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같이가용-4화 (4/184)

4화

2. 그들의 첫 만남

드래곤이 인간들 틈에 섞여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생활하는 것을 유희라고 일컫는다.

“이렇게 이번 검투 대회의 최종 우승자가 결정되었습니다! 결승전까지 올라오는 동안 단 한 번도! 승리를 내어 준 적 없는 당대 최고의 검투사를 소개합니다! 여러분! 박수로 맞이해 주십시오!!”

검술이면 검술.

“마나 수식을 이렇게 간단하게 줄일 수 있다니……! 젊은이 같은 천재는 처음 본다네! 부디 우리 왕궁 마법사 협회의 수장 자리를 빛내 주시오!”

마법이면 마법.

드래곤이 손대는 것은 인간이 이룩한 모든 결과물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결실을 꽃피웠다. 인류의 발전은 인류 전체의 노력이라기보다는 간간이 등장하는 몇 명의 천재가 이뤄 나가는 것이라고들 한다. 어쩌면 그들은 유희 중인 드래곤일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몇 번의 유희를 통해 왕국이 건국되고, 다시 그 왕국이 전쟁으로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함께 모험했던 동료들이 죽거나 다치는 것을 드래곤이 아니라 인간 동료로서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다. 모험들은 모두 멀리서 보면 아무것도 아닐 명분 혹은 재화를 위해, 그것도 아니면 사랑을 위해서였다.

그들의 목표는 시시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유희가 끝나면 골드 드래곤은 곧장 무료해졌다.

인간 세상으로 나가 볼까-라고 다시 생각하게 만든 것은 사소한 계기였다.

드래곤 레어에 처음 본 식물 군집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특이해 보이는 식물을 꺾어 와 레어에서 관찰했다. 도무지 그것의 이름을 알 수 없었다. 가지고 있는 모든 약초학, 식물학 책을 꺼내 오고 논문들을 펼쳐 봐도 찾을 수 없었다.

일말의 고민도 없이 채집해 온 식물을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어 삼켰다. 상상했던 맛이 혓바닥에서 느껴졌다. 그것의 알싸한 쓴맛은 그의 밑바닥에 잠들어 있는 욕구를 일깨웠다. 그것은 호기심이었다.

한동안 양피지에 코를 처박고 있었던 골드 드래곤이 빠르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언제나 지겹다는 표정만 짓고 있었던 남자의 얼굴에 간만의 미소가 떠올랐다.

“찾았다.”

골드 드래곤은 당분간 흥미를 붙일 거리를 찾아내고야만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떠올리는 것이 힘들었지, 그것을 실행하는 데에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인간 세계에서 생활하려면 적당한 신분이 필요했다. 그런 사소한 준비는 레어 한편에 모아 둔 보석 몇 개로 충분했다.

드래곤은 왕국 내의 어떤 상인 아들의 신분을 빌릴 수 있었다. 왕립 아카데미라 왕족, 귀족이 아닌 이상 어느 정도 부와 명예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까다로운 귀족의 신분보다는 어느 정도 자유로운 상인의 신분이 편했다.

아카데미 입학 신청서는 별로 요구하는 정보가 없었다. 왕립 아카데미 입학에는 신분이 가장 많은 것을 차지했다. 현재 마땅한 작위는 없었기 때문에 신청서와 함께 수표를 동봉했다. 골드 드래곤은 레어에 이미 가지고 있었던 종이 편지 봉투에 신청서와 종이들을 잘 정리해서 책상으로 걸어갔다.

책상 위에는 오 단으로 된 보관함이 있었다. 각 보관함은 얇은 종이나 서류를 보관할 만한 크기의 서랍이 있었다. 보관함의 가장 윗단에는 가게에서나 볼 법한 작은 초인종이 놓여 있었다. 그 보관함은 왕국 각지에 설치한 우편함으로, 그가 마법을 사용해 각 공간을 이어 놓은 것이었다. 그는 우편함 중 하나에 편지 봉투를 넣고, 위의 초인종을 짧게 두드렸다. 그러자 스윽, 하고 종이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우체부가 편지를 수거하는 소리였다.

편지에 답장을 받은 것은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뜨거운 커피를 내려 정원으로 향하는 참이었다. 보관함 위에 놓여 있는 초인종이 띠링, 하고 맑은 종소리를 울렸다. 우편함 중 하나에 편지가 도착했다는 뜻이었다.

골드 드래곤은 그 소리를 듣고 커피를 근처 탁자에 내려놓고 보관함으로 걸어왔다. 보관함 서랍을 세 개째 열었을 때야 편지를 찾을 수 있었다. 고급스러운 재질과 격식을 차리려 대필가가 쓴 듯한 주소지의 아름다운 글씨는 그것을 열지 않아도 왕립 아카데미의 편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골드 드래곤은 편지 봉투를 손톱으로 지익- 긁어 열었다. 자잘한 펄이 들어간 진줏빛 편지가 그 안에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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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사미엘 아카데미 입학 허가서]

수신인: 아드리안 헤더

귀하가 바사미엘 아카데미에 입학 지원한 결과를 안내해 드립니다.

바사미엘 아카데미는 학문의 진보와 왕국의 발전을 위해 오랫동안 힘써 왔습니다. 뛰어난 자질을 가진 자. 학업을 탐구하는 정신을 이어받을 왕국 국민을 입학을 허가하고 있습니다.

이에 루스타바란 왕국 국왕의 승인을 받아 올해 바사미엘 아카데미에 귀하의 입학을 허가합니다.

자세한 설명은 함께 동봉된 자료를 참고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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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왕립 아카데미에 지원하는 편지를 제출하면서 일반적인 국민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액을 아카데미에 기부했다. 그 돈이 뛰어난 자질이나 학업을 탐구하는 정신을 보여 주는 것이라면 뭐, 할 말은 없었다.

골드 드래곤은 손에 들고 있는 편지 끄트머리에 불씨를 일으켰다. 화르륵, 진줏빛의 아름다웠던 편지가 순식간에 재로 변했다. 드래곤은 격식만 차린 편지보다 더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는 아카데미 설명 자료를 들고 소파로 걸어갔다.

커다란 몸은 털썩, 하고 푹신한 소파에 묻혔다. 입학에 필요한 준비물들을 눈으로 읽으며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은 손짓으로 어느 한구석에 가져다 모았다.

챙겨야 할 짐이 많았다.

신입생을 위한 안내문에는 일 학년은 필수로 기숙사에 묵어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아드리안 헤더.”

골드 드래곤은 자신의 입으로 이름을 발음해 보았다. 그가 이제 익숙해져야 하는 단어였다.

***

아드리안은 부지런히 레어에서 출발하여 루스타바란 왕국의 바사미엘 아카데미를 찾았다. 애매한 거리는 일반인들 시선 밖에서 텔레포트를 사용했고, 짐은 애초에 가볍게 챙겨 와 거슬리지 않는 무게였다. 골드 드래곤의 일정에 방해가 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바사미엘 아카데미는 왕국의 수도와는 거리가 조금 있는 도시에 있었다. 어느 정도 아카데미에 다가서자, 여러 대의 고급 마차가 말을 타고 가고 있는 아드리안의 옆을 지나쳤다. 고급 마차의 유리창에서 어린 청년들 특유의 싹수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지만, 아드리안은 어른 된 마음으로 그것을 무시했다.

왕립 바사미엘 아카데미의 첫날은 신입생들로 시끌벅적했다. 신입생들은 이미 저마다 친분이 있었는지 밝은 얼굴로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그런 인간들 사이를 걸어가 빠르게 입학 수속을 마쳤다. 이후 입학 허가서에서 안내받아 알고 있었던 기숙사 건물로 걸어갔다.

바사미엘은 왕립 아카데미답게 숲으로 둘러싼 넓은 교정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나 비싼 입학비로 교정을 다듬는 데에 아끼지 않았는지, 기숙사는 고풍스러운 멋이 있었다.

아드리안의 방은 기숙사의 이 층이었다. 그는 자신의 방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해가 뜨는 방향으로 창이 나 있어서 창가에 무언가를 키워도 될 정도였다. 가져온 짐들을 놔두기 위해서 아드리안은 이층 침대의 아래쪽을 정리하고 있었다. 기숙사 방의 침대 두 개가 완벽히 똑같은 모양이었고, 방을 정확하게 갈라 똑같은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드리안은 더 마음에 드는 쪽을 골랐다. 그가 고른 것은 방문을 들어섰을 때 왼쪽의 침대였다.

그때 문이 열렸다. 어떤 남자가 자신의 짐을 들고 기숙사 방으로 들어왔다.

아드리안은 그가 하던 일을 멈추고 문 쪽으로 고개를 들어 올려 밝게 웃었다. 아드리안은 그가 자신의 룸메이트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일 년간 함께 지내야 할 사람이라면 좋은 첫인상을 주고 싶었다.

“안녕.”

그 인사에 짐을 든 남자가 몸을 움찔, 움직여 당황했음을 보여 주었다. 그러고는 작은 목소리로 아드리안에게 속삭였다.

“……저는 일개 고용인입니다. 편히 대해 주십시오.”

아드리안은 그 말에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왕립 아카데미에서는 지위의 높고 낮음과 관계없이 고용인을 데리고 들어올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아드리안의 룸메이트는 기숙사 입소 첫날부터 교칙을 어기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을 고용인이라 소개한 남자는 들고 있던 짐을 차곡차곡 방에 정리했다. 아드리안은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계속해서 기숙사 방에 들어오는 짐을 보아하니 있는 집안의 도련님인 듯했다. 하나같이 값이 비싼 물건들이었고, 그마저도 대놓고 부를 자랑하기 위한 것들이 아닌 질 좋은 것들이었다. 간단한 짐을 가져와 방에 정리하고 있었던 아드리안 쪽의 구역과 반대편 도련님의 구역이 한눈에 구분이 될 정도였다.

그때였다. 아드리안과 비슷한 키를 가진 청년이 방에 들어섰다. 관리가 잘된 부드러운 은색 머리를 가졌으나, 아래의 눈매와 표정이 사나워 그다지 좋은 첫인상을 주지는 못했다. 아드리안이 기다리고 있었던 진짜 그의 룸메이트였다.

짐을 나르던 남자가 정리를 간단히 끝마쳤다고 이야기한 후 기숙사 방을 조심스레 나섰다. 아드리안과 새롭게 방에 들어선 남자는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드리안이 자신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자, 남자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맞받아쳤다.

“뭐? 불만 있으면 네가 방 바꿔.”

“불만은 없어. 반갑다.”

아드리안은 픽 웃으며 그에게 걸어갔다. 그는 처음 보는 룸메이트에게 한쪽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룸메이트는 악수를 기다리는 손을 슬쩍 눈짓한 후 커다란 몸을 크게 반대편으로 돌렸다.

……저, 저 싸가지 없는?

내밀었던 한쪽 손을 멋쩍게 내리며 골드 드래곤은 요즘 젊은것들의 예의 없음을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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