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3. 바사미엘 아카데미
드디어 바사미엘 아카데미 입학식 날의 아침이었다.
아드리안 헤더는 준비해 온 아카데미의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교복 착용 이외에 별다른 지시사항은 없었다. 아드리안은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결 좋은 금발을 손으로 몇 번 손질했다. 그리고 눈동자 색이 평범한 갈색으로 잘 바뀌어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거울에서 눈을 뗐다.
미하일 루스 이네하트는 새벽에 달리기한 후 잠시 쉬는 중인지 침대에 누워 눈을 붙이고 있었다. 운동 후에 잠깐 쉬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알고 있는 아드리안은 굳이 그를 깨우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어린애도 아닌데 상대를 챙겨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어련히 스스로 일어나서 입학식에 올 것이다.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는 나이는 십칠 세 전후였다. 이 년만 더 지나면 성인인 열아홉이니 이제는 알아서 할 나이었다.
입학 통지서와 함께 왔던 안내문을 봤을 때, 아카데미 입학식은 그리 크지 않은 행사라 생각했다. 아카데미 입학생은 매년 이백여 명으로 뭐, 간단한 교장의 인사 정도 있을 것으로 예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아카데미의 연회장으로 걸어가면서 그 생각을 수정했다. 연회장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바빠 보였다. 아카데미에서 일하는 사람인 듯한 이들이 무거운 물건들을 끌며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한쪽에서는 또 다른 교복을 입은 무리가 입학식과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악기들을 가지고 지나갔다. 사실 입학식이 아니라 파티였던 건가?
걸어가던 아드리안을 누군가 뛰어 지나쳐 갔다.
“곧 시작이다! 빨리 와.”
아드리안은 주변을 둘러보며 발걸음을 조금 빠르게 했다. 기숙사에서 아카데미의 연회장은 그리 멀지 않았다. 거리로 치자면 오히려 본교 건물보다는 연회장이 조금 더 가까운 편이었다. 매일 아침 지각하지 않기 위해 죽기 살기로 뛰어갈 학생들이 예상되었다.
아드리안은 다른 신입생들과 함께 연회장으로 향했다. 이들이 신입생이라 생각한 이유는 그들이 왠지 모르게 쭈뼛거리며 주위를 살피거나, 교복이 새것처럼 밝은색이어서였다. 그런 인간들의 모습이 귀여워 보였다.
고풍스러운 대리석 조각으로 장식된 벽의 커다란 나무 문이 이미 열려 있었다.
그 너머가 바로 바사미엘 아카데미의 연회장이었다.
연회장 가장 바깥쪽에는 큰 유리 벽이 있었다.
오늘은 날씨가 좋아 따뜻한 햇볕이 그 유리 벽을 통과하며 연회장 안의 물건들을 반짝이게 했다. 안 그래도 고급스러운 연회장의 가구들이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유리 벽 밖의 정원에는 스무 명 정도의 성인 남성이 양팔을 벌려야 줄기를 에워쌀 수 있을 만큼 큰 나무가 있었다. 아카데미를 둘러싼 숲은 그 커다란 나무를 보호하듯이 빼곡했다.
신입생들을 열두 개의 그룹으로 나눠 놓은 커다란 리스트가 연회장의 문 옆에 붙어 있었다. 신입생들은 그 종이를 확인한 후 각자 자신의 그룹으로 걸어갔다. 개중에는 벌써 친해진 학생들이 그룹이 나뉘었다며 우는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그중 일 번 그룹으로 ‘가넷’이었다. 열두 개의 탄생석으로 이름을 붙인 듯했다.
붉은 문양이 있는 표지판으로 가자 선생처럼 보이는 사람이 종이를 들고 있었다. 그는 열두 개로 나뉘어 무리 짓고 있는 신입생들 사이를 걸어 다녔다. 그는 그룹에 신입생이 잘 왔는지 체크하고 있었다. 아드리안이 그곳으로 걸어가자 이름을 묻곤 고개를 끄덕이며 이미 줄지어 서 있는 신입생들 뒤쪽을 가리켰다. 아드리안이 자신의 자리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미하일 루스 이네하트?”
모여 있던 신입생들이 순간 조용해졌다. 그들은 어렸지만, 자신들이 사는 왕국의 왕자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카데미의 선생님은 반응이 없자, 다시 한번 학생들을 향해 말했다.
“미하일 루스 이네하트 없습니까?”
주위의 신입생들이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아드리안 헤더는 ‘그렇게 누워 있더니 못 일어났나 보군.’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자리로 걸어갔다.
“미하일 군과 같은 방을 쓰는…… 어디 보자, 아드리안 헤더?”
다른 생각을 하던 아드리안은 자신의 이름이 그녀의 입에서 나오자 번뜩, 정신을 차렸다. 아드리안은 천천히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드리안 헤더도 없습니까?”
“네? 네. 여기 있습니다.”
“미하일 루스 이네하트와 같이 오지 않았나요?”
“……네.”
아드리안은 곤란했다. 룸메이트라고 알뜰살뜰하게 챙겨 오고 그럴 사이는 아니었다. 연회장 모두의 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눈으로 ‘저놈은 무슨 배짱으로 왕자를 안 챙겨 온 거야.’라고 말하고 있었다.
곧 연회가 시작될 분위기였다.
교복을 입은 몇 명의 학생들이 연회장에 아름다운 꽃들로 꾸며진 악단의 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저마다의 악기를 들고 조율하고 있었다. 그곳을 중심으로 아카데미의 이 학년, 삼 학년, 사 학년들이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아카데미의 교수진들 또한 이미 도착해 식이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왕자를 두고 식을 시작할 배짱까지는 없어 보이는 눈치였다.
“……제가 데려오겠습니다.”
아드리안이 먼저 말하자, 선생님은 미안하지만 그래 줘야 할 것 같다며 그를 칭찬해 주었다.
아드리안은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아카데미의 연회장을 홀로 나섰다. 교내의 모든 인원이 연회장에 모였는지 연회장 밖은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다. 대리석 바닥을 빠르게 뛰어가는 자신의 발걸음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복도를 지나 계단으로 향할 때였다.
“야!”
문제의 미하일 루스 이네하트가 보였다. 그는 매우 여유롭게 교정을 거닐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뛰어가던 발을 멈추고 계단 위에서 차가운 눈으로 왕자를 바라봤다.
“재깍재깍 안 와? 너 때문에 내가 다시 나왔잖아.”
미하일은 아드리안의 재촉에도 달려오지 않았다. 아주 품위 있는 걸음걸이였다.
“뭐가 문제야. 아직 시작 시각도 아닌데.”
미하일은 아드리안과 함께 다시 연회장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원래 이런 행사는 시작하는 시간보다 조금 먼저 와야지.”
“난 그렇게 안 해.”
왕자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왕족과 높은 귀족들은 파티가 시작한 후에야 모습을 드러낸다. 더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일수록 늦게 등장했다. 오히려 그들은 파티 시작 전에 도착했다는 것을 부끄러워할 정도였다.
“나중에 수업 시간에 지각하면 교수한테도 그렇게 잘 설명해라?”
아드리안은 미하일의 한쪽 팔을 잡고 앞으로 끌었다. 왕자의 속도가 너무 느려 둘 다 늦을 판이었다. 그에 왕자가 툭! 하고 아드리안의 손을 쳐 냈다. 자신의 손이 떨어지자 앞서 걸어가던 아드리안이 눈썹을 들어 올리고 뒤의 왕자를 바라봤다.
“멋대로 손대지 마.”
“아- 진짜 까다롭네. 그럼 빨리 오든가.”
연회장의 문은 다행히 아직 열려 있었다. 아드리안은 미하일을 가넷의 학생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와! 저기 봐. 진짜 왔다.’
‘나 왕족은 실제로 처음 봐.’
‘옆은 누구지? 저런 금발은 귀족 가문 중 어디였더라?’
‘왕자? 그 막내 왕자라고?’
자신들의 자리로 걸어가는 신입생 두 명을 바라보며 학생들이 수군거렸다. 악의 없는 순진한 궁금증을 담은 시선들이 두 사람을 진득하게 감쌌다.
“저기다.”
아드리안 헤더는 그런 학생들을 무시하며 미하일을 무사히 데려왔다. 학생들의 인원을 체크하던 선생님에게 미하일을 데려가자 그가 리스트의 마지막 공란을 드디어 채웠다.
“미하일 루스 이네하트?”
“네.”
미하일은 자신의 이름에 대답하며 모여 있는 신입생들을 둘러보았다. 미하일과 아드리안은 다른 신입생들보다 키가 머리통 한 개 정도는 더 컸다. 알 수 없는 고압적인 시선에 신입생들은 수군거림을 멈추고 왕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밝은 은색 머리에 선이 고운 얼굴이었으나 어딘가 모르게 눈가가 날카롭게 길어 무서운 인상이었다. 왕가의 핏줄답게 무척 아름다운 얼굴이긴 했으나, 차가운 표정에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
아드리안은 미하일과 함께 줄의 가장 뒤쪽으로 걸어갔다.
그때였다.
악기를 들고 있던 학생들이 연주를 시작했다. 연회가 시작하였음을 알리는 음악이었다.
그 음악에 맞추어 누군가 연회장의 중앙으로 걸어 들어왔다.
연회장에 모여 있던 인원들이 행동을 멈추고 그 중심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바사미엘 아카데미의 교장이었다.
회색빛의 길고 구불구불한 머리칼이 그녀의 허리 양옆까지 내려와 있었고, 바사미엘의 상징 색인 짙은 녹색의 긴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왕국의 최연소 왕궁 기사로 재직하며 평생을 몸 바쳐 루스타바란 왕국을 지켜 왔던 자였다.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꼿꼿한 자세와 허리에 찬 커다란 검에서 그녀의 올곧은 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아드리안의 눈에 미하일이 주먹을 힘주어 쥐는 것이 들어왔다. 아드리안은 옆에 서 있는 미하일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무심했던 그의 눈에 열기가 담겨 있었다. 아마 존경하는 기사에 대한 동경심일 터였다.
오래 살아 온 자 특유의 자애로운 표정의 그녀가 입을 뗐다.
“바사미엘 아카데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입학식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