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6화
무너져 내린 콜로세움의 바닥이 끝없는 모래의 해일이 되어 내 몸을 덮쳤다.
인과율의 회색빛 신력을 머금어, 거무죽죽한 빛을 띤 모래의 해일은 먹이를 포획한 독사처럼 내 몸을 금방이라도 으스러뜨릴 듯 강력하게 압박해왔다.
-카드드득!
황금빛 신력을 사방으로 흩뿌리며 모래의 해일에 저항하려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망망대해에 빠진 한 마리 반딧불처럼, 내 신력은 아무런 의미도 없이 모래 속에 삼켜졌다.
끝없이 무너져내리며 나를 옥죄어오는 모래의 향연 속에서 시야가 점점 더 시커멓게 암전되어갔다.
“으윽. 무슨 모래가…. 안돼! 그들의 행방을 놓쳐버렸어요!”
「빌어먹을 모래들이 온통 회색의 신력으로 물들어, 그들의 기운을 감지할 수 없게 되어버렸군. 필멸자들이여! 그대들이 희망이 모래 속에 삼켜졌노라! 수색에 집중할 시간이 도래했나니!」
《다들 들었죠? 이 모래 더미 속에서 싸부님을 찾아야 한대요!》
암전되어가는 회색빛 어둠 속에서 모두의 목소리가 점점 흐릿하게 멀어져갔다.
끝없이 무너져 내리는 바닥 속에서 나는 어느새 나를 도와주던 이들과 철저하게 격리되어버렸다.
【이제야 조용해졌군. 버러지 같은 방해꾼 놈들이 여간 끈질겨야 말일세. 드디어 자네와 나 단둘이 오붓하게 싸울 수 있겠어.】
모든 이들의 소리가 사라진 회색빛 고요 속에서, 인과율의 뇌까림이 으스스하게 들려왔다.
세차게 범람하는 회색빛 모래 속에서 놈의 존재감이 점점 가까워졌다.
내 몸을 옥죈 모래가 더욱 거세게 내 몸을 압박해왔다. 암울하게 회전하는 창날의 섬뜩한 기운이 지척에서 느껴졌다.
【…뭐, 자네의 상태를 보아하니. 안타깝게도 지금은 ‘싸운다’라는 개념이 성립하지 않겠군. 뭐, 그동안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자비를 베풀어 단번에 끝내주도록 하겠네.】
-키이이잉!
은하 그 자체를 품은 인과율의 창날이 또다시 거세게 회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자비하게 회전하는 창날에 암회색으로 물든 모래가 엉망으로 갈려 나가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푸스스스.
모골이 송연해질 듯한 살기에, 반사적으로 신력을 일으켜 외골격을 꺼내려 들었지만.
애석하게도 내가 신력을 일으키려 할 때마다, 회색빛 모래가 모든 것을 흩어놓았다.
그렇게 무자비하게 회전하는 창날에 내 몸이 꿰뚫리려던 그 순간!
“고작 이따위 모래 따위에 항복한 게냐? 이 한심한 애송이 녀석!”
갑자기 귀에 익은 목소리가 천둥처럼 귓가를 두드렸다.
동시에 온몸에서 힘이 쑥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더니, 역설적으로 내 몸을 꽉 옥죄던 압박감이 씻은 듯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압박감이 사라지면서, 암회색으로 어둡게 암전되었던 시야가 확 밝아졌다.
“…!”
밝아진 시야에 들어온 것은 성좌들도 영혼들도 아트로포스도 베알제불도 아니었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사방을 둥그렇게 감싸, 쏟아지는 모래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핏빛 구체와 내 쪽을 등진 채, 회전하는 창날과 대치 중인 한 사내의 든든한 등이었다.
심상 세계 속에서 질리도록 봤던 묵빛의 창날이 선명한 핏빛 신력을 머금은 채, 은하수를 품고 거세게 회전하는 창날을 아슬아슬하게 가로막고 있었다.
…설마. 위철용 어르신?
【…호오. 이게 누구야. 공포에 잡아먹혔던 버러지 아니신가.】
“바로 보셨군. 그렇소. ‘천마’라는 시건방진 칭호를 지칭하면서도 공포에 잡아먹혀, 겁에 질린 쥐새끼처럼 숨었던 한심한 버러지가 바로 이 위철용이라는 얼간이올시다!”
전신이 핏빛 신력에 휘감긴 위철용은 자신을 옭아매던 공포를 마침내 모조리 떨쳐 낸 모양인지, 비릿하게 비꼬는 인과율을 바라보며 능글맞게 허연 이를 드러냈다.
“이렇게 직접 대면하는 건 처음이던가? 처음 뵙겠소. 존귀하신 인과율 나으리. 거 참 빌어먹을 족쇄를 채워줘서 아주 고오마웠수다. 덕분에 애송이 놈에게 그동안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줬지 뭐요.”
【조금 전까지 감히 이 몸을 바라보지도 못했던 버러지가 제법 능글맞게 혓바닥을 놀리는구나. 네놈이 다시 주제를 파악할 수 있도록 압도적인 공포를 새겨 넣어….】
인과율이 위철용의 비꼼에 으르렁거리려던 찰나.
비릿하게 비웃음을 흘린 위철용은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대뜸 손목을 꺾어, 핏빛으로 물든 창날을 가볍게 빙그르르 돌렸다.
천마라는 이름을 마작으로 딴 건 아닌 모양인지, 그런 가벼운 동작만으로도 은하수를 품고 정신없이 회전하던 인과율의 창날이 순간적으로 회전을 뚝 멈췄다.
-파차창!
도대체 그 짧은 사이에 무슨 조화를 부린 것일까?
위철용의 입가에 비웃음이 더욱 비릿하게 짙어진다. 싶더니.
회전을 뚝 멈춘 인과율의 창날이 별빛으로 화하며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삽시간에 무기를 잃어버렸기 때문인지, 달과 태양이 귀화처럼 사납게 타오르던 인과율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서늘하게 굳었다.
“아 됐고. 본존에게 뭘 새겨넣으시려거든 주둥이로만 떠들지 말고 모쪼록 행동으로 보여주시구랴. 쪽팔리게 애들 앞에서 나이 든 사람들끼리 주둥이로 싸우자는 것도 아니고. 무슨 시덥잖은 위협이나 하는 거요?”
【…과연. 가장 반항기가 넘치던 버러지답게 제법 재주는 있었던 모양이로군. 좋다. 어차피 버러지와 더 대화를 섞을 필요도 없으니. 압도적인 힘으로….】
-서걱!
위철용의 이죽거림에 인과율의 입에서 불타는 격노가 으르렁거림의 형태로 흘러나오려던 순간.
짓씹듯 내뱉은 인과율의 말이 채 끝맺어지기도 전에, 핏빛 소용돌이에 휘감긴 묵빛 창날이 놈의 얼굴을 정확히 반으로 나누었다.
격노의 감정을 품고 격렬하게 이글거리는 해와 달이 비스듬하게 반으로 갈라졌다.
인과율의 손에 창의 형태로 소환중이었던 은하수가 허망하게 흩어졌다.
“허 참. 나이도 적잖게 먹은 양반이 애새끼처럼 순진하시긴. 지금 우리 싸우는 중 아니었소? 싸우는 중에 도대체 어디다 한눈을 파는 거요?”
【…빌어먹을 버러지 놈이 감힛!】
-콰콰쾅!
계속된 도발에 인과율은 무기를 소환하는 대신, 별과 빛으로 이뤄진 주먹을 그대로 휘둘렀다.
핏빗 구채에 가로막힌 채, 폭포처럼 쏟아지는 모래를 배경으로 우주 전체를 그대로 품은 듯한 거대한 주먹이 위철용의 몸뚱이를 향해 무섭게 짓쳐 들었다.
거대한 주먹이 위철용의 왜소한 육신에 무자비하게 파고들려던 바로 그때!
“세상 물정도 모르고 방구석에만 틀어박혀서 그런가. 나이도 잡수실 만큼 잡수신 분이 마음 수양은 개나 줘버린 모양이오? 고작 이따위 도발에 넘어가다니…. 웃기지도 않군 그래!”
-꽈드드득!
사방에 안개처럼 퍼져있던 핏빛 신력이 인과율의 거대한 주먹을 거미줄처럼 칭칭 동여맸다.
거미줄처럼 주먹을 휘감은 핏빛 신력은 주먹을 타고 역병처럼 별과 행성으로 이뤄진 육신 전체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미천한 잔재주에 불과하오만 신력을 섭섭지 않게 넣었으니. 심심하진 않을 거요. 천마신공 제 육식 응혈괴폭(凝血怪爆)이란 놈인데. 신교가 자랑하는 무리가 듬뿍 담겨있으니 부디 느긋하게 잡숴보시구려.”
-투콰콰쾅!
고약하게 입꼬리를 뒤튼 위철용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오자.
인과율의 육신을 휘감은 거미줄 형태의 핏빛 신력이 찰랑거리는 핏물처럼 유형화되어 단단하게 응고되더니, 이내 엄청난 폭음과 함께 그대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스르륵. 스르르륵.
그렇게 시작된 폭발은 단순히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인과율의 육신이 터져나가는 것과 동시에 그의 육신으로부터 허공으로 흩뿌려진 핏빛 신력들이 허공에서 얼기설기 얽히며 거미줄 형태가 되어 그대로 응고되었다.
【크으윽! 하찮은 잔재주를…! 크악!】
-콰콰쾅! 콰콰쾅!
핏빛 신력이 거미줄 형태로 얽혀 응고될 때마다, 그 지점에서 또다시 폭발이 이어졌다.
폭발이 계속해서 끝없이 이어지는 통에, 인과율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조차 못했다.
놈이 그렇게 휘청거리자, 주변을 둘러싼 핏빛 구체를 두드리는 회색빛 모래의 색이 점점 연해졌다.
“보았느냐? 애송아. 이게 바로, 네놈이 그 잘난 외모를 선택하기 위해 포기했었던 천마신공이란 놈이다.”
“늦었잖습니까. 도대체 언제까지 궁상을 떠시나 했더니….”
“그건…. 그렇지. 이번만큼은 본존이 사과하도록 하마! 본존이, 아니 이 못난 늙은이가 부끄러운 짓을 한 건 사실이니 말이다. 미안하다! 설용호!”
계속해서 폭발이 이어지는 인과율을 의기양양하게 바라보던 위철용은 내 핀잔에 히죽 웃더니.
그가 좋아하는 경극 배우처럼 굉장히 과장된 몸짓으로 허리를 숙여, 내게 사과를 표했다.
행동은 장난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진지한 감정을 듬뿍 머금고 있었다.
【…크으으으. 감히 이 몸 앞에서 그따위 시건방진 태도를 보이다니. 고작 공격을 한번을 성공시킨 것 따위로 기고만장해진 건가?】
“어허. ‘한 번’이라니. 어림잡아 천 번은 넘게 몸을 가누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하오만?”
위철용의 이죽거림에 북극해처럼 서늘하게 표정을 굳힌 인과율은 으스스한 기운을 흩뿌리며, 어느새 다시 소환한 은하수 형태의 창을 들어 올렸다.
놈이 이쪽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변을 감싼 모래들이 하얗게 흰색으로 탈색되며 무너졌던 육신이 서서히 수복되었다.
【그래. 인정하마. 겁을 집어먹고 쥐새끼처럼 숨었던 주제에 제법 괜찮은 솜씨를 지녔어. 이번엔 방심 따윈 없이 진지하게 상대해주지!】
-쿠르르릉!
암울하게 요동치는 은하수 속에서 심상치 않은 뇌성이 울려 퍼졌다.
창날을 역수로 잡은 인과율의 몸에서 회색빛 신력이 아지랑이처럼 일어난다. 싶더니.
은하수를 이루고 있던 별들이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푸스스스.
어룽어룽 흩날리는 별 무리가 세상을 회색빛으로 어둡게 물들였다.
강렬한 귀화를 흩뿌리는 인과율의 두 눈이 무서운 빛을 토했다.
우주의 섭리 그 자체가 놈의 의지대로 암울하게 물들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세상의 모든 섭리는 진정한 주인의 의지에 따를지니. 이 몸은 권능은 전지하고 전능하도다!】
…빌어먹을. 또 그 전지전능인가 뭔가 하는 능력인가.
부서져 나간 별들이 회색빛 구름이 되어 핏빛 구체 속을 온통 뿌옇게 물들였다.
모든 것이 흐릿하고 어둡게 변해버린 암흑 속에서 인과율의 목소리만이 암울하게 퍼졌다.
“조심하세요! 어르신! 이 시커먼 공간에선 모든 섭리가 놈의 의지를 따릅니다!”
주변이 회색빛으로 물든 것을 본 나는 위철용에게 황급히 경고를 보냈다.
그리곤 남아 있는 신력을 끌어모아, 인과율의 공격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이미 늦었지. 자네가 말한 대로 이제부터 이 회색빛 허무의 공간에서 세상의 모든 이치가 이 몸의 의지에 따른다네. 먼젓번엔 불청객들의 도움이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지금 우리 사이에 끼어들 만한 불청객은 보이지 않는군. 자네에게 이 위기를 타개할 만한 능력도 없어 보이고 말일세.】
회색빛 암흑 속에서 인과율의 비열한 비웃음이 으스스하게 울려 퍼졌다.
공격에 대비한다고 신력을 한껏 끌어모으긴 했지만, 솔직히 놈이 이죽거린 것처럼 딱히 『전지전능』이란 사기적인 능력을 파훼할만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은 회색빛 모래에 파묻혀 다른 이들과 유리되어버렸기에, 먼젓번처럼 외부의 도움을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망할. 지난번에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감도 잡지 못한 채 당하기만 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성가신 능력을 파훼할 수 있는 거지?
【알다시피 그 쥐똥만 한 머리를 굴려봤자 헛수고일세. 자네의 생각 또한 훤히 보이고 있거든.】
오만하게 뇌까리는 인과율의 비릿한 비웃음이 회색빛 공간 속에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머릿속에까지 울려 퍼지는 놈의 오만한 비웃음에 이를 까득 깨문 나는, 어떻게든 사방을 휘감은 회색빛 안개를 제거하기 위해 어둠달을 꽈악 틀어쥐었다.
【소용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이 회색빛 공간에서 자네의 공격은…. 으응?】
-콰앙!
또다시 인과율의 오만한 웃음이 머릿속에 울려 퍼지려던 그 순간.
갑작스럽게 어디에선가 폭발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