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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5화 (5/184)

5화

아드리안 헤더의 악수를 무시한 채, 남자는 방 안의 창가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아드리안이 놔둔 화분 몇 개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창가의 중간 즈음에 있는 화분을 큰 손으로 들어 올렸다.

“아. 그건-”

수업의 준비물이라는 이야기를 마저 하려는 순간이었다. 남자는 들어 올렸던 손을 털어 허브 화분을 창밖으로 밀어 던졌다. 더러운 것을 버린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이에 창밖에서 작게 화분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드리안의 웃고 있던 입가가 떨렸다. 남자를 향해 시선을 보내자 그가 입꼬리를 삐죽하게 올려 대답했다.

“절반을 넘겼잖아.”

남자는 기숙사 방의 창문부터 문까지 검지로 깔끔하게 보이지 않은 선을 그었다. 그는 창문의 중간 즈음에 있었던 화분이 거슬렸던 것이다.

그래?

아드리안은 발을 움직여 방금 그의 고용인이 놔두고 간 유리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적어도 몇백 년은 되어 보이는 유리병으로, 솔직히 아카데미 기숙사 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남자는 자신에게 걸어오는 아드리안을 보고도 관심 없다는 듯이 자신의 짐을 확인하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손에 집어 든 유리병을 똑같이 창문 밖으로 집어 던졌다. 조금 전에 들렸던 화분 깨지는 둔탁한 소리와 다르게 청아하고 맑은 소리가 들렸다. “으악, 뭐야!”라고 아래층에서 어떤 학생의 목소리도 들렸다.

그 소리에 왕자는 아드리안에게 고개를 돌렸다.

“……미쳤냐?”

“얼마야? 물어 줄게.”

“…….”

왕자는 유리병 따위의 금액을 알고 다닐 정도로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다. 왕자는 아드리안의 짐이 놓여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아드리안은 팔짱을 끼고 어떤 짓을 하는지 잠자코 기다렸다. 남자는 아드리안의 두꺼운 책 하나를 검지와 엄지만을 이용해서 들어 올렸다. 남자는 아드리안과 시선을 마주한 채로 책을 든 손을 창밖으로 뻗었다. 아드리안은 눈썹 한쪽을 들어 올린 채로 그것을 말리지 않았다.

왕자는 무거운 책을 다시 한번 창밖으로 던졌다.

“이걸로 될 것 같은데.”

절대 아니었다. 유리병은 왕실에서 사들인 물건으로 이름 있는 장인의 작품이었고, 책은 아카데미 일 학년생이 읽을 만한, 책방에서 발에 채는 물건이었다. 방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고용인이 들었다면 기함을 토할 발언이었다. 그러나 아드리안을 빡치게 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아드리안이 다시 한번 남자의 구역으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그쪽 이름이 뭐라고?”

왕자의 질문에 아드리안이 발걸음을 멈췄다.

그걸 왜 물어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처음 만난 룸메이트의 물건을 집어던지는 데에 서로의 이름 따위는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아드리안 헤더.”

“……들어 본 적 없는 성이군.”

왕립 아카데미의 일 학년은 무조건 아카데미의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교칙이 있었다. 아카데미 입장에서는 귀한 핏줄인 왕자를 다른 귀족보다 아예 작위가 없는 평민과 같은 방으로 배정하는 것이 편했다. 작위가 없는 평민들은 대부분 왕족이나 고위 귀족에게 아무런 항의도 못 한 채, 찍소리도 못 내고 일 년간 생활했다. 왕자는 한숨을 쉬며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왕국의 평민에게 차분히 설명했다.

“아무리 아카데미 안에서는 신분과 관계없이 생활한다 해도, 이딴 식으로 행동하면 가문에 좋지 않을 텐데?”

“그러면 그쪽 가문은 이딴 식으로 행동해도 좋나 봐.”

왕자의 말에도 아드리안은 자신이 하려던 일을 계속했다. 가짜 아드리안 헤더의 가문 따위 망하든 말든 아무 관심이 없었다.

왕자의 짐 사이에서 아까부터 자신을 부숴 달라는 듯이 반짝거리는 검집이 보였다.

그것은 왕자가 조금 전 쉽게 버린 유리병과는 달리 그가 아끼는 검이었다. 아드리안이 손을 뻗자, 왕자가 그제야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아드리안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자신의 검집을 잡고 끌어당겼으나 그것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비슷한 체격인 상대라 왕자는 오랜 시간 해 왔던 수련으로 자신의 힘이 훨씬 우위에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눈앞의 룸메이트가 쥔 검집은 왕자가 힘을 줄 때마다 떨리기만 했다.

“야! 이건 안 돼!”

“안 되는 게 어딨어.”

아드리안은 픽하고 웃으며 검집을 자신 쪽으로 다시 잡아당겼다. 그에 다른 쪽 검집을 잡고 있었던 왕자가 슬금슬금 끌려왔다. 아드리안은 어린놈의 버르장머리를 초장에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아드리안의 힘에 왕자는 온 힘을 다해 검집을 붙잡았다.

“놔! 안 놔?!”

“내가 왜? 나가서 내 화분이랑 책을 다시 주워 오면 사과를 받아 주지.”

“건방진 새끼가, 이게 얼만 줄 알고?

아드리안이 이 정도 잡검은 몇 개든 충분히 사 줄 수 있다고 말할 참이었다. 누군가 그들의 방에 들어왔다.

“…….”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고용인이 들어온 소리였다. 그는 방 안에 소란이 일자 노크를 했었다. 하지만 방 안의 두 사람은 그들의 대화를 하느라 그에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고용인은 한동안 고민을 하다 결국 의무감을 가지고 기숙사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본 광경이 바로 이것이었다. 방금 마주쳤던 어느 가문의 청년이 왕자가 아끼는 검집의 양 끝을 잡고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고용인은 조심스럽게 아드리안과 왕자 사이로 걸어와 아드리안이 검집을 잡고 있는 손등을 슬쩍 감쌌다. 고용인의 신분으로 왕자를 말릴 수는 없으니 상대방을 말리는 것이었다. 아드리안은 사납게 웃고 있었던 표정을 풀었다. 유치한 애들 힘겨루기에 애꿎은 일반인을 끼우는 것은 불공평했다.

아드리안은 손에 힘을 툭, 하고 놓았다.

왕자는 그 반동에 자신의 검집과 함께 뒷걸음을 몇 번 걸었다. 그의 다리가 침대가 닿아 와서 볼품없게 나동그라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아드리안은 검집을 잡고 있던 손을 보여 주기식으로 살짝 털었다. 이에 당황하던 고용인이 감사의 뜻으로 흐린 미소를 보내 주었고, 아드리안 또한 슬쩍 웃었다.

그와는 별개로 룸메이트라는 남자는 여전히 아드리안을 사납게 살펴보고 있었다.

“이런 놈이랑 일 년간 방을 같이 써야 한다니.”

“동감이야.”

아카데미 기숙사 입소 첫날이었다.

아드리안은 편지와 함께 동봉되었던 기숙사 규칙을 머릿속으로 죽, 훑었다. 기숙사 방 배정을 다시 받는 것에 대한 교칙은 딱히 없었다.

아드리안은 기숙사 정리를 마치자마자 방 밖으로 나갔다.

그는 그길로 일 층 중앙 로비로 걸어가 기숙사 배정표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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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루스 이네하트

아드리안 헤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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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루스 이네하트…….

가문 어쩌고 이야기를 하더니 이네하트라면 왕족의 성이었다. 아드리안의 표정이 차게 식었다. 그가 겪은 바로는 이네하트들하고는 잘 맞지 않았다.

왕국을 세웠던 카를로 데 이네하트의 활짝 웃는 얼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밖에서 그를 볼 때면 그의 흰색에 가까운 은발이 햇살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생각해 보니 그의 얼굴을 조금 닮은 것도 같았다.

흐음,

아드리안은 한숨을 내쉬며 기숙사 배정표에서 크게 몸을 돌려 나갔다. 이전 유희에서 마주쳤던 사람의 흔적을 만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유희는 그때 한 번으로 끝나야 하기 때문이다.

아드리안은 곧바로 본관의 입학처를 찾아가 기숙사 배정에 대해 문의했다.

“……기숙사 방은 학기가 시작되면 바꿀 수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기숙사의 학생들 중 아무도 왕자와 같은 방을 쓰겠다는 인간은 없었다. 아드리안은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왕자의 지랄 맞은 성격을 다들 이미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후- 골드 드래곤은 터덜터덜 입학처에서 걸어 나와 기숙사 건물을 향해 걸었다. 그러다 그는 갑자기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이 기숙사 건물 현관에서 발걸음을 돌렸다. 드래곤은 기숙사 방의 위치를 대강 생각해 보며 기숙사 건물을 빙- 둘러 걸었다.

그의 방 창문이 보이는 일 층 잔디에서 처참하게 깨진 유리 조각들이 보였다. 왕자의 화병과 드래곤의 화분이 조각나 엉망으로 뒤섞여 있었다. 그나마 위안이 된 것이 있다면 화분이 커다란 조각으로 깨져서 어떻게 붙이면 화분의 역할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거였다.

아드리안은 화분 조각들과 파란 식물 줄기를 조심스럽게 챙겨 기숙사로 돌아갔다. 다행히 디에나의 뿌리가 상하지 않아서 흙에 심는다면 다시 살아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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