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왕립 아카데미 기숙사에서 준비해 준 침대와 침구는 매우 편안했다.
누군가 부지런하게 방을 정리해 준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오랜만에 느껴 보는 아드리안 헤더였다. 레어는 그가 마법을 이용해 깨끗하게 청소하긴 하지만 이건 심적인 문제였다.
평화로운 아침 시간이었다.
촤아악-
기숙사의 커튼이 갑자기 사납게 걷혔다. 그 바람에 숙면을 취하고 있었던 아드리안의 얼굴에 직통으로 아침의 햇살이 쏟아졌다. 평온했던 아드리안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지금 기숙사 방 안에 있는 사람은 두 명이었고,
아드리안이 커튼을 걷은 것은 절대 아니었다.
미하일이었다.
저놈은 아침부터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돌아다녔다.
아주 이른 새벽에 기상해서 기숙사를 나섰다가 몇 시간 후 다시 기숙사로 돌아온 것이었다. 문이 벌컥 열리고 미하일의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열 시니까 커튼 걷는다.”
분명히 의문문으로 끝났어야 할 말이지만, 방 안에 들어온 인간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제멋대로 굴었다.
미하일은 한쪽 벽 전체를 가리고 있는 무거운 커튼을 크게 걷었다.
이에 아드리안은 입속으로 욕을 뱉으며 자신의 이불을 얼굴로 끌어당겼다. 그러나 이미 깨 버린 꿀 같은 숙면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드리안은 짜증을 내며 이불을 옆으로 치웠다. 창문의 밝은 햇빛에서 열 시라면 당연히 모든 인간이 일어나야 한다는 왕자의 고정 관념이 느껴졌다. 왕자는 커튼 뒤의 유리창도 힘차게 열었다.
아드리안이 통상적인 기상 시간을 한참 넘겨서까지 누워 있는 것은 맞았다. 오전 열 시였다. 기숙사 벽면 중앙 창문의 커튼을 밀어 재껴도 불만을 당당하게 말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열린 창문 틈으로 맑은 공기와 새소리가 들어왔다. 아드리안은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켜 이딴 짓을 한 룸메이트를 찾았다. 그는 기숙사의 바닥에서 가볍게 팔 굽혀 펴기를 하고 있었다. 아카데미의 기숙사 방은 넓어서 몇 명이 적당히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크기였다.
왕자의 빠른 기상은 저것 때문인 듯싶었다.
아드리안의 침대에서 자다 깨 가라앉은 목소리가 힘없이 나왔다. 기숙사 입소 첫날의 유치한 싸움 뒤에 미하일에게 처음으로 하는 말이었다.
“……훈련장은 안 열었냐?”
노인네도 아니고 뭔 이렇게 새벽부터 일어나냐는 것까지는 귀찮아서 말하지도 않았다.
왕립 아카데미는 수많은 기사를 배출한 곳이다. 그런 아카데미에 왕족과 귀족들의 입맛을 완벽히 맞추어 놓은 훈련장이 없을 리가 없었다.
“가 봤지. 아직 학기 시작 전이라,”
미하일은 기숙사 바닥에서 가볍게 팔 굽혀 펴기를 하면서 대답했다. 미하일은 훈련장 앞의 안내판을 확인한 후 발걸음을 돌려 아카데미 내부에 있는 숲의 산책로를 간단하게 뛰었다. 그러나 그 달리기로는 평소 아침마다 했던 훈련량에 비하면 모자랐다.
“-신입생들은 이용 못 한다고 적혀 있던데.”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 숨소리가 들렸다. 왕립 아카데미의 새 학기는 아직 일주일 정도 남아 있었고, 기숙사에 들어온 이후 일주일간 신입생들은 마지막 자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훈련장에 가고 싶어서 그 앞을 기웃거린 것은 미하일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이럴 때 잘난 네 권력을 휘두르라고.”
왕자는 안내판을 본 이후에 노크해 보지도 않고 깔끔히 포기한 듯했다. 아드리안이 생각하기에는 순진한 짓이었다. 오늘 훈련장의 관리인이 누구든, 왕자가 훈련장에 들어가고 싶어 했다면 있는 문을 뜯어서라도 들여보냈을 것이다. 바사미엘 아카데미의 모든 교수진은 물론 직원들도 올해 왕자가 입학한다는 이야기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을 게 뻔했다.
미하일은 투덜거리는 아드리안의 중얼거림 정도는 가볍게 무시했다. 아드리안은 어차피 잠도 다 깬 김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드리안이 반쯤 일으킨 몸으로 미하일을 쳐다보았다.
미하일이 몸통을 움직일 때마다 그동안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전신의 근육이 가벼운 옷차림 밑에서 꿈틀거렸다.
“앞으로 이렇게 매일 운동할 건가 봐?”
열정적으로 목표를 갈망하는 사람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런 노력은 시야 밖에서 해야 더 아름다울 것 같다고 아드리안은 생각했다.
“‘이렇게’? 매일 운동을 하긴 한다만?”
“……됐다.”
이로써 훈련장이 열리길 애타게 기다리는 신입생이 아카데미에 두 명이 되었다. 기록적인 숫자였다.
아드리안의 이번 유희가 소드 마스터와의 모험이었다면, 아주 바람직한 풍경이었을 것이다. 아마 그랬다면 그도 왕자의 옆에서 함께 수련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훈련이라…….
문득 고개를 돌려 왕자가 아끼던 검집을 바라보았다. 그 검집에는 티끌 한 점 없는 보석들이 아름답게 세공되어 있었다.
저런 화려한 검을 볼 때면 어쩔 수 없이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아드리안은 인상을 찌푸리며 방금 잠에서 깨어난 뺨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몇백 년 동안 잊고 있었던 인간이었다. 그는 왕자의 저 밝은 은발과 완전히 똑같은 색의 머리카락을 가끔씩 가볍게 흩트리고는 했다.
미하일이 훈련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은발이 흔들리고 그 틈으로 왕자의 붉은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
저 눈동자를 가졌던 인간이 드래곤을 향해 밝게 웃으며 소리쳤다.
‘이거 봐! 드디어 검기를 다룰 수 있게 되었어!’
그 이야기에 훈련장 벽에 등을 기대어 앉아서 책을 읽고 있던 아름다운 금발을 가진 남자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훈련장의 중앙에서 당당하게 커다란 장검을 들고 있는 남자를 힐긋 살펴보았다.
기사가 들고 있는 검 끝은 희뿌연 빛이 곧 꺼질 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검을 감싸고 있는 것이 검기는 맞았으나…….
곧 꺼질 듯한 빛이라는 것이 중요했다.
‘……그 정도 검기 가지고는 소드 마스터라고 말하기도 민망하겠는데?’
‘푸하핫, 그런가?’
기사 훈련복을 입은 남자가 아름다운 입술을 늘려 밝게 웃었다.
여전히 무표정인 드래곤을 향해 밝게 웃는 남자가 들고 있는 것은 그의 키와 비슷한 장검이었다. 칭찬은 바라지도 않았으나 예상하지도 못했던 무심한 반응에 남자는 한동안 소리 내어 웃었다.
그때였다.
집중력이 흐트러졌는지 감돌던 희뿌연 빛마저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남자는 나직하게 ‘……이런.’이라고 중얼거리며 장검을 휙, 휙 휘둘렀다. 금발을 가진 남자는 기사의 검술 훈련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므로 곧바로 손에 들고 있는 책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카를로는 휘두르던 검을 검대에 밀어 넣었다. 그는 간소한 훈련복 차림으로 바닥에 앉은 골드 드래곤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힘들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야겠어.’
고된 훈련을 마치고 드래곤 바로 옆에 자리 잡은 그가 다시 질문했다.
‘넌 마법사면서 어떻게 그렇게 검에 대해 잘 알아?’
골드 드래곤은 끊이지 않도록 질문을 해 대는 카를로가 귀찮았으나, 언제나처럼 대답은 착실하게 해 주었다. 카를로에게는 미안하지만 드래곤이 검술을 마스터한 지는 한참이었다. 그의 눈에 카를로가 하는 훈련은 어린아이가 검을 들고 위태롭게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소드 마스터는 마나를 이용해서 검기를 움직이니까.’
골드 드래곤은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이 퉁명스레 대답했다. 드래곤의 입에서 나온 것은 마법사들이 할 만한 대답이었다.
‘하긴. 그렇지?’
카를로 데 이네하트는 자신의 검날을 손가락으로 쓱- 문질렀다. 그의 검술은 웬만한 인간의 능력을 넘어섰다. 하지만 소드 마스터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영역이었다.
‘나는 하루라도 더 빨리 소드 마스터가 되어야 해.’
카를로 데 이네하트가 다짐했다. 그는 속으로 생각하면 될 것을 입으로 말해서 스스로 힘을 얻는 피곤한 스타일이었다.
‘알아.’
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골드 드래곤은 인간의 인생에 끼어들 의지가 전혀 없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카를로가 절대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
“왜?”
갑자기 들린 소리에 아드리안이 정신을 차렸다. 미하일이 그의 침대 옆에서 운동을 잠깐 멈추고 땀을 닦으며 아드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을 향한 시선에 아드리안이 뭔가 할 말이 있다고 생각했던 듯했다.
“……뭐.”
“네가 신경 쓰이게 이쪽을 보잖아.”
“신경을 쓰지 마.”
아드리안은 침대에 사납게 드러누우며 대답했다. 그는 하루빨리 학기가 시작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서 공부나 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