미하일을 확인했다. 왕자는 모든 것이 귀찮다는 듯이 차례대로 접근하는 학생들에게 선심 쓰듯이 몇 번 고개를 끄덕거려 주고 있었다. 왕자님 어쩌고저쩌고, 왕가와 귀족들의 친분을 과시하는 이야기들이 여기까지 들렸다.

“뭐…… 아직까지는?”

아드리안 헤더는 옆을 힐끔 바라보았다가 의식적으로 슬쩍 미소 지었다. 미하일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어서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그를 알아본 귀족가의 학생들이 살갑게 인사하고 있었는데, 정작 왕자는 별로 기분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왜?”

“……어제 너희 방에서 싸우는 소리가 다 들렸거든. 누가 정원을 지나가다가 그 방 창문에서 떨어지는 화분을 겨우 피했대.”

“…….”

아드리안은 화분 이야기에 휙, 고개를 쳐들었다. 그때 그 비명 소리의 주인이군. 그는 머쓱한 표정으로 목 뒤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어린애와의 기 싸움에 다른 인간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민폐였다.

“……별일 아니었어. 그 애한테는 내가 사과할게.”

“아니야, 다친 곳도 없고!”

학생은 아드리안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손바닥을 휙휙 저었다.

“완전 괜찮을 거야! 사과하라는 뜻이 아니었어. 그리고 네가 던진 것도 아니라며!”

과도한 사양에 아드리안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건 그랬다. 아무리 간 큰 놈이라 해도 겨우 화분 하나 때문에 왕자에게 사과를 받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학생의 목소리가 너무 컸던 탓에, 주변 사람들의 이목이 모두 이쪽으로 집중되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 시선 중 하나는 당연히 그 왕자님의 것이었다.

그는 반짝이는 은발을 슬쩍 늘어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마치 더 말해 보라는 듯이 입가에는 옅은 비웃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정작 말을 꺼낸 학생보다 골드 드래곤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는데, 드래곤은 그의 붉은 눈동자에 순간 말문을 잃었다.

시끄러웠던 연회장을 삽시간에 조용히 만든 장본인의 입술이 열렸다.

“왜? 더 말해 봐. 누가 뭘 던졌는데.”

보통의 귀족가의 자제라면 먼저 이 상황을 정리했을 것이나, 미하일은 보통 귀족도 아닌 왕자였다. 그는 이런 어색한 상황을 정리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미하일은 어서 말해 보라는 듯이 아드리안을 빤히 바라보았다.

골드 드래곤은 ‘진짜 말하라고?’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손에 들고 있는 에이드를 쭈욱 한번 들이켰을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미하일을 검지로 가리키며 말했다.

“네가, 내 화분을.”

알면서 뭘 물어. 왜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이 자리에서 다시 말해야 하는지는 이해 가지 않았으나 그는 왕자의 바람대로 질문에 대답했다. 그 자리에 있던 학생 몇 명이 헙, 하고 숨을 삼키며 왕자의 기분을 눈치로 살폈다. 아무리 아카데미 안이라 해도 왕족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다니, 그것은 미친 짓이었다.

붉은 눈동자가 움직여 아드리안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한번 주욱 확인했다. 그러나 그가 보인 반응은 모두의 예상을 깨부쉈다.

하- 미하일은 크게 헛웃음을 지었다.

“들었지? 앞으로 그냥 다들 저놈처럼 편하게 불러.”

왕자니, 뭐니 아카데미에서 들을 생각 전혀 없으니까.

미하일은 대꾸하고는 휙, 몸을 돌렸다. 한참을 억지로 인사하고 모두에게 직접 그냥 이름으로 편하게 부르라고 말하는 것에 지친 참이었다. 그는 곧이어 이 연회장에 억지로 잡혀 있었다는 듯이 커다란 문을 열어젖히고 걸어 나갔다. 질 좋은 가죽 신발이 대리석 바닥을 규칙적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다가 사라졌다.

“…미안해……. 내 목소리가 너무 컸나 봐.”

여학생이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아드리안은 왕자의 뒷모습이 커다란 문틈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그녀를 위로했다.

“걱정 마.”

저놈은 원래 말투가 저렇거든. 아드리안은 속으로만 불평하며 마시던 잔을 테이블에 무심하게 내려놓았다. 어차피 이 연회장에서 오래 있을 생각이 없었으므로 마침 잘되었다. 왕자를 달래러 가는 척하며 이 연회장을 나갈 수 있는 기회였다.

***

왕자가 준 기회로 아드리안이 연회장을 나와 기숙사로 돌아오자, 자신의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미하일이 곧바로 보였다. 상대가 아는 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드리안도 어깨를 으쓱이며 옷걸이에 겉옷을 벗어 걸어 둘 때였다.

왕자는 읽고 있던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넌 내 컵을 던졌잖아.”

“……응?”

“저 망할 화분보다 몇 배는 비싼 컵이었을 거라고.”

아드리안이 화분을 다시 주워 와 정성스럽게 이어 붙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건지 왕자는 창가의 화분 중 하나를 향해 눈짓했다.

아드리안은 그 말을 들으며 옷을 착착 펴서 옷걸이에 잘 걸었다.

“뭐, 그랬지.”

“그러니 공평하게 한 걸로 넘어가.”

아드리안은 여전히 책을 읽고 있는 미하일을 힐끔 바라보았다.

“좋아. 그런데-”

그러나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귀찮은 일은 사양이었으므로, 걸리는 것이 있다면 짚고 넘어가는 것이 편했다.

“……하나 더 말해 주자면 내가 던진 건 컵이 아니라 화병이었어. 그리고 넌 곧바로 내 책도 던졌잖아.”

팔랑- 미하일은 이제 해야 할 말을 다 했다는 듯이 아드리안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보던 책의 페이지를 넘겼다. 왕자는 전혀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하, 그냥 다 넘어가라는 거지? 아드리안은 유치한 어린애를 바라보듯이 잠시간 미하일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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