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금
1화
1. 이 동행은 시작부터 망했다
왕자는 미칠 듯이 우울했다.
학기 하나가 어떻게 끝나는지도 모르게 영혼 없이 시험까지 쳤다. 물론 왕자의 성적은 처참했다. 아카데미의 교수들이 그 성적을 보고 당황했으나 누구 하나 왕자에게 쓴소리할 수 없었다.
왕자는 아카데미 방학이 되자마자 짐을 챙겨 본성으로 돌아와 그의 방에 처박혔다. 그 소식을 들은 왕비와 왕, 그리고 형제들이 시간을 내어 막냇동생을 찾아왔으나, 친구를 삽시간에 잃은 청년을 위로하기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내버려 두었던 왕자가 방에서 나올 생각 없이 며칠째 처박혀 있자, 왕비가 극약 처방을 내렸다. 하인들에게 왕자의 말을 대기시키라 명했고, 왕자는 일주일 만에 방에서 억지로 쫓겨나 왕비의 말로는 ‘머리나 식힐 겸’ 말을 타러 나왔다.
아카데미 입학 전부터 말을 타는 것을 매우 좋아했던 왕자를 위한 강제적인 조치였다. 왕자는 힘없이 말을 타고 성 밖으로 나갔다. 그가 좋아하는 왕국의 산책 코스를 따라가기 위한 방향이었다.
그의 뒤를 따르는 하인과 함께 왕국의 도심 외곽으로 들어선 순간이었다.
“구경하세요! 물 건너온 진귀한 물건들이 많습니다!”
어느 상인이 성벽을 등지고 서서 호객 행위를 하고 있었다.
그의 좌판에는 잡다한 것이 펼쳐져 있었고 바로 옆에 의자가 놓여 있었다. 늘어진 것을 보아하니 여인들을 위한 물건들이었고, 레이디들이 앉아 편하게 물건을 볼 수 있도록 한 배려인 것처럼 보였다.
상인은 시종을 뒤에 이끌고 값비싼 말을 탄 소년을 향해 외쳤다.
“질 좋은 단검도 있습니다!”
왕자는 어차피 남아도는 시간 구경이나 해 보자고 생각했다. 왕자는 타고 있던 말에서 뛰어내려 말고삐를 하인에게 맡겼다. 곁을 지키던 하인이 좌판으로 걸어가는 왕자를 말렸으나 왕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상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하인이 더 빠르게 뛰어가 상인에게 주의를 주었다.
“왕자님이시네. 예의를 갖추시게.”
이에 허리를 숙였던 상인이 놀라 더 깊게 허리를 숙였다.
“아이고, 그렇습니까? 세상에.”
왕자는 하인에게 “호들갑 떨 것 없어.”라고 말하며 상인의 좌판에 있는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 구석진 상점에 왕족은커녕 귀족도 만난 적 없는 상인은 식은땀을 흘렸다. 귀한 손님을 허투루 접객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선 여기에 앉으시지요.”
왕자는 상인이 가리킨 의자에 아주 품위 있게 앉았다. 고귀한 핏줄이 앉기에는 초라한 나무 의자였으나, 왕자가 앉으니 시장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의자가 매우 고급스러워 보였다.
“마침 왕자님께 딱 맞는 물건이 하나 있습니다.”
상인은 좌판에 놓인 물건이 아닌, 좌판 밑의 상자에서 무언가 꺼내 들었다. 상인이 꺼내 든 것은 아주 고급스럽게 마감된 보석함이었다. 보석함의 재료가 고급스러운 데다가 고풍스러운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어 그 자체로도 무척 비싸 보였다. 하지만 상인이 보여 주고 싶은 물건은 바로 그 안에 있는 것이었다.
남자가 보석함의 뚜껑을 열었다. 보석함의 자줏빛 공단 위에 마치 금빛 오팔처럼 매끈하게 빛나는 둥근 것이 담겨 있었다.
“……드래곤의 비늘입니다.”
그것은 반짝거리기만 할 뿐 아무 쓸모도 없어 보였다.
왕자는 관심이 식은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안타깝다는 말투로 보석함을 내민 남자에게 말했다.
“그대에게는 미안하지만, 내가 보석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그리고 덧붙였다.
“다른 것들은 없나?”
그 질문에 상인이 목뒤를 긁적였다. 이것 외에는 보여 줄 만한 것이 없었다. 그 반응을 확인하고는 왕자가 앉은 의자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때였다.
상인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왕자님 하오나 이 물건에는 특별한 전설이 있습니다.”
특별한 전설? 왕자는 특유의 무심한 표정으로 햇볕을 많이 받아 어두운 피부를 가진 상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용의 피를 가진 자가, 이 비늘을 문지르면 비늘의 주인이 나타나 소원을 들어준다고 합니다. 그것이 들어줄 수 있는 모든 소원을요.”
왕자의 무심했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소원을 들어주는 드래곤이라? 왕자가 관심 있어 하는 태도를 보이자 상인의 목소리가 더 음흉해졌다. 왕족들은 용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고전 설화가 있었다. 아마 이것의 주인이 있다면 왕족들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 전설에 딱 맞는 이가 바로 제 앞에 계시지요.”
남자는 조용히 왕자의 고민을 기다렸다. 왕자는 의자에 앉은 채로 고민하다 남자의 손에 들린 용의 비늘에 팔을 뻗었다. 그러자 상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보석함을 뒤로 휙, 잡아 뺐다.
“……그게 진짜인지 확인해 보아야지 구매를 할 것 아닌가?”
“왕자님, 어디까지나 금액을 치렀을 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전설이 진짜인지는 상인도 몰랐다.
왜 시장 바닥 어디를 가든 그런 물건들이 있지 않은가. 시험을 통과시켜 주는 벼락을 맞은 나무의 가지라든가, 행운을 가져다주는 동전 같은. 이 물건은 특히나 시험해 볼 대상일 가능성은 현저히 적었다. 일반 시민인 상인 계급이 자그마치 용의 피를 가진 손님을 만나게 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왕자의 고민은 매우 짧았다.
왕자는 호위차 따라와 멀찍한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인에게 눈짓했다. 하인은 남자가 말하는 금액을 듣고 무척이나 놀랐으나, 왕자의 뜻에 따라 정당하게 값을 치렀다. 아무런 흥정도 없이 그렇게 일반 시민의 몇 년치 급료를 상인에게 준 후, 왕자는 보석함의 뚜껑을 닫아 소중히 들어 올렸다. “제가 들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다가오는 하인을 물리며 왕자는 자신의 말에게 걸어갔다.
이런 시장 바닥에서 소원을 빌고 싶지는 않았다. 왕자와 하인이 말을 타자, 금액을 다시 한번 확인하던 상인은 빠르게 인사했다.
“안녕히 가십시오.”
상인은 빠르게 챙겨야 할 짐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왕자가 치르고 나간 값이라면 어느 지방 도시든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것이다. 허무맹랑하게 사기를 친 사기꾼이라고 화를 내며 이 자리로 다시 찾아오는 모습을 상상했다. 남자는 소름이 끼쳤는지 몸을 잠깐 떨고는 빠르게 좌판을 정리했다.
***
왕자는 산책을 나서려다 말고 다시 성으로 돌아와 자신의 방으로 뛰어갔다.
그의 품에는 아주 고급스러운 보석함이 들려 있었다.
뒤따라 들어오려는 하인에게 잠깐 혼자 있겠다고 말한 뒤 왕자는 방문을 닫았다.
널찍하고 화려한 방 안과 매우 잘 어울리는 보석함이었다.
왕자는 그것을 침대 위에 올려 두고 다시 뚜껑을 열었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드래곤의 비늘이 잘 놓여 있었다.
왕자는 크게 심호흡한 뒤, 보석함 안의 것을 그의 고운 손으로 느리게 쓸어 올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크게 좌우로 돌려 어떤 변화가 있는지 확인했다.
그러나 그의 화려한 방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왕자는 귀한 입으로 나직하게 욕을 했다.
역시 사기꾼이었다. 친구를 잃은 슬픔으로 자신의 머리가 어떻게 된 게 틀림없었다. 왕자는 언제 조심스럽게 만졌냐는 듯이 보석함 안에 있는 것을 우악스럽게 움켜잡았다. 그리고 그것을 밖으로 나 있는 유리창으로 던지려는 순간이었다.
“그거 내려놔.”
갑자기 혼자 있었던 방 안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왕자의 뒤에서 난 소리였다. 왕자는 드래곤의 비늘이라는 것을 쥔 손을 천천히 내렸다. 목소리가 어딘가 모르게 익숙했다. 그 목소리는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매일 아카데미에서 시간을 보냈던 친구의 목소리였다.
왕자는 경악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아드리안?”
그의 눈앞에 밝은 금발의 남자가 서 있었다.
왕자는 당황했다. 상인은 분명 비늘의 주인이라고 말했었는데.
그의 앞에 서 있는 것은 아카데미에서 죽었던 아드리안 헤더였다.
왕자도 놀랐지만,
이 성안에서 가장 당황한 사람은 바로 아드리안 헤더 본인이었다.
***
레어에서 한가롭게 잡초를 뽑고 있었던 드래곤은 갑자기 본성으로 소환당했다. 그리고는 자신을 소환하자마자 귀중한 소환물을 창밖으로 던지려고 하는 미친놈을 우선 말렸다. 그 미친놈이 이쪽으로 몸을 돌리자, 골드 드래곤은 속으로 경악했다.
저번 유희에서 만났던 인간이었다. 바로 지난달에 그의 앞에서 죽은 척했었던 일만 아니었다면, 그는 왕자에게 반갑게 인사했을 것이다.
“소환자여,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다.”
아드리안 헤더였던 드래곤은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러고는 드래곤 특유의 근엄한 말투와 표정을 지었다.
왕자는 무척이나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그 모습은 뭐지? 아드리안 헤더와 똑같은 모습이잖아.”
“시전자가 원하는 모습으로 현신한 것일 뿐.”
골드 드래곤은 일단 잡아떼기로 했다.
“소원을 들어주는 데에는 별 의미 없는 외양이다.”
제 것이 아닌 화려한 왕자의 방에도 전혀 위화감 없이 어울리는 미남자의 얼굴은 무심했다. 금을 갈아 넣은 듯한 밝은 금발과 그 금발 밑의 반짝이는 금안은 골드 드래곤의 것이 맞았다. 그것은 아드리안 헤더가 가졌던 부드러운 밀빛 눈동자와는 확실히 달랐다.
골드 드래곤은 왕자의 손에 들린 비늘을 빤히 바라보았다.
언제였던지 생각도 나지 않는 그때 비늘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 갔던 인간 하나가 생각났다.
피식, 그의 멋들어진 입술이 비소를 지어냈다. 인간의 욕심이란 그런 것이었다. 소원을 들어준다고 말하면 수백 개의 소원을 만들어 오는!
옛말에 틀린 것은 하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