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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3화 (3/184)

3화

레어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마나에 휩싸여 왕성으로 억지로 소환당한 드래곤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금빛 눈동자가 조용히 일렁거리며 방 안의 인간을 차갑게 힐난했다.

분명히 소원이 떠오르면 부르라고 했을 텐데? 드래곤은 무심한 얼굴로 왕자를 바라보았다. 재소환당한 것이 기분이 더러웠다. 미하일은 드래곤의 짜증을 눈치챈 것인지 재빠르게 입술을 열었다.

“……소원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뭐, 드래곤은 바로 화를 풀었다. 소원이 떠오르면 말하라고 한 것은 자신이었고, 그것을 빨리 듣고 빨리 이뤄 주면 줄수록 좋았다.

드래곤은 푹신한 소파에 천천히 다시 몸을 뉘었다. 마시던 차가 아직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식어 있었다.

드래곤은 그의 늘씬한 검지손가락을 찻주전자의 미끄러운 표면에 살짝 가져다 댔다. 그러자 곧 푸쉭- 차가 다시 뜨겁게 데워지면서 김이 올라 찻주전자의 뚜껑이 달칵거렸다. 그는 자신의 찻잔에 그것을 조금 따라 내곤 찻잔을 입술에 가져갔다.

으음, 맛있네. 드래곤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말해 봐. 뭐든지 들어줄 테니.”

드래곤은 이렇게 된 김에 오랜만에 밖을 나온 것을 즐기기로 했다. 때문에 왕자가 이 왕국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달라 했어도, 군말 없이 왕국을 그의 손에 넘겨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자가 꺼낸 소원은 무척이나 이상한 것이었다. 억겁의 시간 동안 인간들의 소원을 들어주었던 드래곤도 들어 본 적 없었을 만큼.

“……시신 하나를 찾고 싶습니다.”

웬 시신? 드래곤은 잘생긴 낯을 한껏 찌푸리며 테이블 앞의 소파에 두 주먹을 자신의 무릎에 붙인 채 앉아 있는 왕자를 쳐다보았다.

“뭐에 쓰려고. 아니, 아니 용도는 궁금하지 않아.”

흠, 골드 드래곤은 잠시간 아무 말도 않고 눈앞의 인간을 바라보았다. 미하일은 뜬금없는 소원을 빌어 놓고 담담히 드래곤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래곤은 아무래도 이 어린 인간에게 드래곤에게 빌 만한 소원을 알려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몇백, 몇천 년에 한 번이나 있을 만한 기회였다. 이 귀중한 기회를 저런 사소한 볼일에 사용한다면 아주 아까운 일이었다. 드래곤은 자신의 힘에 대한 프라이드와 책임감이 있었고, 겨우 이런 일에 드래곤의 힘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미하일 루스 이네하트는 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골드 드래곤에게 다시 한번 말해 주려 입을 열었다.

“시신을 찾아서 장례라도 치러 주려-”

드래곤은 차갑게 대답했다.

“용도는, 궁금하지 않다고 방금 내가 말했을 텐데.”

골드 드래곤의 밝은 금색 눈동자를 빛내며 단번에 왕자의 말을 끊었다.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의 범위에 대해 다시 말해 주어야겠군. 네가 소드 마스터가 되고 싶다면, 내 손짓 한 번에 바로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 이 왕국을 아니 이 대륙을 가지고 싶어도 마찬가지지. 이 고귀한 몸에 지금, 이 순간에 한마디 말만 하면 무엇이든지 이루어 주는 천금 같은 기회를 고작 인간일 뿐인 너에게 허락한다는 것이다.”

드래곤의 금을 갈아 넣은 금안이 뜨겁게 불타올랐다. 왕궁 안의 모든 값지고 귀한 것들을 스스로 빛바래게 만드는 아름다움이었다.

멈칫, 왕자는 눈앞의 비인간적인 광경에 몸을 굳히고 골드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사랑하는 이가 있나? 평생 너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도록 마법을 써 주지. 돈을 가지고 싶나. 이 대륙에서 가장 많이? 그렇다면 내가 이 방을 보석과 금화로 가득 채워 주겠다.”

미하일은 자신의 두 주먹을 바라보았다.

***

아드리안의 멍청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약초 채집을 한다며 온 산을 뒤지던 그놈은 절벽 끝에서 무언가 발견했다는 듯이 미하일의 이름을 불렀었다. 다른 곳을 살피고 있던 미하일이 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아드리안의 몸이 천천히 절벽 아래로 쓰러지는 것이 왕자의 눈동자 안에서 맺혔다.

잡아. 미하일의 몸은 어느 순간 그 절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멍청하게 절벽의 돌 틈을 붙잡고 눈가를 찡그리며 매달려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미하일은 교복이 더러워지는 것을 신경 쓰지도 않고 절벽 끝에 몸을 눕혔다. 그러고는 매달려 있는 아드리안을 안심시키려는 듯이 애써 웃으며 최대한 팔을 내밀었다. 곧바로 잡기에는 거리가 부족해 보였으나, 손만 잡는다면 충분히 끌어 올릴 수 있었다.

‘이 손 잡아!’

미하일이 크게 소리쳤다. 아드리안은 절벽 끝에 매달린 채,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잡으라고!’

윽, 미하일은 식은땀을 흘리며 팔을 밑으로 최대한 더 내렸다. 간당간당한 거리에 손가락을 움직여 아드리안의 손을 낚아채려 했으나 닿지 않았다. 아드리안 헤더의 결 좋은 금발 머리카락이 휙- 바람에 휘날렸다. 그 바람에 그의 흰 이마와 날렵한 콧대가 드러났다.

아드리안의 표정이 드러났다. 그는 미하일을 바라보며 살짝 미소 짓고 있었다. 미하일은 그 표정에 온몸의 피가 단번에 식는 것을 느꼈다.

‘……아드리안?’

그리고 아드리안은 절벽의 끝을 붙잡고 있던 두 손을 가볍게 놓았다.

***

드래곤은 루스타바란 왕국의 건국 신화에서나 등장하는 전설적인 생명으로, 왕국의 국민이라면 어렸을 때부터 왕국을 굳건히 지켜 주고 있는 드래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 왔다. 왕가의 일원인 미하일 또한 더하면 더했을 정도로 드래곤에 대한 전설들과 이야기들을 접해 왔다.

그 수많은 잔혹하고 아름다운 묘사들과 일화들을.

때문에 왕자는 곧은 자세로 응접실의 소파에 앉아 자신의 무릎 위에 두 주먹이 떨리는 것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왕자의 고집은 두려움에 꺾이지 않았다.

“필요 없습니다.”

미하일이 고개를 번뜩 위로 쳐들었다. 뭐라고? 드래곤의 불만 어린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왕자는 대답했다.

“당신이 말한 것들은 모두 제힘으로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소중한 것을 고작 소원으로 이뤄 내고 싶지도 않습니다.”

왕자는 주먹을 쥔 손을 움직여 응접실의 테이블에 쾅, 하고 내리찍었다. 드래곤은 그것을 바라보며 어디서 지금 감히? 라고 생각했으나 왕자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 보고 싶기에 바로 화내지는 않았다.

“제 소원은 아드리안 헤더의 시신을 찾는 것입니다. 다른 소원은 없습니다.”

드래곤은 미하일의 구체적인 소원을 듣고는 그의 아름다운 금안을 내리깔고 후룩, 차를 마셨다.

적당한 온도였다.

그는 고민했다. 아드리안의 시신이라면 이 대륙에 없었다. 방금의 소원 범위에서 드래곤이 일부러 포함하지 않은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드래곤의 것이요, 그의 권속이었으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그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대륙에 없는 것을 원하는 이들의 소원은 들어줄 수 없었다. 예를 들면,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 내라고 한다든가, 드래곤도 모르는 기술을 발명한다든가…… 지금처럼. 죽지 않은 사람의 시선을 찾아 달라고 한다든가.

레어에 심어 놓은 만드라고라는 다 자랐으려나?

물론 적당히 넘어갈 수 있는 꼼수는 있었다.

“후회할 텐데.”

드래곤은 찻잔을 달칵, 테이블에 올렸다. 미하일은 드래곤의 말에 “아니오.”라고 말하며 눈을 치켜떴다.

“그가 죽은 후…… 절벽을 포함에 숲의 모든 곳을 병사들을 풀어 샅샅이 살펴봤습니다. 숲의 모든 바위,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까지. 그리고 추적술에 유명한 마법사까지 여럿 데려가 봤죠. 그러나 아드리안의 발자국, 아니 그의 핏자국 한 방울조차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이상할 정도로 아무런 흔적이 남아 있지 않더군요. 마치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한 적 없다는 듯이.”

그럴 것이다. 드래곤의 이동마법을 추적할 수 있는 인간은 없으니. 드래곤은 속으로 끙, 하고 앓았다. 지금껏 해 온 유희 중에서 자신의 존재에 이렇게 맹목적으로 달려든 인간은 없었다. 그가 인간으로서 죽으면서 퇴장한 모든 유희와 엮였던 인간들은…… 물론 그들도 무척 슬퍼하긴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슬퍼하는 기간과 관계없이 인간들은 언제나 앞으로 걸어 나갔다. 짧은 인간들의 인생에서 드래곤의 존재는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희미한 기억만 남는 것이었다.

드래곤은 눈을 감고, 힘을 조금 끌어왔다.

그러자 그의 금발이 부웅- 뜨고 입고 있는 옷이 따뜻한 바람에 나부끼며 흔들렸다. 금빛 아지랑이 같은 것이 그의 몸을 감싸 안고 흐르듯이 요동쳤다. 번뜩, 마치 달 두 개가 눈동자에 박혀 있는 것처럼 밝게 빛나는 금안이 보였다. 드래곤은 금안을 살짝 들어 올려 먼 곳을 바라보듯이 응시했다.

푸스스- 곧 떠올랐던 금발이 천천히 가라앉고 먼 곳을 응시하는 것처럼 보였던 드래곤의 눈동자가 왕자로 향했다.

“계약은 성립되었다. 지금 당장 출발하지.”

“……찾았습니까?”

미하일이 테이블 위로 두 손바닥을 펼쳐 내고 앞쪽으로 상체를 숙여 왔다.

하하, 드래곤은 그런 왕자를 진정시켰다.

“성급하긴. 모든 일에는 절차가 있는 법이다.”

사실 아니었다. 절차가 있다는 것은 다르펑의 뿔이고, 드래곤은 시간을 조금 벌어야 했다. 레어에 있는 만드라고라가 다 자라려면 한 달 정도가 필요했다. 그때까진 이 어린애 장난 같은 소꿉놀이에 어울려 줄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어디로?”

왕자가 작게 중얼거렸다. 드디어 그가 원하던 것을 찾을 수 있다는 것에 저도 모르게 입에서 흘러나온 질문이었다.

“그 인간이 떨어졌다는 절벽으로.”

왕자는 드래곤의 말에 역시. 라고 말하는 표정으로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는 단단히 결심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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