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7화
-콰콰쾅! 콰콰콰쾅!
처음엔 그저 희미하게만 들렸던 폭발 소리가 점점 더 커지며,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사방을 온통 회색빛으로 물들인 안개가 연속된 폭음에 불안하게 부르르 떨렸다.
오만하게 웃어 대던 인과율의 목소리가 불안한 의문을 품고 뚝 멎었다.
-투확! 투확! 투화하학!
회색빛 안개가 가득했던 공간이 순간적으로 핏빛으로 붉게 물들었다.
주변을 감쌌던 핏빛 구체에 새겨진 문양들이 폭발하며, 회색빛 안개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곳곳에 뻥뻥 뚫린 구멍들을 통해, 새하얀 모래가 폭포처럼 흘러들어왔다.
새하얀 모래가 난입해옴과 동시에, 주위를 가득 채웠던 회색빛 안개가 허무하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흐음. 역시 외부의 충격엔 약한 구조로군. 먼젓번에 유심히 봐두길 잘했어.”
그동안 눈을 감은 채, 침묵을 유지하던 위철용의 입꼬리가 기묘하게 뒤틀렸다.
폭발을 일으켜, 인과율의 『전지전능』을 해지한 것이 그의 소행이었는지.
얼굴 가득 의기양양하게 비웃음을 띤 위철용은 어떠냐는 듯 오만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건….”
“본존이 고작 애송이 네놈을 보호하기 위해, 번거롭게 혈령구를 유지하고 있었겠느냐? 모름지기 싸움에 있어, 두수를 내다보는 것이 무인의 기본 소양이니라.”
나를 보며 빙긋 웃은 위철용은 어느새 빼든 묵빛 창을 빙글빙글 돌렸다.
시커먼 창날이 회전할 때마다, 피처럼 붉은 신력이 창날을 흐릿하게 물들였다.
그렇게 창날을 핏빛으로 물들인 그는 그대로 창을 들어 올려,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인과율을 겨누었다.
【어떻게 된 것이지? 분명히 『전지』의 권능으로도 네놈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거늘….】
“맑은 거울처럼 마음을 비우는 것 또한 무인의 기본 된 소양이올시다. 우리 애송이야 반쪽짜리 무인이니 어쩔 수 없지만 말이오.”
【…그래. 전지전능을 깨부순 것은 칭찬해줄 만한 일이다만. 네놈도 우리 가엾은 계승자도 이제 신력이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야.】
인과율이 자랑하던 권능을 강제로 깨부순 여파인지.
위철용의 창날에 맺힌 핏빛 신력은 조금 전에 비교해서 눈에 띄게 희미해진 상태였다.
위철용이 강림하면서 나의 신력을 ‘빌려’ 갔기에, 내 몸에 남은 신력 역시 조금 전과 비교해서 확 줄어버린 상황이었다.
음울하게 눈을 빛내는 인과율 역시, 상당한 양의 신력을 소모한 모양이지만.
놈의 손에 들린 창에선 아직도 은하수 모양의 신력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는 그쪽은 용케 지금껏 숨겨둔 힘이 있었나 보오? 이거 적잖이 당황스럽소만.”
【이 몸도 제법 많은 신력을 소모하긴 했지만, 이 상태로도 네놈과 계승자 정도는 쉽게 제거할 수 있겠지. 신력을 소모한 너희들이 다음 전지전능을 어떻게 막아낼지 벌써부터 기대되는군.】
-푸스스스.
교활하게 웃은 인과율은 또다시 전지전능을 발동시켰다.
꽃잎처럼 흩어진 은하수가 별 무리를 흩뿌리며, 세상을 회색빛으로 어둡게 물들였다.
음흉하게 웃는 인과율의 얼굴이 회색빛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인정하마. 버러지. 이번엔 특별히 네놈을 주시하고 있겠다. 방금처럼 허튼짓하려는 즉시 네놈의 비루한 육신을 갈갈이…. 크아아악!】
회색빛 안개 속에서 음험하게 뇌까리던 인과율의 입에서 별안간 비명이 터져 나왔다.
회색빛 안개가 주변을 모조리 장악하기도 전에, 새하얀 빛이 사방을 환하게 물들였다.
곧이어 귀에 익은 목소리들이 새하얀 빛 너머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신호 잘 받았소! 멀리서도 잘 보이더군!”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찾아서 다행이로군!」
《이쪽이에요! 싸부님의 잘생긴 냄새가 여기서 흘러나오고 있어요!》
새하얀 빛 속에서 반가운 이들의 얼굴이 연속으로 튀어나왔다.
하얗게 무너지는 모래를 그대로 뚫고 온 모양인지, 모래를 흩날리며 등장한 그들은 자연스럽게 경악한 표정의 인과율을 향해 저마다의 무기를 겨누었다.
“말하지 않았소? 무인은 ‘두’수를 내다본다고 말이오. 우리 인과율 나으리에겐 애석한 일이오만, 혈령구를 계속 유지했던 것은 이들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오.”
잠시 자신의 옆에 나란히 선 아트로포스를 흐뭇하게 바라본 위철용은 삿대질하듯 핏빛 신력이 이글거리는 묵빛 창날 끝으로 인과율을 겨누었다.
반달처럼 휘어진 채, 능글맞게 눈웃음을 짓고 있던 그의 두 눈에서 핏빛 살기가 피눈물처럼 찰랑거리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체구에서 어마어마한 핏빛 신력이 용암처럼 들끓어 올랐다.
“힘 좀 빌리자! 꼬맹아! 파리야!”
“얼마든지요!”
핏빛 살기를 흘려낸 위철용은 아트로포스와 베알제불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가 손을 뻗음과 동시에, 신력의 힘으로 실체화했던 두 배후령의 몸이 쪼그라들었다.
그에 반비례하여, 위철용의 몸에서 불길하게 너울거리는 핏빛 살기가 더욱 광포하게 타올랐다.
“먼저 간다! 애송이!”
-빠지지직!
포효를 내지르며 도약한 위철용의 육신이 순간적으로 시뻘건 핏빛 번개가 되었다.
그렇게 핏빛 전하만을 남긴 채로 시야에서 사라진 위철용은 순식간에 인과율의 앞에 밤하늘의 벼락처럼 나타나, 핏빛으로 물든 창날을 내질렀다.
“가장 낮은 마의 소굴에서 태어나, 하늘을 쥐었던 남자가 바로 나 위철용이다! 만마의 종주이자 만인지상의 자리를 버리고 자유를 택한 본존에게, 그따위 웃기지도 않은 굴레를 씌워?!”
-콰쾅! 콰콰콰쾅!
핏빛으로 물든 창날이 세차게 휘둘러지며, 반원을 그리자.
피처럼 붉은 궤적에서 수없이 많은 핏빛 용이 생성되어, 인과율의 몸을 물어 뜯었다.
피를 머금은 송곳니가 놈의 몸뚱이에 틀어박힐 때마다, 폭발이 일어났다. 폭음이 터졌다.
【…크으으윽. 같잖은 필멸의 굴레를 벗기 위해. 좋다고 미끼를 덥썩 물었던 놈이 이제와서 시건방진 소리를 지껄이긴! 네놈에게서 필멸의 굴레를 벗겨준 게 바로 이 몸 이거늘!】
지나치게 신력을 많이 소모해버린 탓인지, 인과율은 더는 재생을 못 하게 된 모양이었다.
계속된 폭음 속에서 신음을 토한 놈은 부서진 부위를 재생하는 대신, 재빨리 자신의 신체 전체를 흩어내어 재구성했다.
덕분에 인과율의 몸을 이루고 있던 행성과 별의 개체 수가 확 줄어들었다.
놈의 몸에 이글거리던 회색빛 구름이 눈에 띄게 희미해졌다.
-쮸와아앙!
그렇게 몸을 재구성한 인과율은 손을 휘저어, 허공에 수많은 블랙홀을 만들어 내었다.
탐욕스럽게 쩌억 입을 벌린 시커먼 구멍들이 무서운 힘을 발휘하며,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하! 필멸의 굴레를 벗겨준 대신, 새로운 굴레를 씌웠지! 거래라는 것은 본디 ‘공정’의 덕목을 갖춰야 하는 법이다!”
-쿠오오오오!
블랙홀을 바라보며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위철용의 몸 전체가 핏빛으로 물들더니. 그의 외골격 곳곳에서 새빨간 거미줄이 힘줄처럼 우드득 돋아났다.
그렇게 돋아난 거미줄이 눈부신 핏빛을 쏟아내며, 외골격을 붕괴시키기 시작했다.
위철용의 손에서 암룡출동이 천마신공과 융합된 형태로 펼쳐졌다.
-번-쩍!
세상이 핏빛으로 물들며, 시뻘겋게 달아오른 외골격의 폭풍이 블랙홀과 거칠게 맞부딪혔다.
격렬한 충돌 속에서 회색빛 파편과 핏빛 파편이 세상을 어둡고 붉게 물들였다.
「…하늘을 거머쥔 자? 언제 배후령으로 영락한 거지? 아무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콰르르릉!
위철용과 인과율의 충돌에 잠시나마 빈틈이 생기자, 성좌들은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바로 무기를 휘두르며 인과율을 향해 공격을 쏟아냈다.
하늘이 허옇게 물들며, 시퍼런 전하가 파직 거리는 번개들이 인과율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주변의 모래가 단단하게 뭉쳐지며, 시뻘건 용암과 단단한 암석들이 인과율을 덮쳤다.
그 외에도 생명, 죽음, 파괴, 창조 등 다양한 권능들을 품은 공격들이 쉴 새 없이 뻐끔 열린 틈을 비집고 들어와, 인과율의 거대한 육신을 유린했다.
《다들! 놈이 재생도 못 하고 무력하게 처맞는 게 보이시죠! 지금이 바로 기회입니다!》
《으아아아아!》
영혼 그 자체를 둔중하게 울리는 고함이 들린다. 싶더니.
용맹하게 뛰어가는 김혜옥을 필두로 수많은 이들의 영혼이 인과율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의 반투명한 육신엔 그들의 삶 그 자체를 상징하는 별자리가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인과율에게서 흡수한 신력으로 어설프게나마 생전의 장비를 구현한 그들은 천지를 울리는 공격 사이를 뚫고, 용맹하게 무기를 휘둘러댔다.
《내가 바로 그 유명한 쌍문동 성난 친칠라여!》
《…지현 씨. 언제는 성난 햄스터라고 하지 않았었나요?》
-쨍그랑!
고풍스러운 위스키병이 인과율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강타했다.
가느다란 단검이 인과율의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었다.
냉기를 머금은 새하얀 전쟁 망치가 인과율의 관절을 으스러뜨렸다.
다양한 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인과율을 공격하는 현장 속에서.
나는 황금빛으로 물든 어둠달을 빼어 들었다.
-콰르르릉.
정적 속에서 문득 굉음이 들렸다.
고개를 들어, 눈앞을 바라봤을 때는 이미 인과율이 반격을 개시한 상태였다.
삽시간에 퍼진 회색빛 구름이 사방을 암울하게 물들였다. 곳곳에 시커먼 블랙홀이 탐욕스러운 입을 벌렸다.
【너 때문이다! 너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이!】
수많은 영혼과 성좌들 너머로 내 위치를 확인한 인과율은 나와 시선이 마주하자마자 공중으로 아득하게 솟구쳤다.
수많은 이들을 한방에 소멸시켜버릴 생각인지, 놈은 자신의 남은 신력 상당수를 끌어모아.
회색빛 신력이 불길하게 번들거리는 먹구름을 빚어냈다.
…저게 성공하면 모두 소멸해버리겠군.
무엇보다 먼저 인과율의 공격을 무력화시키겠다는 판단을 하자마자, 나는 어둠달에 황금빛 신력을 휘감았다.
그리고 땅을 박차고 하늘로 솟구친 인과율을 따라, 도약했다.
-콰아앙!
얼마나 높이 솟구친 것일까?
사방의 풍경이 흐릿해진다. 싶더니, 순식간에 나와 인과율을 올려다보는 이들이 점처럼 작게 변했다.
높이 솟구쳤던 인과율과 놈이 만들어낸 먹구름이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듯 가까워졌다.
-파지지직!
인과율의 표정까지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놈과 나의 거리가 가까워진 순간.
나는 불길하게 꿈틀거리는 먹구름을 향해, 어둠달에 맺힌 황금빛 신력을 쏘아냈다.
파괴와 관련된 이들의 강력한 권능이 태양의 형태가 되어 발사되었다.
-콰아아앙!
황금빛 신력이 태양 그 자체가 되어버린 듯 강렬하게 빛나며 구름을 향해 충돌했다.
수많은 황금빛 용이 태양 속에서 광포하게 포효하며, 회색빛 먹구름을 맹렬하게 물어뜯었다.
하지만….
“…빌어먹을.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부서지지 않는 거지?”
애석하게도 그 정도로도 불길하게 꿈틀거리는 먹구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내 공격을 흡수하기라도 한 모양인지. 시커멓게 이글거리는 먹구름은 더욱 커져버린 상태였다.
【이미 늦었다! 이 몸의 근원까지 쥐어짠 소멸의 권능이다! 버러지들과 함께 소멸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